※ 197화
해당 일이 벌어지기 수 분 전.
“왜, 왜 불렀어? 나 이번에는 뭐 잘못한 거 없는데…….”
갑작스럽게 움에게 호출당한 이위로는 영문도 모르고 질질 끌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인어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MBL 연구소 정문 구석. 어두운 밤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긴 왜 왔어? 오늘 데아 언니가 여기 올 계획인 거 아냐? 그래서 피파글랜 언니한테 어그로 끌어 달라고 한 거잖아!”
“쓰읍, 오늘 주군이 연구소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을 거야.”
“뭐어? 왜?”
“그…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움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듯이 굴었다.
“아무튼, 나는 주군 얼굴 보긴 좀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잘 설명해.”
“뭐?”
“아, 걱정하지 마. 나는 이 뒤에 숨어 있을 거니까. 대신 내가 여기 있다는 거 말하지 말고. 내가 시켰다고 둘러대면 주군은 수긍하실 거야.”
“잠깐, 데아 언니가 여기 올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게 무슨……! 어디 가!”
그러나 이위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번쩍! 수풀 뒤 쪽에서 하얀 게이트가 홀로 생기더니 이내 파앗! 꺼졌다.
“아니, 하… 창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는 분명 안쪽으로 이동했는데 왜 이런 곳에…….”
이위로는 입을 텁 다물었다. 정말로 이데아가 왔다. 그런데…….
“어, 언니!”
쿠당탕!
“사, 상태 왜 이래? 괜찮아?”
이데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 ◈ ◈
피파글랜이 게이트 밖으로 호위 기사를 이끌고 나온 직후, 데아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피파글랜이 정소진과 여기은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을 끌어 주는 지금, 데아는 릴림과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너는 이 밑으로 내려가 잡혀온 인어들을 찾아. 나는 연구소를 털러 갈 거니까.
“저, 저 인어 뭐야? 제왕이라고?”
“이, 인어 제국이 실존했다니!!”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뭔가 낯이 익지 않아?”
“어, 그러게,? 어디서 봤었지?”
“저 다녀올게요?”
“어, 어? 그래. 다녀와, 다녀와…….”
데아는 정신이 나간 사람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훌쩍 지나쳤다.
파지지지직!!
“자아, 그럼.”
짝!
그때 피파글랜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홀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전등들이 한 번에 파바박! 나갔다.
“아아악! 뭐야!”
“불이, 불이 꺼졌어!”
그러더니 위잉… 비상 조명이 켜졌다.
이전보다 훨씬 어두워진 홀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전, 전기를 다룬다고?”
“그래! 기억났어! 예전 5년 전에 나온 SS급 던전 보스 인어잖아!”
“뭐?! 세상에, 그럴 수가……!”
‘고마워 피파글랜.’
어두워진 덕분에 데아는 수월하게 홀을 빠져나갔다.
저 멀리서 피파글랜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왜, 왜 온 거냐!!”
“우연이지.”
“뭐?”
와장창! 피파글랜의 손짓 한 번에 진열된 아이템들이 바닥으로 떨어뜨려 부서졌다.
“저, 저……!”
“오…….”
어그로를 끌어 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한다고? 이건 그냥 깽판 아니야?
그러나 피파글랜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기겁을 하든 말든 아무 제품이나 들어 올려 뒤로 던져버리는 꼴이 참 방자했다.
“오……?”
그러면서도 인간들의 신기한 물건이 보이자 슬쩍 소매 속으로 숨겨버리는 모습이… 참 내 권속답지지만…….
“우리들을 잡기 위한 노력은 가상하지만,”
시치미를 뗀 피파글랜은 다시 몸을 돌렸다.
“너무나도 헛되었구나.”
‘저거 분명 천성에 맞는 거 찾아서 기뻐하는 표정임.’
아무튼, 데아는 순조롭게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가 창을 넘었다. 목표는 연구실 내부. 저번에 한 번 간 적이 있으니 더 수월하겠지.
◈ ◈ ◈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머리에 창으로 꿰어 낸 듯한 통증이 오기 전에.
“으, 흑!”
어, 뭐지?
결국 창을 넘자마자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잔디에 코를 박았다. 야외라고?
“아니, 하……. 창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는 분명 안쪽으로 이동했는데 왜 이런 곳에…….”
그나저나 이제까지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었던가? 이게 무슨 일이지? 나한테 무슨 제약이…….
“어, 언니!”
그런데 왜 들리면 안 되는 인어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윌로……?”
“세상에, 이게 다 땀이야?”
“저리, 비켜! 네가 왜 여기에…….”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이래서 움 언니가 데아 언니를 연구소 안에 못 들어가게 막은 거구나.”
