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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76화 (176/223)

※ 176화

“내가 널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고 있었는데, 설마 직접 내발로 찾아올 줄은… 하, 돌아버리겠네.”

움은 드르륵 아무 의자나 끌어 앉았다. 우우웅… 공명하듯 하얀 파도가 울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움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진짜 이런 말하기 싫은데, 정말로 싫은데, 내가 왜 이 지경까지……. 그러나 해야만 했다. 그 누구도 아닌 태초를 위해서.

“같이 협력 좀 하자.”

◈          ◈          ◈

“어디 가?”

늦은 밤, 게이트를 펼치기 좋은 곳을 물색하던 데아에게 누군가 물었다.

“어?”

“아니. 바에 가려고 널 찾았는데 없어서. 여기 있었구나?”

“으응… 나 알던 사람이 잠깐 만나자고 그러네.”

“그 차림으로?”

데아는 자신의 옷에 뭔가 문제가 있나 돌아보았다.

“오늘 비 온대. 우산 챙겼어?”

아, 비가 와서 그랬나.

“아니.”

“이거 빌려줄까?”

세연이 노란 우산을 꺼내 주었다. 깜찍한 캐릭터가 들어간 귀여운 우산이었다.

“어… 고마워?”

“응. 잘 다녀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려버리는 세연의 모습이 너무 깔끔해서, 데아는 미쳐 그 속에 느껴지는 위화감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          ◈          ◈

“어, 움 언니가 한 말?”

―응. 예언 들으러 여파 갔다고 했잖아. 그 말 뭐였어?

“아아. 맞아. 그거 나도 못 들었어. 이상한 쪽지 하나만 줬었는데… 어딨지?”

이위로는 떡볶이를 세 그릇째 조지며 스피커 통화 음량을 줄였다. 갑자기 데아에게 전화가 와서 뭔가 싶었더니… 예언에 관해서였나.

그때 헤타가 가방에서 쪽지를 꺼냈다.

“주군께 전화가 오면 펼쳐 보라고 했습니다.”

“어, 진짜? 그걸 왜 이제 말해?”

―옆에 헤타도 있어? 너희 어디야?

“맵기로 유명한 음식점에 왔습니다.”

―이 대낮에? 윌로, 너 진짜 위험하게……!

“언니보다 더 하겠어? 그나저나 쪽지 이리 줘봐.”

―뭐라고 적혀 있는데?

“으음… 그러니까…….”

‘이번 5층 공략에는 참가하지 마십시오.’

“…라고 적혀 있어요.”

휴대폰 너머는 조용했다. 왜지? 이위로가 궁금해 할 때 나지막이 데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겠네. 응. 알았어.

“뭐… 이유는 여쭤보지 않으십니까?”

―움이 그랬다며. 우선 믿고 봐야지.

당장의 골은 남아 있을지언정 움은 태초에게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건 수천 년의 믿음으로 이루어 낸 깊은 결속과 같았다.

“그나저나 헤타, 넌 어디로 가?”

이위로는 인간계에 오래 있을 수 없으므로 머지않아 태초의 섬으로 돌아갈 터였다.

그러나 헤타는 아니었다. 원래부터 방랑자의 기질을 타고난 그였다. 데아는 수없이 떠돌고 다니는 자신의 마지막 권속의 행방 정도는 알고 싶었다.

뭐지? 이게 막둥이를 가진 부모의 기분인가?

―저는 당분간 인간계에 더 있을 예정입니다.

“그래…….”

―그런데, 주군은 지금 어디십니까?

데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냐면…….

“백화점?”

―네?

어두운 적막이 내려앉은 밤의 세인트 H 백화점. 문을 닫은 것이 분명한데 매끈하고 화려한 외제차가 줄지어 진입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데아는 광택이 도는 차량을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았다.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게 있어서.”

―예?

“끊는다? 윌로 보고 조심히 다니라고 전해 줘.”

―자, 잠깐만, 지금 누구한테 할 말을……!

뚝, 데아는 전화를 끊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열한 시. 늦은 밤임에도 줄줄이 들어오는 차량이 하나같이 우아했다.

“외제 차 너머 외제 차, 외제 차 뒤에 비싼 차, 비싼 차 뒤에 한정판……. 이야.”

발레파킹을 맡기는 차량들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컨셉질 진짜…….

