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저건 태초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건 굳는 일이었다.
“뭐, 뭐라고요?”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 눈동자만 바쁘게 데굴데굴 굴러갔다.
“제기랄!”
여기은이 자신의 스탬프를 소환해 곧장 돌진한 순간이었다. 수조 안에 있던 물이 일렁이더니 이내 쨍그랑! 수조를 깼다.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비산했다.
“으아악!! 으악!!”
“도망쳐!!”
물이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꿈틀거렸다. 후드를 눌러 쓴 작은 인영의 손가락 하나로 움직이는 물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누군가는 홀린 듯이 광경을 지켜보았고, 누군가는 의자를 넘어뜨리며 도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딜.”
물이 그대로 여기은을 가격했다. 원거리 빙하 마법계 헌터. 여기은이 재빨리 막아 냈지만 물은 그대로 사방으로 뻗어나가 출구를 봉쇄했다.
“안, 안 돼!! 내보내 줘!”
“으아악! 물이, 물이 멋대로 움직여!!”
“저, 정말 사해의 신이라고? 이곳에 왔다고!!”
데아는 족쇄가 풀린 인어에게 다가와 가볍게 머리에 손을 얹었다. 순식간에 모든 상처가 치료되었다. 말도 안 돼! 사회자가 비명을 질렀다.
하급 인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바다, 바다니임, 바다님…….
데아는 자신의 하체보다 작은 인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게이트……?”
“세상에! 저건……!”
데아는 곧장 게이트를 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들이 털썩 털썩 주저앉았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게이트 안으로 데아는 하급 인어를 내보냈다.
“돌아가.”
데아의 팔을 잡고 매달리던 하급 인어는 곧 그리운 고향의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바다니임. 여기 저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친구들, 다른 친구들도 바로 여기에 있어서……!
“안 돼! 놓치지 마! 상품이다!”
“다 데려갈게.”
―네, 네!
그러나 하급 인어는 곧장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 즉시 게이트가 닫혔다. 동시에 환했던 무대의 조명이 쨍그랑! 쨍! 깨지고 전구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졌다.
“으아악!! 으악!!”
“아무나 불을 켜봐!!”
“소용없어! 저, 저, 저 인어가 조명을 다 깼어!!”
밀실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 속에서, 데아의 후드가 넘어갔다. 오로지 은색 가면과 백발만 하얗게 빛나는 가운데,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경기했다.
앓듯이 미소한 건 권도언뿐이었다.
“하아… 저러니까 내가.”
물은 어느새 거대한 뱀의 형상이 되어 데아의 어깨와 팔을 휘감았다. 뱀이 사납게 입을 벌렸다.
“경배야.”
사해의 신이 낮게 읊조렸다.
―하아, 드디어 이 몸이 나설 차례인가. 필요한 무기가 있어? 어떤 형체든 다 가능하니까 뭐든 말만.
“몽둥이”
경배의 음성이 뚝 멈췄다.
―음… 자기야? 분명 다른 무기가
“몽둥이.”
―…나는 값진 몸이야. 자기야.
“몽둥이. 큰 걸로.”
―그런 시정잡배가 쓰는 몽둥이로 쓰겠다는 거야? 이 우아한 나를?
“몽둥이.”
데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은 그걸 쓰고 싶은 마음이야.”
―하으으… 마음이 아파!
그리고는 끝이었다.
인어들이 신격화하여 신전을 세우고 숭상한다던 고아한 사해의 신, 태초는 무대의 중앙에서 거대한 몽둥이를 들었다. 흉악한 무기의 등장에 권도언이 입을 틀어막았다.
“뭐, 뭐야! 저, 저 흉악한 건……!”
“헌터들은 당장 공격 준비해!”
“태초라니, 무모한 건지,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는 건지…….”
차현은 숨을 죽였다.
적진에 단신으로 들어오다니, 진심인가?
“‘그걸’ 풀어라!!”
여기은이 소리치자 갑자기 무대 뒤편에 숨을 죽이고 있던 ‘실험작’들이 깨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형한 안광이 섬뜩하게 쿵! 쿵! 달려 나왔다.
“당장 태초를 제압해!”
“그래, 그래! 저 인어를 제압해!!”
데아는 곧장 위로 뛰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데아가 있던 자리에 헛손질을 한 괴물들이 우당탕, 바닥을 나뒹굴었다. 줄줄이 서있는 의자 등받이 위쪽을 밟아 뛰어오른 데아는 곧장 경배를 휘둘렀다.
빠각!
“으아악!!”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박살난 카메라가 바닥을 뒹굴고, 그 위로 물로 만들어진 뱀이 푸확! 쏟아졌다가 이내 휘릭 수거되었다.
“살, 살려 주세… 으악!!”
퍽!! 사회자의 옆으로 경배가 거칠게 꽂혔다.
딸꾹, 후드득 부서지는 벽의 파편이 바닥을 뒹굴었다. 데아는 엎어진 사회자의 어깨를 밟았다.
“인어가 이게 다가 아닐 텐데.”
“흐악, 흐악!! 허, 헌터님들 도와주세요!!”
“나머지는 정확히 어디에 있지?”
“어, 없습니, 없어!! 그게 마지막 상품이었다고……!”
“없을 리가.”
차현은 태초를 서서히 포위하는 헌터들을 보았다. 그중에 여기은은 없었다.
“여기서 뭐 해?”
“너, 너야말로 무슨……!”
여기은은 멀찍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칸나니아가 분명 말했지. 병기가 완전히 태초를 압박하기 전에는 절대 맞서 싸우지 말라고.’
