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뿌드득,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젠장, 제기랄. 나한테 거짓말을 하다니. 왜?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혹시 권도언이 뭘 알고 있나? 그렇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순간 등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작정하고 자신을 속이는 이유… 단 하나였다. 그 던전 안에 정말로 태초가 있던 것이다. 그리고 권도언은 모종의 이유로 그 인어와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최근에는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권도언은 미친 사이코패스였다. 여파 길드의 지하, 권도언의 연구실 안에 잡혀 있던 데아를 5년 전에도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어딘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여전히 불안했다.
젠장, 추측하면 할수록 견고하게 상황이 짜여졌다. 권도언은 이상할 정도로 강한 데아를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로 인해 데아를 사로잡은 인어와 손을 잡은 거라면……?
그렇다면, 설마……!
“데아가 데아가 아닌가?”
흉측한 연구 장면들이 뇌리를 지나갔다.
당장 하영주도 MBL 연구소 안에서 온갖 극악무도한 생체 실험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비슷한 실험을 데아도 당한 건가?
“조종당했거나, 이용당했거나, 세뇌당했거나. 아니면… 데아의 껍질을 뒤집어쓴 인어일 수도 있어…….”
그럼 그렇지. 인어를 그렇게나 싫어했던 데아가, 인어에게 가윗이 죽는 걸 목격하고, 자신도 그렇게 당했는데 왜 인어를 돕겠는가?
“빌어먹을 새끼들…….”
이빨이 뿌드득 갈렸다. 빌어먹을 권도언, 이 가정이 맞는다면 그 새끼는 찢어 죽일 새끼다.
“공격대장님은 아시나?”
상황만 봐선 백리서까지 같은 편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데아를 유난히 아꼈던 그가 이 끔찍한 계획에 동참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래, 백리서 공격대장님은 일단 보류하자.”
하영주는 바로 결심했다.
‘지금의 데아를 만나 봐야겠어.’
그리고, 정말 상태가 이상하다면… 끝까지 인어를 위한다면…….
‘태초. 태초를 죽이자. 그러면 데아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하영주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여기은 길드장님. 저 하영주 입니… 네. 예전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잠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 ◈ ◈
“자. 비상이다.”
“므아나. 당장 설명해.”
“…연구실에서, 하아…….”
“릴림은 나랑 같이 연구소에 안 갔어.”
“같이 갈 기회는 있었다는 말씀이겠죠. 다 필요 없고 지금 당장 돌아오세요. 나머지는,”
“나머지는 어떻게 하게?”
두통은 줄어들었지만 전에 비해 확실히 힘에 제약이 걸린 것을 느낀 데아가 도둑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장소는 인어 제국의 제왕의 집무실 안. 인원은 피파글랜, 백리서, 그리고 태초인 데아였다.
“지금 내가 이 정도인데, 너희들이 나서서 뭘 할 수 있겠어? 100년 전 일을 기억해.”
“100년 전이요? 주군께서 돌아가신 그 날 말씀하신 건가요?”
“…그 날은 맞는데, 그거 말고. 필립의 나라로 건너간 윌로랑 움이랑 그리고 릴림을 기억하라고.”
백리서가 움찔 눈가를 떨었다.
“내가 직접 건너가기 전까지 완전 무력하게 당했었잖아. 맞아, 아니야.”
“…….”
“…….”
데아는 눈치를 살피며 연타를 날렸다.
“그나마 내가 건너가서 다 살려 왔지. 그렇지?”
“다 살고 주군은 돌아가셨죠.”
상대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내 몸은 거의 한계였어. 수천 년을 한 몸으로만 버텼으니 당연하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그때만큼 무력하게 당하진 않아. 그런데.”
퍽! 퍽! 데아는 탁자 밑에서 서로의 정강이를 까는 피파글랜과 백리서의 발 싸움을 중지시켰다.
“너희들이 애냐?”
“주군, 먼저 시작한 건 저 전기 장어예요.”
