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네.”
배협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 이렇게 쉽게 인정한다고?”
“제가 왜 인정을 하는지 생각을 좀 해봐요.”
데아는 세연을 물가 근처에 눕히곤 첨벙! 속으로 들어갔다.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길드장님은 여기서 혼자 살아나갈 수 있으세요? 물론 전 가능하거든요. 하지만 세연이는 아니잖아요. 길드장님이 절 끝까지 못 믿으시겠다면 두고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배협은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아, 시간 진짜 없는데……. 데아는 조심스럽게 세연을 물속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얼마나 더 많은 하급 인어들이 여기로 올지 몰라요. 이 어둠 속에서 혼자 잘할 수 있으면 하시던가요.”
“나, 나는…….”
“배협. 너는 신경 안 써. 하지만 얘는 살려야겠거든.”
배협의 얼굴이 굳었다.
“선택해. 나를 따라올 건지, 여기서 고립될 건지.”
배협이 우물쭈물 발을 굴리더니 이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알 수가 없네……!”
그 순간, 고성을 지르는 하급 인어들이 피 냄새를 맡고 더 튀어나왔다.
우당탕탕! 동굴의 일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빨리!”
“아, 알겠습니다!”
배협은 코를 꽉 막고 물속으로 뛰었다. 첨벙!
거친 추위가 엄습했다. 엄청난 압력 때문에 폐가 터질 듯이 팽창했다. 배협은 허우적거렸다.
“꽉 잡아.”
턱! 단단하고 얇은 손가락이 배협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 안에서, 배협은 마치 유려한 천처럼 흐르는 눈부신 인어의 꼬리를 보았다. 그건 풍랑이 이는 밤에 마주한 등대처럼 밝았다.
‘맙소사, 맙소사, 인어의 꼬리……!’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배협은 쑤욱! 멱살을 채여 질질 끌려갔다. 차가운 바닷물이 뺨을 마주잡이로 갈겼다. 입 속에 머금은 숨이 점점 한계에 달할 때.
“푸하!!”
다시 지상이 드러났다. 동굴 속이라 여전히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배협은 가까스로 턱! 땅을 찾아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얇은 창이 자신의 턱을 툭 건드렸다.
“아직.”
“하아, 하아, 하아… 왜…….”
배협의 동공이 떨렸다. 하얀 인어 꼬리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어느새 검은 두 다리로 지상에 올라가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있는 데아가 보였다. 세연은 옆에 눈을 감고 그대로 자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아서.”
“뭐, 뭐가 말입니까.”
배협은 헉헉거리며 젖은 손을 땅 위로 올렸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여기 너무 추운데…….
“제가 누구죠?”
“헌터 샤…….”
턱! 창이 훅 나가왔다.
“설한지. 설한지!”
“그리고?”
“인간이죠. 그래, 맞아요. 인간입니다.”
“밖에 나가서 말 잘해요. 당신을 사고사로 위장하는 것쯤은 별일도 아니니까.”
협력해 달라는 말이죠.
그때 저 멀리서 뚜벅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동굴 안을 가득 메우는 담담한 소리. 배협이 휙! 데아를 쳐다보았다.
“그, 그, 변장 아이템 어디 갔습니까!”
“어… 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정신이 없어서 떨어뜨린 그대로 두고 왔다!
데아가 당황에 빠진 그 순간, 배협이 휙 그를 끌었다. 우뚝 서있는 암석 뒤, 모든 것을 그림자로 가리는 장소였다.
“여기서 나오지 마십시오. 얼굴을 보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보니까.”
“오…….”
의외로 훌륭하게 정체를 감춰 주네? 혹시 내가 당장 이길 수 없는 상대라 여겨서 협조해 주는 건가?
그러나 이렇게 숨는 건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마자 데아는 상대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챘으니까.
자, 그렇다면 상대의 얼굴을 본 배협의 반응을 확인할 차례였다. S급 헌터를 철석같이 믿고 데아의 상태와 정체를 폭로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감춰 줄 것인가.
“배, 백리서 헌터님! 무사하셨군요!”
백리서는 묘한 얼굴로 배협을 내려다보았다.
“혼자?”
“네?”
“혼자인가요?”
배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둘…입니다. 여기 세연이도 있거든요.”
“아.”
“인어가 몰려들어서, 어쩔 수 없이 헤엄쳐서 대피했습니다. 헌터님은 멀쩡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혼자 이곳을 통과했다고요.”
백리서가 손전등을 휙, 돌려 웅덩이진 물가를 비췄다.
“여기를 혼자서요. 부상자까지 있는데.”
배협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네. 저도 제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워낙 정신이 없어서,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헤엄쳤던 것 같습니다.”
“아하…….”
“그 큰 소리를 들으셨나요? 발밑이 부서지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헌터님은 분명 1팀에 들어가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만나 뵙게 되다니… 역시 이곳이 다 이어져 있는 곳이긴 한가 보죠. 그래도 무사하셔서 참 다행…….”
“그런데, 저기에는 누가 숨어 있죠?”
배협이 히끅, 딸꾹질을 했다.
백리서가 손전등을 데아가 숨어 있는 암석 위로 화악 비췄다. 역광으로 인해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데아는 일부러 숨을 죽였다.
“아,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내가 숨겼다!’ 적어도 데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거기 누구지?”
“아무도 없습니다. 백리서 헌터님. 분명 잘못 보신…….”
