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릴림, 기억나? 예전에 해적 사냥했었잖아. 엄청 오래전에.”
“추억이네요. 그때 저는 까마득히 어렸는데. 이 해골들 설마 그 해적들인가요?”
“어. 맞아. 너 그때 진짜 작았어. 이것도 볼래? 짠.”
데아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보물을 두 손 가득히 꺼내들었다.
“이 해골들이랑 같이 있었어. 예쁘지. 가질래?”
“…….”
백리서는 침착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주군, 태초의 고목 옆에 있는 왕궁의 금고에는 이것보다 더한 재물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
“다다익선…….”
“…….”
“원래 황금은 많을수록 좋아, 릴림.”
백리서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최근에 피파글랜에게 ‘주군 보필 제대로 못 할 거면 당장 관두고 돌아와.’라는 내용의 전서를 받았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백리서의 기억 속의 태초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자였으니까. 물론 이런 주군이 싫지는 않았지만…….
“저희의 보좌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뭐?”
“혹시, 풍족지 않게 보필했다거나,”
“어?”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런 더러운 바닥에 굴러다니는 황금을 두 손으로 직접 주우실 이유가…….”
백리서는 한동안 당황스럽게 황금과 데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손을 내밀었다.
“저에게 주세요. 이런 청결하지 못한 건 직접 수집하지 마세요. 제가 나중에 다 세척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어?”
데아는 허겁지겁 다시 황금을 자신의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백리서의 얼굴에 경악의 온도가 더 올라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황금을 탐내시다니……. 다 권속이 부족한 탓이다.
“아냐. 나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고, 난 그냥 금이 보여서 주운 것뿐이야. 금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냥…….”
젠장! 릴림이 보기에도 내가 세속에 찌들어 보이긴 했나 보다!
“아 됐어, 됐어. 버릴게. 알겠지? 나는 절대로, 너나, 다른 동족들이 날 부족하게 대우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저 황금은… 그러니까…….”
데아는 우르르 황금을 바닥에 버렸다. 미치겠다. 도로 줍고 싶어.
“내가 인간계 생활을 너무, 많이 해서… 흡, 그래서… 그냥 본능적으로 주운 것뿐이야…….”
“아… 그건 그렇죠.”
고개는 왜 끄덕여 너 같으면 저 황금 더미에 눈이 안 돌아가겠니?
“그래도 저것들은 불결해요. 죽은 해적의 유품이니까요. 제국으로 돌아가면 제가 주군을 위한 금은보화를 진상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마음대로 해. 나도 그냥 금이라서 주웠을 뿐이야……. 공짜 돈이니까…….
그때,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얼굴로 데아와 백리서의 대화를 듣던 배협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여전히 혼이 나간 얼굴로 더듬더듬 속삭였다.
“그, 그럼 이 황금들… 전부 제가 가져도 될까, 요?”
황금 아래 만인이 평등하구나.
배협은 가장 들뜨고 정신 나간 표정으로 데아를 바라보았다. 그래. 한국은 사해의 신보다 돈이 더 무서운 자본주의의 나라였다.
“제발, 네?”
“…….”
“이거라면, 이거라면 길드 재건에 힘쓸 수 있습니다, 이거라면 여례아 산하에서 독립할 수 있습니다……!”
데아는 침묵하다가 드르륵 보물을 그쪽으로 끌어 주었다. 잘 가. 내 보물들아. 가서 알찬 곳에 쓰이렴.
“네.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배협은 보물을 쓱싹 쓸어모으고 반짝반짝한 눈으로 데아를 올려다보았다. 인어에 대한 거부감은 완전히 사라진 눈. 당장 ‘사해의 신 만세’라고 외치도록 시키면 할 것만 같았다.
“…이게 바로 자본의 맛인가?”
“주군, 다 왔습니다.”
그때 광장이 나타났다. 거친 지진과 함께.
두두두두두두…….
“흐아아, 으악!”
“뭐야. 이거.”
“떨림 직후에 다리가 올라오더라고요.”
“왜, 왜 저만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길드장님은 지르셔도 돼요. 그런데 내가 지르면 태초 가오가…….”
“태, 뭐요?”
“어? 다리다.”