“무슨 소리람.”
그때 백리서의 무릎을 겨냥한 피파글랜의 꼬리가 빗나가 퍼억! 데아의 무릎을 향했다. 데아는 으득 이빨을 깨물었다. 미친. 개아파.
“불어라. 하나, 둘,”
피파글랜과 백리서가 순식간에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장난하냐?”
“하… 이건 다 므아나가 피해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주군.”
“둘이 똑같아.”
어쭈, 표정 안 풀어?
“아무튼, 나는 이 사안에서 빠질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있어야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니까.”
최대한 적은 희생을 치르고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열쇠. 그건 오롯이 나뿐이었으니까.
“그리고 혹시 내가 잘못되어도 나는 다른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지. 그렇지?”
“네에 네, 그렇죠. 뇌만 무사 한다면 말이죠.”
피파글랜이 묘하게 빈정거렸지만 무시했다.
“나는 기회라도 있지, 너희는 죽으면 끝이야.”
“…….”
“제발 참여하게 해줘. 내가 아니면 이 자리를 누가 대신할 건데.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너? 다른 인어들이 보기만 하면 도망가는 릴림?”
릴림이 미간을 문질렀다. 속으로는 분명 연구실에 같이 갔음에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권도언을 족칠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그나저나 이걸 봐. 내가 가서 뭘 훔쳐왔거든?”
데아는 인벤토리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연구소 안에서 연구 소장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던 바로 그 서류였다.
“이번 실험작의 단면도라고 했어. 분명 이 안에서 확인할 게 더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주군은 이미 뭔가를 알아내신 것 같은데요.”
데아는 슬며시 웃었다. 정곡이다.
“이거.”
데아가 가리킨 부분에는 괴물의 기초 설계도와 각종 이상한 수식이 연달아 적혀 있었다,
“솔직히 이런 부분은 나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으니 넘겨.”
그렇게 나온 결론은 간결했다.
“역시 괴물들에겐 모체가 있어. 그 모체의 핵. 그것만 어떻게 저지시키면 모든 괴물들의 행동이 줄 거야. 그리고…….”
데아의 손가락이 쭉 내려가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그곳엔 검은 심장처럼 생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석이야. 괴물에게도 마석이 있었어.”
마석이 있다는 건, 마력을 다룬다는 거야. 마력을 다룬다는 건, 조건만 된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고.
◈ ◈ ◈
“저, 괴물 몰려드는 거랑 샤샤 헌터 동영상 찍었어요! 이걸 SNS에 올리면 사람들이 다 알아주지 않을까요?”
1차 공격은 샤샤의 방어로 인해 막혔다. 덕분에 사람들은 살았지만 그 행복과 안도감은 오래갈 수 없었다.
“통신 시설이 막힌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무언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은 절망했다.
“인터넷도 안 되고, 통화도, 문자도,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 그럼…….”
“우리가 찍은 동영상, 사진, 그 어느 것도 올릴 수 없어요. 우리는 완전히 고립됐다고요.”
이 섬은 여례아가 만들어 낸 섬. 언제 자원이 하나둘 끊길지 몰랐다.
“그, 그러면 언젠가 섬을 벗어나서 올리면 되지 않을까?”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하지만 안 올리는 게 좋을 거예요.”
석파란이 중얼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게 중요한 증거를 개인 SNS 같은 곳에만 올려버리면 곧장 막히고, 올린 사람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겠죠. 그리고 소문 낼 생각도 말아야 해요. 예전에 양철민 헌터가 하는 말을 어떻게 묵살시켰는지 봐봐요. 환상계 인어에 당했다고 해서 우리를 정신병자로 몰아갈걸요.”
“그럼 언론에 제보하면…….”
“언론사를 잘 따져야 할 거예요. 대부분은 다 먹혔을 테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하나 있어요.”
모두가 희망에 부풀어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 동안 아파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설한지였다.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내부 고발자를 찾는 거예요.”