데아는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됐어. 나야, 릴림.”
그리고 고개를 쏙 내밀었다. 배협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백리서도 데아의 얼굴을 확인하고 우뚝 굳었다. 그리고 배협을 흘끗 봤다.
“…이 인간을 죽이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배협의 영혼이 실시간으로 탈곡되고 있었다.
“뭐, 뭐요, 뭡니까. 이 상황은.”
“주군, 이자는 어디까지 아나요?”
“그, 그렇지. 둘은 같은 여파 길드원으로 아는 사이였지. 아니 그래도…….”
‘…주군?’
그 소리에 배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데아가 아차차 눈동자를 돌렸다.
“어… 이제 다……?”
“다?”
“아마도?”
“주군이라니, 그게 무, 무슨 소리입니까?”
“다군요.”
“잠시만, 잠시만.”
배협이 샤샥 백리서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했다.
“뭡니까.”
표정은 악어에 물린 물개에 가까웠지만.
“뭐, 뭡니까. 정말 뭡니까. 설마, 백리서 헌터님 그쪽도……?”
“주군. 변환석은 어디에 두고……?”
“떨어졌어. 그런데 깜빡하고 못 가져왔어.”
“어디예요?”
“저기로 들어가서 한 번 돌면 또 다른 땅 나오거든? 하급 인어 시체가 진짜 많은 곳 있는데 거기에.”
“피 냄새를 따라가면 되겠네요.”
그리고 백리서는 여기에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신신당부를 한 후 거침없이 물에 첨벙! 입수했다.
배협의 입이 완벽한 O자로 모아졌다. 이 세상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다는 배신감 어린 얼굴이었다.
“맙소사, 맙소사, 인어가 이렇게 많았다니……. 내 주변에 이렇게나 많았다니!”
“아니. 우리 둘뿐이거든요.”
“여파의 S급 헌터 둘이 인어였다니. 서, 설마 권도언 길드장님도……?”
“아… 아니. 그건 아니에요. 권도언은 진짜 인간이에요.”
“저, 정말?”
“네. 물에 빠지면 죽는 인간. 꼬리랑 아가미 없는 인간. 영주 언니도 인간.”
“그런데 주군이라는 뜻은, 무, 무슨 의미입니까.”
배협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상급 인어는 확실해 보이는데, 그래. 그러고 보니 하급 인어들이 먹어도 되냐고, 허락까지, 허락까지 구했었…….”
그때였다.
촤악! 백리서가 물속에서 걸어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데아가 다시 목에 목걸이를 착용했다.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헌터 샤샤는 사라지고, 다시 익숙한 ‘설한지’가 나타났다.
배협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이제 이런 해골이 무성한 곳은 좀 벗어나자.”
“그러세요.”
“그런데… 이 주변 길 잘 알아? 1팀이었잖아. 왜 혼자 걸어왔어?”
백리서는 인벤토리에서 손전등을 두 개 더 꺼내 배협과 데아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이 주변에는 카메라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헌터들과 갈라진 김에 혼자 다녔어요.”
“갈라졌다고? 어떻게?”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거대한 다리가 나오더라고요. 문어 다리 같은… 그런 유의 인어겠지만요.”
“그 다리한테 다 끌려갔어?”
“네.”
4층의 보스. ‘어두운 밤의 환상’(B).
수많은 촉수를 가진 하급 인어에게는 특이한 습성이 있었다. 본인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들과 탐이 나는 귀중품, 그리고 눈에 띄는 온갖 것들을 싹 쓸어 모아 자신의 ‘집’ 안에 무작정 비축한다는 습성이었다.
“그러면 다른 헌터들은 다 집 같은 구덩이 안에 잡혀 있는 거네?”
데아는 먼 과거, 바다를 홀로 여행할 때에도 종종 그런 인어를 보긴 했다. 주로 그들은 태초에게 자신이 모은 것을 자랑하기 바빴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렇겠죠?”
“그걸 보고만 있었어? 구했…….”
‘구했어야지!’ 하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백리서가 카메라도 없고, 더불어 연기할 필요도 없는데 내가 인간들을 왜 구하냐는 표정으로 데아를 봤다.
“그… 오해는 안 받았지?”
“네. 어두웠는걸요.”
“그치. 너 맘이지. 그치…….”
그것과 별개로 괜히 마음이 쓰렸다.
연체동물의 다리를 가진 인어들은 식욕과 물욕이 조금 과할지언정, 선하고 순박했다. 다른 인어들과 다르게 공격성도 한없이 낮았다. 더불어 이용당하기도 딱 쉬웠다. 분명히 칸나니아에게 순식간에 말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에 만난 수백 마리의 작은 인어들도 연체동물과였지. 같은 주군 아래 만들어진 인어들이었던 걸까.
“분명 대장이 이상해졌다고 했었는데…….”
그 대장이 이곳의 보스인걸까?
“일단 자리를 옮기자. 릴림, 그곳까지 안내해 줘.”
“이리로 오세요.”
“응. 일단 가서 우리도 그 다리에 끌려가야 할 것 같아.”
“뭐, 뭐라고요?”
배협이 겁을 집어먹었지만 데아는 강경했다.
“그곳에는 절대 남이 못 들어가. 끌려가야 해. 그래야 그 ‘집’에 침입을 하던가, 잠입을 하던가 하지.”
그게 제일 빠를 것 같으니까.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