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방금 전까지 데아가 있던 자리에 석궁이 꽂혔다. 데아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당신 인물을 보았다.
5년 만에 보는 반가운 인물.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예전보다는 조금 지쳐 보이는 표정. 차현이었다.
“어…….”
혼자 있었어도 어차피 피했겠지만 왜 나를 숨겨 주지? 일단 고맙다고는 해야겠지?
“고마워.”
“……?”
차현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인어가 감사 인사도 하네……?”
“…….”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물어볼 게 있는데 하나만 답해 줄래요.”
차현은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스스로도 뭘 하려는 건지 알지 못했다.
“왜, 왜 이곳까지 온 건가요? 여긴 인간계고, 어떻게 보면 적진인데… 왜, 단신으로.”
“먼저 인어를 채간 건 이곳이죠.”
“…….”
“내 것들을 되돌려 받으려고 한 게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인가……?”
차현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다, 당신은, 태초잖아요.”
태초는 단순한 상급 인어가 아니었다. 그는 신으로 숭배받고 있는 인어란 말이다.
“…한 종족의 신이 가장 고작 하급 인어 몇 마리를 구출하기 위해 직접 달려오다니.”
차현은 기묘한 감명을 받았다.
그것이 신이라면, 인어들은 참된 신을 믿고 있는 거다. 힘과 돈을 위해 하급 헌터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입을 닦는 여기은보다, 그것들을 모른 척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 권력자보다, 심지어 나 자신보다, 태초가 더 나은 존재라고 느껴졌다.
“…그렇, 군요.”
알고 있었다. 지금 인간계에 떠도는 태초에 대한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그는 미치지도, 인간계 침략을 노리지도 않았다.
차현은 자신이 본 것을 믿기로 했다.
“당신이 싸우는 걸 봤어요. 당신은… 실험작들을 정말 잔인하게 죽이더라고요.”
그러나 인간들은 급소를 피해 공격했으며, 가장 어린 인어를 다정하게 다독이며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냈다.
“하…….”
차현이 마른세수를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나보다…….”
낫다. 차현이 끝까지 중얼거렸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거지. 아 진짜…….”
그리고 그런 차현을 데아는 황당하게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왜 바쁜 인어 잡아 두고 고해 성사 하고 앉아 있어?’
“…가도 될까요? 아직 정리 다 못했는데.”
“아뇨. 가지 마세요. 여기서 더 날뛰어 봤자. 다른 인어들 못 찾아요.”
차현이 덥썩 데아의 팔을 잡았다.
어두운 공간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태초. 얼굴이나 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태초는 생각보다 굉장히 인간적이었다.
‘정말 이자가 태초인가?’
그때 괴물들이 또 들이닥쳤다. 데아가 물뱀을 쏘아 보내자 다섯 구의 시체가 갈기갈기 찢겨 참혹하게 쓰러졌다.
콰과광―! 구당탕!
“그럼 손 좀 놔줄래.”
“마, 맞구나……!”
“뭐?”
“아, 아닙니다. 이리로 오세요.”
그때 헌터들이 무대 뒤편으로 들이닥쳤다.
“어디 있어!! 당장 나와!”
“쉿. 이리로!”
차현은 미로처럼 쌓인 짐들을 피해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그곳에는 작은 뒷문이 있었다.
“이곳으로 나가세요. 비상계단이니까 바로 밖으로 나가실 수 있어요.”
“나는 이런 거 필요 없…….”
“압니다. 당신이라면 이곳을 손가락 하나로 뒤집어엎을 수 있겠죠.”
아니 그냥 게이트 타고 나가면 되는데…….
“하지만… 나머지 인어들의 행방은 모르죠?”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더 날뛰어 봤자 당신이 찾는 건 안 나와요. 오히려 더 꽁꽁 숨겨지겠지. 그러니 다음 달에 이곳에서 열리는 헌터 홀 오프닝 파티에 오세요.”
랭킹 3위 차현. 그가 태초를 위해 빠르게 속삭였다.
“그곳에 당신이 찾는 게 있을 거예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차현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미친 것 같았다. 이건 거대한 일탈이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인어에게 유리한 정보를 퍼붓는 자신은 상상하지 못했다.
“…안전히 돌아가시라고요.”
이상하게 그를 적대하기 싫었다. 그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태초가 인간계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악순환을 끊어 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예감이 자꾸 들었다.
당신이 나서 준다면 포세이돈 안에서 억울하게 죽는 헌터들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러지 않을까…….
“고마워요.”