“뭐, 움?”
데아는 고개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고통이 좀 가셨다.
“움이 여기 있어? 너는 왜 여기 있고!”
“움 언니는, 여기 없, 없어! 나를 여기에 놓고 사라졌거든.”
이위로는 대략적으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연구소 안은 내가 조사할게. 언니는 돌아가. 나도 게이트를 열 수 있으니까 안 잡힐 자신 있어.”
“안 돼. 절대 안 돼.”
연구소 안에는 데아마저 당하게 한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위로를 혼자 들여보낼 수 없었다.
“아니. 이번은 못 물러서.”
“너…….”
“아픈 인어를 안으로 들여보낼 만큼 내가 약한 전력은 아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위로는 강하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항상 부러웠거든. 얼마든지 주군의 옆에서 호위할 수 있던 트리야가, 므아나 언니가, 그리고 움 언니가.”
이위로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후드까지 덮었다.
“민첩하게 정보를 빼오고, 잡히지 않게 도망치는 것. 그리고 멀리서 목표물을 저격하는 건 내 특기야. 이번에는 나에게 맡기고…….”
지이익, 이위로가 작게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속삭였다.
“이 안으로 들어가세요, 주군.”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 이위로가 역광에 숨어 웃었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가서 피파글랜 언니한테 시킨 어그로에나 동참해!”
“야, 야! 밀지 마……!”
그러나 때는 늦었다. 데아는 데굴데굴 굴러 이위로가 연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고, 그 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난 수십 명의 시종들을 마주했다.
“어… 어……? 이게 무슨…….”
―태초 님이 오셨다! 어서 따뜻한 물과 빗을 가져와!
―태초 님, 변환석을 이리로 주십시오.
―천과 보석, 그리고 베일을 가져오너라!
“뭐?”
최소 수천 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시종들의 손은 재빨랐다.
데아는 주인의 손에 잡혀 빨래를 당하는 고양이 마냥 단번에 잡혀 아웅다웅 강제로 들려 온갖 치장을 받았다.
―오늘은 피파글랜 제왕님과 태초 님께서 처음으로 인간들에게 모습을 내비치는 날이죠?
―어쩜 영광스러울 수가!
이, 이게 뭔――.
―주군. 피파글랜 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줘봐.”
[주군도 끄세요. 그 어그로.]
“이…….”
하지만 이 어그로가 잘 될수록 연구소에 잠입한 이위로와 내부로 잠입한 릴림의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
젠장. 데아는 벌써 무슨 고대 기록에 나올 법한 황족처럼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절망적으로 보았다.
머리 위에는 오묘한 빛을 내는 옥과 하얀 진주로 만든 장식물이 얹어졌다. 그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장신구의 앞쪽에는 끝과 끝에는 길게 늘어진 베일이 있었다.
베일은 얼굴을 완전히 가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강화했고, 설상가상으로 옷마저 해변 위에 그어지는 바다의 선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노을과 닮은 의복.
“나 설명 좀 해줄 인어?”
―피파글랜 님께서 해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데아는 불과 수십 분 만에 끝난 기적과도 같은 치장에 거의 체념 상태였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래. 얘네들이 얼마나 나를 다듬어서 내보이고 싶으면 이러겠냐.
―태초 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시지요.
“아, 인어화?”
시종들의 독촉에 다리가 아닌 꼬리로 바꾸자 저 멀리서 해룡이 나타났다.
그랬다. 여긴 왕궁 안이었다.
―오랜만이군.
“그래. 오랜만이야. 그런데… 너가 왔다는 건…….”
―나는 그대의 소환수이자, 제국의 수호룡이지.
결국 어그로에 합세하겠다는 말이었다.
표정을 보니 대놓고 인간들에게 으스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가 애냐?
―나의 등에 앉게.
“솔직히 말해 봐. 다 즐기고 있지?”
데아는 마른세수를 한 후에 끙차 해룡의 등에 올랐다. 저 멀리 자신을 향해 반짝반짝한 눈을 보내오는 시종들이며, 해룡이며… 다 신나 보였다.
그래, 내가 태초고, 사해의 신인데. 이까짓 거 내 권속들을 위해 못 해줄까?
―기다리시면 곧 피파글랜 님 께서 창을… 앗!
마침 위잉, 하고 창이 열렸다. 희미하게 보이는 건너편에서는 입술을 꾹 다문 피파글랜이 보였다.
“…….”
뻔했다. 너희들의 아둔하고 멍청한 짓거리를 보기 위해 사해의 신께서 직접 행차하시니까, 보고 좌절하고 무력감에 허우적거리라고 했겠지.
