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그 일이 일어나기 몇 분 전. 데아는 쾅! 잠겨 있던 연구소의 캐비닛 문을 거칠게 뜯었다.
“한 벌 두 벌… 자, 여기요.”
“감사해요.”
연구원의 가운이 그곳에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위생모와 고글도 발견했다. 데아는 그것들을 야무지게 챙겼다. 마치 방역 업체의 직원이라도 된 것 같았다.
“여기서 아무래도 이상한 냄새가 나거든요. 불길해요. 길드장님도 조심하세요.”
“저보다는 데아 씨가 더 걱정이죠.”
삑, 삑. 권도언의 지문 덕분에 출입문이 연달아 열렸다.
“데아 씨, 길 알아요?”
“아뇨. 그냥 마력 따라 가는 거예요.”
가장 더럽고 음습한 마력의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데아는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에서 그런 냄새가…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중간 중간 연구원들과 직원들이 하얀 복도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은 데아와 권도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묘하게 바빠 보였고, 초조해 보였으므로.
“무슨 일이 있나……?”
“잠깐만, 거기 두 분!”
그때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데아는 심호흡을 한 뒤, 최대한 자연스럽게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이시죠?”
“이것 좀 연구 소장님께 가져다주시겠어요? 이번에 테스트 중인 실험체 내부 도면이라 하면 아실 거예요.”
“연구 소장님께서는 어디 계세요?”
“당연히 지하 ‘그곳’에 계시겠죠?”
그곳이라고 하면 누가 알아듣는단 말인가. 하지만 의심받기 싫은 데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장님, 연구 소장 이름 알아요?”
“당연하죠. 정소진. 안경 쓰고 인상이 강한 사람이에요.”
아, 연가을의 언니다.
“그럼 됐어요. 일단 지하로 내려가 보죠.”
물론 이 도면은 건네줄 생각이 없었다. 데아는 슬쩍 도면을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물론… 저희 목적지에 이 사람이 있을 것 같긴 해요.”
예감은 적중했다.
데아는 지하 복도를 서성였다. 그리고 마침내 찾은 연구실의 번호는 B1―2.
“쉿.”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연구원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지금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뇨, 오히려 의심 안 받을 수도 있어요.”
다행히 그들은 자신들과 복장이 비슷했다. 데아는 딸깍,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다. 연구원들은 무엇에 열중하느라 데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데아는 후, 숨을 내쉬었다.
‘어? 저건……?’
한쪽 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는 연구실 안, 그 안에는 꼬리가 뒤집어진 어느 인어가 있었다.
데아는 순간 생각하는 것을 잊었다.
‘이게… 무슨.’
움의 손녀, 김유라.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잘 생각해 보면 움에게 손녀가 있을 리가 없고, 그 손녀의 정체 또한 인어인 게 당연한 거였다.
그 인어는 영원히 시간의 틈새에 박제된 인형처럼 놓여 있었다. 물이 가득 채워진 수조 안, 온갖 호스와 장치를 매단 어린 3세대 인어. 모든 연구원들은 그를 바라보며 뭔가를 끊임없이 적고 있었다.
“그래, 가져 왔어?”
그때 누군가가 데아에게 말을 걸었다. 정소진. 권도언이 몰래 데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여자가 바로 연구소장이구나.
“네?”
데아는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그러자 연가을을 묘하게 닮았지만 인상은 완전히 다른 여자. 정소진이 흐음?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뭐야, 그 도면 있잖아. 분명 위에서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아… 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다른 분 아닐까요?”
“아 그런가? 좀 늦네. 그래서, 너는 왜 여기에 왔어?”
이곳은 중요한 실험체가 있는 장소. 정소진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데아는 몰래 챙겨 두었던 볼펜 하나를 꺼냈다.
“선배님이 심부름을 시키셨어요. 심이 다 떨어졌다고 하셔서…….”
이런 연구소 안에서 텃세와 후배 심부름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정소진의 눈매가 한순간에 풀어졌다.
“이런, 누가 또 후배를 갈궜어? 빨리 주인 찾아주고 나가.”
“네. 알겠습니다.”
데아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방의 빛이 닿지 않는 곳, 구석으로 가며 다시 박제된 인어를 살폈다. 그때였다. 모두가 어어? 소리를 쳤다.
“뭐야, 무슨…….”
“수치가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원인을 찾아!!”
“아무래도 지금 테스트 중인 ‘실험작’과 관련한 것 같습니다. 이번 모체의 경우, 강한 반발심이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장난해?! 그 반발심 꺾은 지가 언젠데!”