데아도 데아 나름대로 상황 타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쉬운 건 역시나 다 죽이고 날라버리는 것.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으니까…….
“MBL 연구소 안에서라면 더 좋겠죠.”
“하지만… 내부 고발자가 과연 연구소 안에 있을까요?”
“가정만 해보는 거죠.”
“하나 더 있어요. 방법.”
그때 석파란이 딱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다들 저번에 배협 길드장님께서 하신 말씀 기억나요?”
“으응, 내, 내가?”
“인어와 같이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몇 명의 헌터들은 기겁했고, 몇 명의 헌터들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맞는 말이에요. MBL 연구소와, 인공 던전 포세이돈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단체는 저희 말고 또 있었어요. 바로 인어들이요! 분명 인어들도 포세이돈이 싫겠죠. 그것 때문에 자꾸 인간들이 넘어오고, 자기들의 터전에 피해를 주니까요. 저번에 동굴 던전 안에서도 무수한 하급 인어들이 보스 인어를 대신 잡아 주었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분명 포세이돈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을 거라고요! 특히 MBL과 여례아가 포세이돈을 뭐라고 홍보했는지 생각해 봐요.”
빠르게 탑을 15층까지 올라라. 15층에는 그들의 신이 있다.
인간의 안전을 위해, 무수한 재물을 위해 그리고 복수를 위해.
인어들의 돌아온 주군.
사해의 신, 태초를 죽여라.
“태초는 그들의 신인데, 죽이려는 세력이 좋을 리가 있나요?”
“그, 그건 그래…….”
“잠깐만! 그런데 우리도 헌터잖아요. 인어들이 우릴 도와줄까요?”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게 있어야 한다고 하죠. 그에 대가를 지불하면 돼요.”
“무슨 대가요?”
정적이 흘렀다. 저 멀리 배협이 미친 듯이 데아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보지 않아도 다 보였다. 그만해라 배협. 티 엄청 난다.
“어… 뭐어… 협력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결국 데아는 힌트를 주기로 했다. 우리가 인간들에게 원하는 것. 그래, 숟가락을 떠먹여 주마.
“잘 생각해 봐요. 인간들이 포세이돈을 만들었다는 건, 인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인간들이 혼자서 휙 게이트를 넘어와 전쟁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아하, 그러면 당연히 불안하겠지!”
“아… 맞는 말인데 좀 뻔뻔하네. 자기들은 5년 전에 먼저 시비를 걸었으면서? 되돌려받는 건 싫다?”
뻔뻔해서 미안하다, 새끼야.
“그…러니까. 인어에게 같이 힘을 합쳐 연구소와 포세이돈을 없애자고 제안해 보세요. 그리고 그 대가로, 인어에게 위협 요소가 될 연구소의 모든 자료를 불태우거나, 넘기는 거예요.”
“오오……!”
“여론을 어떻게 바꿔 보겠다는 제안도 해보세요. 헛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못 나오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겠다고요!”
아, 이건 좀 사심이 들어갔나,
“어쨌든, 인어들 입장에서는 손해 볼 장사는 절대 아닐걸요?”
손해는 무슨. 이득이 와장창 남는 장사다.
데아는 남몰래 씩 웃었다.
“일리가 있네요. 인어는 강하고, 인간의 법아래 자유롭죠. 아군이 되기야 한다면 그 누구보다 든든한 존재들이에요.”
흠, 그렇지.
“그런데 인어에게 같이 손을 잡자는 그 말을… 어떻게 전달하죠?”
“어… 그게.”
“당연히 포세이돈 안으로 들어가야겠죠?”
말을 꺼낸 건 세연이었다.
“남은 층은 14층과 15층 둘뿐이에요. 우선 우린 14층에 들어가야 해요.”
“너무 위험해. 들어가면 바로 고립된다고. 인어를 만나기 전에 괴물을 먼저 만나면……!”
“샤샤.”
누군가의 이름에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샤샤 헌터와 같이 들어가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