방금 전에 태초의 공격을 막아 냈을 때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저자를 이기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여기은은 손에 꼽히는 강자였고, 더불어 자신과 호각을 다루는 상대를 몇 만나지 못했다. 기껏해야 권도언이나 차현, 그리고 백리서 정도나 될까.
‘하지만 그건…….’
그들과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예상을 한창 웃도는 농도의 마력과 힘. 뇌를 울리는 공격에 여기은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태초는 대충 손만 휘둘렀을 뿐인데……!’
고작 저 수조의 물로 이 정도의 힘을 낸다고? 제기랄, 젠장, 망할.
웅크린 재앙. 완전히 숨이 끊기지 전까지 방심하지 말라던 칸나니아의 경고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 이건 도망치는 게 아니다. 단지 때를 기다리는 거다. 저 병기들이 태초에게서 마력을 완전히 빼앗아 가기를 기다리는 거다.
“지금… 너 숨은 거야?”
“말조심해. 닥쳐!”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태초는 마침 시회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말을 안 하네…….”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누군가 히끅거렸다.
“됐어. 내가 찾으면 돼.”
태초는 등을 돌려 무대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다!!”
“공격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공격계, 지원계, 마법계, 다양한 마력이 중구난방으로 튀었다. 난장판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은색 가면 아래,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물은 증식했고, 거대한 마력은 오직 한 명의 주군 아래 고개를 조아렸다. 가볍게 허공을 긋는 동작. 낭비가 없는 한 걸음. 태초는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법을 아는 자였다.
‘어, 잠깐……?’
차현의 눈이 반짝였다.
‘모두 앞에서 힘을 드러내는 게 익숙하지만, 단순 학살이 익숙한 자가 아니다.’
“으아아악!!”
“흐아악!!”
헌터들이 숨을 들이켰다. 폐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마력의 농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지? 이 압박은? 몸을 뒤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푸하―!!”
“흐악!!”
그건 무형의 힘이었다. 무기를 쏘아 보냈던 무수한 헌터들이 우당탕탕! 한 덩어리가 되어 의자 뒤로 밀려 넘어갔다. 광풍이 일며 장내의 모든 창문이 터져 나갔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물방울이 칼날이 되어 헌터들의 몸을 찢었다.
쨍그랑―! 쨍그랑!
“으아악!! 으악!!”
“살려, 살려 줘!! 피가!!”
“실험작이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실험작이 저기 있는데, 왜!! 소용이 없어!”
“엄살은.”
데아는 손을 다시 들어올렸다. 헌터들의 팔다리를 찢었던 물방울들이 다시 모여 뱀이 되었다.
일부러 급소를 다 피해 줬더니 죽는 소리를 더 내고 있다. 데아는 그대로 무대 뒤편으로 들어갔다. 우뚝, 그 전에 멈춰야 했지만.
무대 뒤편에는 더 많은 괴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아… 확실히 마력이 없어지는 느낌이 나네.”
괴물들의 시야 안에 들어온 인어는 그 즉시 모든 마력을 빼앗긴다. 그러나,
“날 막으려면 미완성을 들고 오면 안 되지.”
데아가 사납게 웃었다. 인간도 아니고 인어도 아니라니. 무자비한 살육을 해도 좋은 존재라니. 경배가 순식간에 검으로 변했다.
가장 많은 것을 찌르고 베기 위한 검. 그것을 든 데아가 팔을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날듯 달렸다.
콰과과과―!!
모든 것이 찢기고, 터져 나갔다. 괴물들이 거침없이 쿵쿵거리며 다가왔지만 데아는 날렵하게 바닥을 긁으며 아래에서 위로 그들을 찍었다. 점액질이 퍼억! 위로 튀기고, 뜯어진 살점이 사방을 굴렀다.
“태, 태초―!!”
그 광경을 본 헌터들은 순간 처지도 잊고 데아의 움직임을 멍하니 쫓았다.
수십 구의 실험작. 그것들의 죽은 머리를 밟고 다니는 검은 인영. 저벅 저벅. 발소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걸 헌터들은 그때 처음 알았다.
피는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끈적이는 점액질투성이가 된 무대에서 태초는 더럽혀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존재감이 빙긋 웃었다.
“응.”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태초는 무대 뒤편으로 달렸다.
“지금 장난해!! 따라가서 잡으란 말이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여기은이 버럭 소리치자 헌터들이 아차, 고개를 들었다.
“그, 그래, 저, 저건 태초야!! 강한 게 당연하지!”
“그래 맞아! 어, 어서 잡자고!”
그러나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도를 넘은 수준차이에 기가 질린 탓이었다.
―바다님!!
―바다니임―?!
먼저 간 하급 인어 말대로 무대 뒤편에는 인어들이 더 있었다. 다섯, 여섯, 일곱…….
“분명 이게 다가 아닐 텐데.”
―바다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어!
―바다니임―!!
데아는 몸을 빙글 돌린 다음 돌려 찼다. 스티로폼처럼 철창과 수조가 으스러졌다. 인어들이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왔다. 다행히 족쇄는 없었다.
데아는 게이트를 열었다.
“먼저 돌아가.”
―네!!
―바다님 보고 싶었어요!
“가래도.”
달려드는 하급 인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는 서둘러 보냈다. 그렇게 다시 홀로 남은 아가 잔챙이들 청소를… 하려는데 저기 괴물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어, 음. 보아하니 멀리서 날 저격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건 가뿐하게 피할 수 있지. 그런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데아를 덥썩 잡아끌었다.
“이리로!”
“?”
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