우우웅― 우웅―
푸른 공명이 울렸다. 데아의 눈으로 작은 잔상이 스쳐 지나가고, 믿을 수 없는 환상이 펼쳐졌다.
“어…….”
분명 눈을 감고 있던 인어가 눈을 뜨고 있었다. ‘김유라’가 유리창에 손바닥을 탁 데고는 데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일순간 세상이 굳었다. ‘김유라’가 속삭였다.
‘나는 당신에 대해 알아요. 알고 있어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당신의 서적을 몰래 읽었었거든요…….’
“뭐…….”
‘당신이 돌아왔네요. 그렇다면 지금 인어 제국은 누구의 지배 아래 있나요? 당신인가요, 폭군 트리야인가요? 그래, 당신이 돌아왔어. 서적에 따르면 모두가 행복하겠네요…….’
“…….”
‘나만 빼고…….’
인어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대로였고, 그렇기에 다소 섬뜩했다.
‘태초 님은 왜 절 구하러 오지 않나요? 왜 날 이렇게 버려두고…….’
인어의 얼굴이 툭툭, 경련하기 시작했다.
‘피파글랜 님의 말씀은 틀렸어요. 나는 움 님의 옆으로 가면 안 됐어. 이렇게나 괴로운데, 이렇게나 잔혹한데…….’
눈이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입이 찢어지며 오돌토돌 박힌 이빨이 쩌억 드러났다. 검은 눈물이 줄줄 흐르고, 두두두두… 거친 진동이 울렸다. 인어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손톱이 확 세우고, 유리창을 빠드득 긁는 인어.
그때 데아의 머리로 따끔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
두통처럼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 데아는 문득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온 몸에 고여 있던 마력이 흩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가까스로 버텼다. 갑자기 머리가 욱신 아파 왔다.
‘진정해. 진정하자.’
데아는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데아 씨, 데아 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어는 눈을 감고 잠든 채 그대로였고, 연구원들도 마력 파동에 대한 걱정만 할 뿐 아무도 혼란스러워 하지 않았다.
‘환상인가?’
“데아 씨, 왜 갑자기 가만히 계세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네? 무슨 일 있으면 그냥 나가요. 그게 더 안전할 것 같으니.”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은데…….”
나만 그 환상을 봤다고? 식은땀이 났다.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괜찮은데…….”
걷고 뛰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아.’
데아는 인어를 가만히 보다가 등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저기에… 뭐가 있어요.”
“네?”
“저것까지만 보고 가죠.”
데아는 곧바로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이곳에는 연구원이 없었…….
“누구냐?”
아니, 있었다.
정확히는 무장한 헌터들이 있었다.
“오, 뭔가 있긴 있나 보네요.”
그리고 데아는 곧장 문을 철컥 닫았고, 권도언은 양손을 들어 올린 그대로 손뼉을 짝 쳤다. 미풍이 잔잔하게 일었다.
“바람?”
그 바람은 순식간에 헌터들의 목을 감고 졸랐다. 헌터들이 경악하며 버둥거렸다. 아주 고요하고 신속하게. 무장한 헌터들이 털썩 털썩 쓰러지는 데까지는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뭘까요?”
밖과 단절된 밀실 안, 권도언과 데아는 쓰러진 사람들을 넘고 앞으로 다가왔다.
벽의 한쪽을 전부 차지한 이상한 물체. 그것은 마치 넘실거리는 하얀 파도 같았다.
“게이트와 생긴 건 비슷한데…….”
파도와 같은 무언가. 데아는 그 안에서 들리는 바다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곳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세계였다.
데아는 멀찍이 떨어졌다.
“데아 씨, 아는 거 있어요?”
“아뇨. 저도 잘… 아, 인간들이 요즘 스스로 게이트를 연다고 하더라고요. 생긴 게 닮았으니 관련된 장치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데아는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따스한 온기와 기이한 시선의 사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을 때였다.
쾅쾅쾅쾅!!
“거기 누구냐!!”
“문 열어!”
“아차차.”
누군가 내부 상황을 알아챘다. 데아와 권도언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어떡하죠?”
“가요. 일단 확인할 건 다 했으니까 이만 나가죠. 나머지는 다음에 확인해요.”
그리고 데아는 게이트를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어……?”
“연 거예요?”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데아는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설마, 지금 내 뒤에 있는 이상한 게이트와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아까 머리를 스친 무언가?
가능성이 있었다. 이상한 환상과 그 직후에 몸에서 힘이 빠졌던 증상. 일관성이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 환상 때문이라면… 그건 위험하다.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다른 인어들에게는 영향을 안 끼칠 리가 없으니까.’
“길드장님. 폭탄 있어요?”
“네?”
“우선 여기와 저기만이라도 폭파시켜요.”