차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태초의 은색 가면 아래, 낯익은 눈매가 곱게 휘었다. 어디선가 본 눈매다. 어디서 봤더라?
“이 도움은 잊지 않을게요?”
“…….”
“태초는 어디에 있어! 당장 나와!!”
쿠당탕!! 저 멀리서 성난 헌터들이 짐을 무너뜨렸다. 데아는 뒷문을 열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안녕.”
문이 닫혔다.
차현은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에서 가까스로 깨었다. 참으로 환상 같은 인어다.
차현은 밖으로 나섰다.
“태초는 사라졌다! 방금 게이트를 타고 나갔어!!”
“뭐라고!!”
“찾으려고 했는데 놓쳐서―!”
“아, 그거 너무 아깝다. 그쵸.”
그때 차현의 뒤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차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신의 남자가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너 설마… 도원이야?”
“아니. 도원이 아니라 권도언. 차현 길드장님.”
“…여전히 헌터명으로 불리는 건 싫어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름이 돋았다. 왜 내 뒤에서 나오지? 설마 방금 내가 한 행동을 전부 봤나?
“의, 의외네. 네가 이런 경매장에도 오고.”
“몰랐구나. 나 인어 좋아하거든.”
“아, 그래……?”
“응. 인어를 좋아해.”
권도언은 계속 비스듬히 웃음을 흘렸다.
“그 인어를 참 좋아해…….”
차현이 의문의 불쾌감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여기 갇혀 있던 인어들은 다 사라졌네. 소란의 주동자인 태초도 달아났고, 이제 뭐 한담…….”
봤나? 내가 태초를 내보낸 것을 다 봤나? 봤다면 이렇게 반응하기 어렵지 않나? 나를 배신자로 폭로할게 아니면…….
“이만 정리하지.”
아냐. 상대는 권도언이다. 매끈한 낯짝 아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라.
“태초는 사라졌어요. 무능한 우리는 목표물을 놓쳤고요.”
권도언이 헌터들에게 말했다.
“아쉽지만 경매는 여기까지군요.”
◈ ◈ ◈
“차현이… 생각 외의 변수가 될 수도 있겠는데.”
“한지야. 아픈 건 이제 괜찮아?”
“어? 으응. 괜찮아.”
짧고 길었던 하루가 저물고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데아는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돌돔을 껴안았다.
“한지야. 게시판에 붙어 있던 거 봤어?”
“응 봤어.”
돌아오니 게시판 아래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서 놀랐었지.
그건 바로 포세이돈 5층의 공략에 대한 정보였다. 참가할 사람은 다음 주까지 꼭 연락을 넣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난 이번에는 참가 안 해.”
내가 아는 예언자가 가지 말라고 했거든.
당연히 뒷말을 하진 않았다. 세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보니까 다른 분들도 참가 안 한다고 하시더라고. 피곤하다고 이번에는 쉬고 싶으시대. 물론 수입은 짭짤했지만…….”
“그러면 이번에는 다 안 간대?”
“아니. 철민이 간다는데.”
“양철민이?”
그건 또 의외네.
◈ ◈ ◈
그렇게 빠르게 일주일이 흘렀다.
눈에 띄게 불안해 보이는 자잔은 여전히 데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데아 또한 자잔을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교관님들 분위기가 되게 뒤숭숭하네…….”
“5층 던전 공략이 가까워져서 그런 거 아니야?”
“교관님은 직접 참전 안 하시는데도?”
“가르친 학생이 참전한다고 하면 심란할 수도 있지.”
“그런가… 잠깐, 쟤 뭐해?”
데아는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석파란과 양철민이 있었다. 돌돔에게 낚싯대를 흔들어 주는 양철민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
“…헉!”
데아를 발견한 양철민이 파르르 떨다가 붉어진 얼굴로 불쑥 일어나 나갔다.
“엥? 왜 저러지? 철민이 방금 전까지 돌돔 엄청 예뻐했는데.”
그래 고양이에겐 친절하다 이거지… 데아는 픽 웃었다.
“5층 게이트 소식 들었어요?”
“아. 그거. 당연하지.”
5층에서 열린 게이트는 총 세 개. 각자 400명씩, 총 1,200명이 선출되었다. 남아 있는 인원의 절반을 훌쩍 웃도는 인원이었다.
그리고 당일이 되었다. 데아는 항구에 섰다.
“조심히 다녀와. 백리서 헌터님도 이번에는 참여 안 해서 불안할 텐데.”
“흥, 내가 애냐?”
양철민 또한 배에 탔다. 데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인벤토리에서 하급 이동 스크롤을 꺼내 주었다.