그때 세단 안에서 은색 가면을 쓴 남자가 튀어나왔다. 고묘하게 인식 교란 효과가 걸려 있는 아이템인 건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데아는 기민하게 마력을 읽었다.

‘저거 권도언 맞지?’

데아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며 빙 돌아갔다. 무거운 느낌의 겉옷과 후드가 튀어 보이면 어떡할까 싶었는데 데아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왔어요?”

“조용히 하세요.”

백화점 안의 모든 창이 내려지고, 조명이 커졌다. 데아는 기둥 뒤로 숨었다. 근처에 권도언이 있었다.

“정보 고마워요. 저도 가면 주세요.”

“뒤쪽 안내 데스크 두 번째 서랍. 그 안에 넣어 두었어요.”

데아는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 그곳으로 걸어갔다.

권도언의 말대로 가면이 있었다. 이 가면을 쓰면… 어차피 얼굴은 보이지 않게 되는데.

후드와 가면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괜히 ‘설한지’의 얼굴을 보이게 되면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은 충분히 비현실적이니까.

‘그럴 바에는 원래 얼굴이 낫지.’

스르륵, 데아는 데스크 뒤에 쪼그리고 앉아 목걸이를 풀었다. 뺨을 스치는 머리색이 흰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위에 은색 가면을 썼다. 눈과 코를 가리는 반가면이었다. 그리고 후드를 쓰자 머리 색이 가려졌다.

데아는 천연덕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초대장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인트 H의 18층. 거대한 홀이 펄쳐졌다.

홀은 연극을 시작하기 전의 어두컴컴한 무대 같기도 했다. 데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내받은 위치로 걸어갔다.

자신에게 주어진 번호표는 142.

“인간들 더럽게 많네…….”

“안녕하십니까.”

톡! 뒤에서 누군가 데아에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입을 쩍 벌린 남자가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헌터님이시죠? 척 보니 알겠어요. 이야 부럽네요. 저는 헌터가 아닌데…….”

남자는 킬킬거리며 데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143. 남자의 번호표였다.

“이번 경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연구소의 실험작들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관상용 인어가 나온다고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저는 이 날을 위해 집에 수조도 설치했답니다. 히, 히힉.”

“세상에나. 굉장히 고상한 취미를 가지셨어요.”

뒤에서 또 다른 여자가 높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영생을 산다는 소문이 있다죠? 저 같으면 그걸 확인할 텐데!”

“이곳에 나오는 인어가 한 마리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손가락 하나는 없어도 죽지 않지 않아요. 그 정도는 맛볼 수 있겠죠.”

남녀가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데아는 코를 막았다. 그게 맛있겠냐.

우웅―

“!!”

그때 소란스러웠던 좌중이 뚝 소리를 그쳤다. 어두웠던 무대에서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그거 아세요? 이 경매장에 유명한 헌터들도 왔다는 소문이 도는데…….”

커튼이 젖혀지고, 드르륵― 사회자가 붉은 융단에 놓인 무언가를 끌고 나왔다. 이 경매장의 첫 번째 경매 물품이었다. 남자가 웃었다.

“그렇게 고상한 척을 하더니 인어 경매에 오다니…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          ◈          ◈

“사해의 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어떻게 생겼죠?”

여기은의 물음에 칸나니아는 고민했다.

여기은은 성미가 급하고 입이 가볍다. 그러나 알려 주지 않으면 패악질을 부려 피곤하게 일을 그르칠 자이지. 그래서 칸나니아는 절반만 알려 주기로 했다.

“태초는…….”

가장 이른 시간에 젖은 발을 이끌고 오는 사신. 수많은 눈과 귀가 있고, 칸나니아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모습조차 바꿀 확률 또한 있는 유일한 주군. 그의 창조주. 동시에 없애버리고 싶은 적군…….

“…하얀 머리카락.”

실제로 칸나니아는 백발로 변한 이데아를 본 적은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마력의 색은 원래 희었다.

“그 정도만 알려 주지.”

‘고작 그 정도로 알려 줘서 뭐가 된다는 거야.’

세인트 H 백화점의 18층, 은색 가면을 쓴 여기은은 과거의 대화를 상기하며 의자에 앉았다. 1인의 프라이빗한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의자는 꽤나 안락했다.

‘번호가 50이라.’

그가 받은 번호표은 50이었다.

‘좋아… 경매로 나온 인어들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나 볼까.’