그때 동굴 깊은 곳에서 거대한 문어 다리가 치솟아 올랐다. 다리는 거칠게 다가왔고, 데아는 얌전히 손을 내밀어 휘감겼다.
“일단 안으로 내려가자.”
◈ ◈ ◈
“하, 하하! F급! 너도 잡혀 왔구나!”
퍽! 데아가 양철민의 머리를 갈겼다.
“구하러 왔다, 새끼야.”
“세상에, 백리서 헌터님! 저희를 구하러 오셨나요?”
“아뇨. 잡혀 왔습니다.”
“둘이 말부터 맞추는 게 어때요?”
보스 인어의 ‘집’은 역시나 넓고 깊었다.
구덩이와 비슷한 형태의 아늑한 동굴 속, 정신을 차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여기에도 바다가 흘러들어 오고 있어. 그 말인즉슨…….’
데아는 몰래 무리에서 빠져나와 구석으로 갔다.
똑똑 물이 떨어지는 구석에 누군가가 있었다.
―바다님?
역시나.
대장이 변해버려 졸지에 터전을 잃고 동굴 구석에 숨어 다니는 하급 인어들. 데아는 조심히 그들을 쓸어 모았다.
어쩌면 공적치 걱정 하나도 안 하고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겠어.
―바다님? 뭐 필요하신가요?
―바다님! 덕분에 아까 그거 배부르게 먹었어요!
약점 파훼. 데아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굴 안에 붙어 있는 유일한 보스 인어의 역린이 시야에 투영됐다. 그건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보스 인어가 애지중지 품고 있는 마석이었다.
‘어? 마석이 왜 역린…….’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한 기억.
문어의 꼬리를 가진 인어들의 특징. 그들은 마석으로부터 알을 탄생시키고, 자신의 근원으로 삼는다. 체내가 아닌 채외에 마석을 내놓고 품는 그들의 역린이야말로 마석이었다.
“애들아. 저기 있는 마석을…….”
그렇다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훔쳐올래?”
저 마석만 파괴시키면 돼. 당장 보스 인어가 크게 휘청하고, 힘을 잃겠지만, 잘하면 죽이지 않고도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도 있어.
―저건 대장이 아끼는 건데요!
―저희 혼나요!
“나한테 혼나는 것 보다 더해?”
-아, 아니요!
손바닥만 한 하급 인어들은 저들끼리 똘똘 뭉치더니 의지를 받잡았다.
―바다님은 지이금 ‘집’에 모인 인간들을 지키려는 거죠?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대장이 인간들 공격 못하도록 지킬게요!
―저, 저는 마석 몰래 가져오면 될까요……?
수백이 넘는 인어들이 저들끼리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순식간에 역할 분담을 마쳤다. 행동할 시간이었다.
◈ ◈ ◈
배협은 또다시 지진을 느꼈다. 석파란이 서둘러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세연을 챙겼다.
“또, 또 지진이야!”
“으아악!”
구덩이 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배, 백리서 헌터님은 어디 가셨지?”
유일한 S급 헌터가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언제까지 의지할 수는 없다. 그 이상한 인어 다리가 나오면 힘을 합쳐서 공격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그들의 뜻대로 되었다. 머지않아 거대한 문어 다리가 치솟았고, 헌터들은 서로의 힘을 합쳐 공격했으니까.
열 개의 다리 중 세 개가 그렇게 훼손되었다.
끼아아악!!
보스 인어가 괴로운 몸부림을 냈다. 다섯 개의 다리가 더 훼손되었다. 헌터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희망이 꿈틀거렸다.
“괜찮아! 괜찮다! 할 수 있어!”
“보스 인어를 거의 다 잡았다!!”
남은 나리는 두 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헌터들은 손발을 맞췄다.
“베, 베었다! 했다!”
남은 두 개의 다리가 투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승리의 환호성이 높게 들릴 때, 한 마법사가 환하게 소리 질렀다.
“드디어 마력이 다 모였어요! 빛 마법을 쏘아 보낼게요! 시야 확보가 가능하다고요!”
“좋았어! 이제 나가자!!”
피유우우우― 폭죽처럼 빛 마법이 쏘아 올려졌다. 저 멀리 팡! 빛줄기가 터지고, 동굴 안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
“어…….”