일을 이렇게 만들다니…….
“주군.”
물론 데아가 생각하기에 사해의 신이나 제왕 정도 되는 인어는, 인간계의 최상급 헌터만 모이는 이런 파티에 직접 참가할 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친히 행차해 준다는데, 불만 있겠어?
그렇다면.
딱!
그 놀음에 어울려 줄까?
데아를 태운 해룡이 게이트 밖으로 고개를 디밀자말자 데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꺼졌던 조명이 다시 우수수 켜지고, (피파글랜이 눈치껏 다시 켰다) 사람들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하…….”
여기은과 그들을 대놓고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대놓고 꼽을 줄 기회는 흔치 않지. 이렇게 태초의 모습을 드러낼 판이 흔한 것도 아니고.
고아한 신의 행차. 눈부시도록 정교한 해룡을 타고 느릿하게 나타난 사해의 신의 모습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데아는 목소리를 느른하게 깔았다. 웃지 마라 내 자신.
“…얼굴들을 보아하니, 내가 직접 오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은 모양이지?”
말은 짧고 과묵하게. 최대한 거만하고 나태하게. 데아는 웃음 참기 챌린지를 했지만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꽤나 무거워 보였다.
“…….”
태초가 등장하자마자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건 케이지 너머, 고양이의 눈을 발견한 쥐의 반응과도 같았다.
“세, 세상에…….”
찰칵찰칵! 오직 흥분한 기자들이 카메라를 놀렸다.
그래, 찍어라 찍어. 어차피 너희들 카메라는 내가 다 망가뜨릴 거니까.
“그런데 왜 자꾸 찾아오려고 용을 쓸까…….”
그 말 한마디로 사람들은 거대한 패배감을 인지했다.
너희들이 아등바등 15층에 기어 올라오려는 이유는 나 아니야? 그런데 그 전에 직접 와줬는데 반응들이 왜 그러지?
아, 자신이 없나? 아니라면, 내가 오는 걸 사실 바라지 않고 있나?
정곡이었다. 헌터들은 서로의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부일 뿐, 대부분의 헌터는 태초의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여유와 시간이 넘쳐나는 오만한 포식자. 그러나 틈은 보이지 않는 인어. 섬뜩하도록 아름답고 광포한 해룡을 제 애동 마냥 다루는 백색 비늘의 인어.
그는 베일에 가려진 얼굴로 조소했다.
“태초…….”
“태초라고?”
사람들은 수분이 흐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태초만이 가지는 분위기는 사람의 정신을 빼앗는다. 권도언은 담담하게 인정했다. 망할. 벌레들이 꼬이면 곤란한데.
물론 데아는 더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의 임무는 어그로.
“그나저나 이곳은 너무 좁은데.”
“제가 모실까요?”
“아냐. 피파글랜. 그나저나 내 요즘 취미가 뭔지 알아?”
알 리가 없지만 던져 봤다.
“바로 내 왕궁을 꾸미는 일이지.”
일명 왕꾸. 물론 거짓말이었다. 데아는 방 청소도 안 했다.
피파글랜이 바르르 떨리는 입을 소매로 가렸다.
“뭐… 주군의 손길이 닿은 모든 곳이 다른 의미로 다양하게 변모하였죠.”
“그렇지. 다시 보니 인간들의 건물은 너무도 삭막하구나. 직접 영광을 베푸는 수밖에.”
데아는 아직 열려 있는 게이트 너머서 손을 까딱였다. 바다가 넘실넘실 한 방울, 두 방울 들어왔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눈치 빠른 권도언은 튼튼한 기둥 옆에 찰싹 붙었다.
“물을, 만들고 있어……!”
욱신.
“!!”
그때 아찔한 두통이 다시금 찾아왔다. 눈가가 흐려졌지만 능력은 풀지 않았다.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끝난다. 아 진짜 뭣도 못하겠네.
옆에서 피파글랜이 걱정스럽게 흘끔 바라보았지만 데아는 필요로 하는 물을 전부 생성했다.
물은 하나둘 공중에 떠서 빙글빙글 돌아갔고, 그 범위는 작은 도넛만 했다가 점차 커져 백화점 내부의 홀 전체를 장악했다.
“으악! 이 물 뭐야!!”
“이 물을 피해!”
물은 온갖 곳에 붙어서 제 영역임을 자랑했다. 바다를 닮은 보석과도 같은 물방울들은 사람들의 정신을 그대로 홀렸고, 이내.
“지금.”
“!!”
콰아앙!!
그대로 솟구쳐 올라 백화점을 폭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