“저 유리 안에 갇혀 있는 인어도 폭파시키게요?”
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왜 날 구해 주지 않느냐는 인어의 환상이 계속 맴돌았다.
“아뇨. 보니까 연구원들이 그 인어를 모체라고 부르던데… 그 인어는 영향 가지 않게만 폭파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틈에 밖으로 나가요.”
“좋아요. 그럼.”
쾅! 문이 벌컥 열리는 순간, 권도언은 폭탄을 군데군데 날렸다. 하급 헌터들이 주로 쓰는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괴한의 신원을 특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펑―!! 콰앙―!!
“으악!! 이것들이 폭탄을 썼어!”
“이 무슨, 크아악!”
모체. 데아의 예상대로라면 그 무수한 ‘괴물’들을 통제하는 게 저 인어일 가능성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부수지 못했다.
첫 번째, 저것이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인간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제2의 모체 또한 나올 것이며, 두 번째, 저 인어의 죽음이 아닌 다른 방법이 분명히 존재할 것 같았으므로.
“창은 왜 안 열려, 열려, 좀!”
데아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다시 허공을 그었다. 머리가 지끈 조여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게이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하던 때였는데,
“어, 나타났네요?”
한 타이밍 늦게 게이트가 나타났다.
권도언은 아무 의심도 하지 못했지만 데아는 곧바로 굳었다.
‘내가 만든 게이트가 아니다.’
마력의 원천마저 달랐다. 완벽하게 낯선 누군가의 게이트가 갑자기 나타난다고? 왜?
‘설마 이 주변에 누군가가 있나?’
주변을 살폈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그때였다. 한쪽 벽을 차지한 게이트에 시선을 빼앗겼다. 우웅… 작게 울리는 하얀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롭게 나타난 게이트가 과연 익숙하지 않은가? 아니. 데아는 이 게이트를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섬에서 담력 훈련을 할 때, 백리서와 같이 하산을 할 때, 마주쳤던 하얀 게이트와 느낌이 비슷했다.
‘과연 우연일까?’
갑작스럽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수상한데…….
“데아 씨. 늦었어요. 먼저 갈게요.”
“네, 네?”
그러나 그때 이 게이트를 데아가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권도언이 불쑥 게이트를 타고 넘어가버렸다.
“아니!”
저 건너편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권도언은 넘어갔고, 포위망은 좁혀져 오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머리는 점점 더 아파 왔다. 관자놀이가 웅웅 울렸다.
“하…….”
어쩔 수 없었다. 데아는 게이트 안으로 몸을 날렸다.
◈ ◈ ◈
그러나 걱정과 달리 안은 멀쩡했다.
“여기가 데아 씨 방이에요?”
“…….”
그렇기에 데아는 더 소름이 끼쳤다. 누가 열었을지 모를 게이트. 그 게이트 너머에 ‘설한지’의 기숙사 방이 있다니.
‘누구지? 누가 이렇게 나를 잘 알고…….’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건, 피파글랜과, 이위로 그리고 칸나니아뿐이었다.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데아 씨, 그런데 저는 집에 어떻게 가죠?”
“지금 그게 중요해요?”
데아는 우선 목걸이를 꺼냈다. 지금은 샤샤의 모습이니까.
그런데 그때.
“어……?”
쿠션을 모아서 사람 형상으로 해둔 침대가 보였다.
“……?”
이곳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문을 확인해 보니 잠긴 그대로였다.
“그럼 누가…….”
자신은 아프니 다가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니 당연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데아 씨. 여기 죽이 있어요.”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유명한 죽 가게 이름이 적혀 있는 비닐봉지 안, 차갑게 식은 무언가가 있었다.
“…….”
데아는 목걸이를 차려다가 관두었다.
그때 유리창 너머로 소란이 들렸다.
투둑, 투둑, 그리고 동시에 빗줄기가 떨어졌다.
“비 오는 소리네요.”
“어? 저게 뭐야.”
아스라이 들리는 비명 소리,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죽음의 메아리.
데아는 후다닥 창문을 열었다. 해변가에서부터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심지어 저 멀리서 해일도 오고 있었다.
“저건……!”
아. 공격이다. 섬 사람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학살. 언제 일어날지 몰라 예측만 했던 학살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시체가… 많네요?”
붉게 물든 파도가 보이는 순간, 데아는 행동했다.
“이게 무슨 상황… 데아 씨, 데아 씨?”
나서야 했다. 데아는 목걸이를 콱 움켜잡았다. 어떡하지? 이미 얼굴이 알려진 사람. 신분이 알려진 사람.
‘설한지’보다, 나서도 되는 사람.
그건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