“이걸 왜……?”
“돌돔 예뻐해 준 선물.”
“참나, 내가 언제!!”
하지만 손은 착실하게 스크롤을 받아 갔다. 솔직하지 못한 놈…….
그렇게 500명 남짓한 헌터들의 배웅을 받으며 1,200명의 헌터들이 떠나갔다.
“괜찮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한지야, 너 생각보다 정이 많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움이 분명 5층에 가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너무 과민한 생각이겠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민한 생각이 아니었다.
5층 공략 후, 다시 섬으로 돌아온 헌터는 단 한 명뿐이었다.
◈ ◈ ◈
“어? 저, 저게 뭐야?”
포세이돈 5층. 던전 내부에는 엄청난 양의 비가 왔다.
정신없이 비를 피하던 헌터들은 끝없이 달려갔고, 카메라의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그 안에는 양철민 또한 있었다.
“저기 뭐가 있는데?”
“빛이다!”
헌터들은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어두운 하늘, 폭우가 내리는 날씨. 400명의 헌터들은 용맹하게 싸워 보스 인어를 죽였다. 그러나 이변이 일어났다. 출구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때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 양철민은 2층에서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을 찢어 죽이는 괴물들이다.
남아 있던 헌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건 단 다섯 명뿐이었다.
“좀만 참아. 빛에 거의 다 왔어!”
“으, 흐으으…….”
그 안에는 부상을 입은 헌터마저 있었다.
“좀만, 좀만 더 참으세요. 죽지 마세요……!”
힐러가 있었더라면, 힐러만 있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은 괴물로부터 살 수 있었을 텐데.
양철민은 공황에 빠져 환자를 부축했다.
홀로 동떨어져 있던 자신을 유일하게 무리에 끼워 준 형이 지금 복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마, 많이 아파요? 지금 거의 다…….”
툭, 손이 떨어졌다. 헌터들은 입을 동시에 다물었다. 이제 그들은 네 명이 되었다.
양철민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좌절을 배웠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저 빛까지만… 가봐요. 저기에도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아갔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건 흰 옷을 입고 우산을 쓴 연구원들이었다.
“이럴 거면 2층 때처럼 팀을 강제로 나눠서 들어가게 하면 안 되나?”
“그러게요. 몇 팀은 살려 줄 팀, 몇 팀은 죽일 팀, 몇 팀은 절반만 살려 줘서 기죽이는 팀. 이렇게 해서 헌터들을 통제했었잖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거 자꾸 그러면 의심받는다는데.”
“세상에나… 공략은 성공했지만 명예로운 전멸이라니.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 봅니다.”
“고인의 명복만 빌어 줘야지. 그러니까 그걸 왜 발견해? 들었어? 이번 모체가 완성되어서 마력 분산 시험 하려고 포세이돈 안에 넣은 거. 어떤 헌터들이 그걸 건드렸대.”
“실험작들의 모체를 건드렸다고요? 그거 인어 모양이잖아요?”
“그래. 심지어 여기에 MBL 연구소 마크 찍혀 있다고 소리를 지른 거야.”
“세상에! 거기 모체만 있었어요?”
“아니. 모체 지키는 하급 인어들도 있었지. 전부 방금 찍어 낸 거라서 연구소 마크 붙어 있었는데 그걸 또 봤어…….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바로 모든 화면이 꺼졌대. 그래서 어느 팀이 건드렸는지도 모르고, 너무 멀어서 헌터들 얼굴도 안 보였다나?”
“상부는 난리가 났겠네요.”
“당연하지. 바로 길드에서 공략 참전한 팀 다 전멸시키라고 연락 내려왔잖아.”
“아하, 그래서 괴물을 푼 거예요?”
“그래. 안타깝지만 목격자는 있으면 안 되니까……. 아 씨, 하급 인어 또 개량해서 더 풀어야겠네. 이거 수습 어떻게 하냐.”
바위 뒤에 숨은 헌터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방금 우리가 뭘 들은 거지?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돌았었어. 클리어를 해도 출구가 나오지 않는 던전……. 우리가 공략하기 전에 5층을 공략했던 헌터들 사이에서 은은히 돌았던 소문이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양철민의 얼굴이 멍했다.
“하급 인어에게 MBL 연구소의 마크가 붙어 있었다고 하잖아요. 하급 인어 개량해서 풀어 놓는다고 하잖아요.”
헌터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우리가 싸운 인어들, 인어 맞아요? 저, 연구원들이 만든 생물들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