헌터들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보고 있는 거대한 인어의 머리를 보았다. 날카롭게 갈려진 이빨. 그 안에서 아그작아그작 씹히고 있는 살덩이. 그건 자신의 동료였다.
“으, 으아악!”
“아악! 다리, 다리를 다 잘랐는데 왜!!”
진영이 무너졌다. 구멍 뚫린 쌀 포대처럼 우르르 헌터들이 몰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지면 안 돼! 다리가 더 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자신의 다리 열 개를 망가뜨린 인간 헌터들에게 인어가 분노했고, 거칠게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어디서 튀어나왔을지 모를 몇 개의 다리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를 침범해 옥죄었다.
“다리를 피… 어?”
“틀렸어! 저기 인어들이 더 있어!”
“뭐?”
헌터가 가리킨 쪽은 높은 동굴 벽이었다. 다닥다닥 벽에 매달려 있는 수백의 작은 인어가 몹시 징그러웠다.
“저, 저 인어들은 뭐야! 피해!!”
“으아악!!”
그러나 작은 인어들은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만히 보스 인어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털썩!
“으, 이런 제기랄!”
그때 배협이 인어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낙오된 헌터에게 거대한 다리가 다가왔다.
배협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고, 짙은 죽음의 향기를 맡았을 때였다.
“배협 길드장님!”
“조심해!”
헌터들이 팔을 잡았지만 배협의 발목에 감긴 다리가 휘익! 그를 끌었다. 으아악! 헌터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그때.
퍼어억!
“!!”
배협은 자신의 앞으로 닥쳐온 거대한 무언가를 보았다. 그건 무리를 지은 작은 인어들이었다.
“뭐, 뭐야!”
“지금이야! 거기서 빠져나오세요!”
작은 인어들이 발목에 묶인 자리를 끊어 주었다. 배협은 숨을 몰아쉬며 도망쳤다. 뭐지? 이거 무슨 상황이지?
“저, 저 인어들 뭐야?”
“이상해. 뭐야?”
헌터들은 걸음을 멈추고 홀린 듯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수백 마리의 하급 인어가 일제히 날아 인간 헌터들을 보호하고 보스 인어를 공격하는 그 상황을.
“왜, 왜 저러지? 사이가 안 좋은가?”
“인어가 왜 인어를 공격하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그래! 이때다! 어서 빠져나와!”
“잠깐만, 배협 길드장님!”
석파란이 숨을 헉헉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지랑 백리서 헌터님은 어디 갔어요? 같이 나가야죠!”
크르르륵―!!
동굴의 떨림은 가속되고 있었다. 배협은 전신을 긁는 소름을 느꼈다.
말을, 해야 하나?
“어, 어디에 잘 있을 겁니다. 안심하고 일단 따라 나오십쇼!”
그러나 배협은 말하지 못했다. 지금 열정을 다해 보스 인어를 공격하고 있는 저 작은 인어들이 눈에 익었던 탓이다. 일전에 마주친 그 인어들이다.
‘그렇다면 저 인어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설한지. 샤샤 헌터가 시켜서인가?’
가능성이 높았다. 배협의 머릿속이 괴부하되었다.
F급 힐러 설한지는 S급 헌터 샤샤였고, 샤샤는 인어였으며, 심지어…….
배협이 두려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태초.’
배협은 인어 제국에 대한 출처 불명의 지라시를 꽤나 많이 알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단 몇 명밖에 없는 최상위 계급의 인어들. 그들이 부르는 ‘주군’은 오로지 한 명뿐이라는 것을.
배협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그게 맞는다면, 정말로 그게 맞는다면… 설한지는, 샤샤 헌터는 정말로…….
“지금 무슨 생각해요?”
그때 배협의 뒤로 누가 조용히 착지했다. 설한지였다.
그의 손에는 불투명한 마석이 있었다.
“이거, 내가 깨면 공적치가 올라가거든요. 릴림도 하기 싫다고 해서…….”
모두가 도주하고 있는 가운데, 그가 하얗게 웃었다.
“대신 깨주세요. 그것만 깨면 던전 클리어예요.”
◈ ◈ ◈
[포세이돈의 4층 공략을 축하합니다!]
“벌써?”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권도언이 훌쩍 일어섰다.
“자아… 그럼 마중을 나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