◈          ◈          ◈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제1회 세인트 H 경매를 시작합니다. 앞선 오프닝은 잘 즐기셨나요? 그럼, 첫 번째 물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한창 경매를 진행할 때, 데아의 휴대폰으로 메시자가 도착했다. 세연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한지야 너 방 안에 없는데 어디야? 같이 보드게임 하기로 했잖아.]

헐 맞아. 정신이 없다 보니 깜빡했다. 데아는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빠르게 타이핑했다.

[아,입뤈했어 몸이안조ㅎ아서.]

[결국? 언제? 에후… 그래 푹 쉬어. 난 파란언니랑 배협 길드장님이랑 놀고 있을게.]

[응. 미아ㄴ해.]

경매 물품은 차례차례 지나갔다. 별 볼 일 없는 아이템부터, 기이한 형태의 보석까지.

“인어는 언제 나오는 거야?”

누군가 속삭였다. 그때 옆자리 남자가 쑥 데아에게 몸을 기울였다. 구부러진 의자 너머로 꾸역꾸역 고개를 내미는 정성이 참으로 대단했다.

“조금 지루하지 않아요?”

“…….”

“인어가 나오는 건 마지막 순서라고 합니다. 흐… 벌써부터 설레는군요.”

‘나는 대꾸를 단 한 번도 안 해주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자꾸 말을 거는 거지?’

“자, 열세 번째 물품을 보여 드리기 전에 앞서, 현재 MBL 연구소 내부에서 거의 완성 중인 실험작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때 무대의 조명이 바뀌었다. 쿵쿵쿵 뭔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설계도가 화면 위로 좌르륵 펼쳐져 있었다.

그래. 설계도. 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뭡니까, 저게? 사람이오?”

“하하, 이것들은 사람도, 인어도 아닙니다.”

사회자의 말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둘이 되기도 하지요.”

사람들 사이로 기이한 흥분이 퍼져 나갔다. 그건 처음 보는 것에 대한 공포였고, 기대였다.

그리고 데아는 ‘실험작’들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했다.

“저건…….”

자잔과 함께 해일을 피했을 때 마주했던 그 이상한 생물체였고, 2층 게이트에서 마주쳤던 정체불명의 괴물들이기도 했다.

‘그래.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MBL 연구소가 만들어 낸 괴생명체들이었구만?’

그리고 데아는 단번에 확신했다.

‘저건 병기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어.’

앞에 서면 묘하게 마력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 병기. 오래전, 태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병기. 메이드 인 필립!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완성체는 아니라는 거야.’

저것들을 어떻게 없애지? 저런 증식하는 형태의 괴물은 어딘가 모체가 있을 확률이 높은데…….

“인어들의 마력을 단숨에 없애고,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실험작’입니다. 아주 단단하고, 크고, 강하죠.”

“마력을 없앤다니!”

영상 안에서 거대한 바위를 일격에 깨부수는 괴물의 모습이 나왔다.

“다행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안전합니다. 그들이 공격성을 보이는 건 인어뿐이거든요.”

거짓이라는 걸 데아가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저것들은 더한 연구가 필요한 ‘미완성작’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연구가 진행된다면 어쩌면 그 신을 뛰어넘을 전능을 다루기도 할 거예요.”

“전능이라면?!”

“당연히 인어들의 신, 태초의 힘이죠.”

뭐?

‘여기서 내가 왜 나와……?’ 하는 데아의 뒤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태초의 이름값이 유명하긴 한 모양이었다.

“저, 저 실험작들이 태초의 힘을 쓴다는 건가? 그러면 그 사해의 신과 대적할 수 있는 말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널리 알려지기로, 사해의 신 태초는 온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고 하죠. 연구소 MBL이 온 힘을 쏟는 몇 실험작들 또한 그렇습니다. 아직은 작은 파도를 일으키는 게 전부지만요!”

아냐. 불가능해.

“어떻게 그런… 그런 게 가능한 거요?”

“하하, 너그러운 조력자 덕분이라 해두겠습니다. 뭐, 덕분에 저 실험체는 바다를 일부 다루고, 이능을 다루는 마력도 억제시키는 성질 또한 지녔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사회자가 빙글 웃었다. 데아의 낯이 굳었다. 아냐. 저건 불가능하다.

마력을 억제하는 건 그렇다 쳐도 바다를 다룰 수 있는 건 온 세상에 단 두 명뿐이다. 바로 태초인 나와, 지금은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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