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너무 늦게 불렀지?”
‘설한지’가 혼잣말을 했다. 그에 응답하듯 손에 잡힌 거대한 창이 부르르 떨었다. 바다를 닮은 창은 어둠 속에서도 홀로 고고하게 빛났다.
“그런데 지금은 베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창의 형태가 홀로 일렁이며 변했다. 짧은 단도, 거창, 단창, 봉, 활. 수없이 모습을 변하던 무기는 이윽고 도의 형태로 손아귀에 잡혔다.
약점 파훼. 데아는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무수한 붉은 점이 한곳에 달라붙었다. 목 아래. 데아는 인벤토리 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냈다.
“이걸 잘 봐, 인어들아.”
강제로 만들어지고, 억울하게 죽을 하급 인어들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너희에게 인식을 줄게.”
핑―! 데아는 손을 튕겨 금화를 높이 핑그르르 던졌다. 어둑한 동굴 천장에 금빛 무언가가 날아가고, 인어들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배협은 데아의 손목이 휙 돌아가는 것을, 팔꿈치와 무릎이 굽혀지고, 몸이 낮아지는 것을, 그리고 단숨에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걸로 끝이다.
“어, 허, 허어…….”
맙소사, 정말이었어. 진짜로 설한지가…….
―끼아아아악!
당황한 음성과 푸른 피가 사방에 튀었다.
배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인어들의 목 아래가 한 번에 베이고, 그대로 두 동강이 나 살점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인어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끼아악!! 그때 한 인어가 긴 팔을 휘익! 휘둘렀다. 데아는 벽을 짚고 피했지만 딸깍, 어딘가에 걸려 목걸이가 풀어졌다.
차르륵!
어른거리는 등불 속, 배협은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익숙한 이목구비의 헌터의 얼굴을 보았다. 어두워졌다가, 어떤 때는 섬뜩하리만큼 밝아지는 헌터의 얼굴.
샤샤 헌터.
차가운 무표정. 배협은 덜덜 떨면서도 찬란히 흩어지는 백발을 응시했다. 투명한 망막이 상대를 비추고, 배협은 숨을 멈췄다.
샤샤. 그 샤샤다.
역시. 역시… 정말이었어.
배협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정도를 모르고 날뛰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 확신이 되었다.
“F급, F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털썩―! 털썩!
수십 구가 넘는 인어들의 시체가 무너졌다. 푸른 피가 질질 흘러 물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린내가 훅 끼쳤다. 저 ‘샤샤’는 자신의 변장이 풀린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수고해 줘서 고마워, 경배야.”
―자기야. 이게 끝이야? 나는 계속 여기 구경하고 싶은데.
“안에서도 할 수 있잖아.”
―저 발자취가 이제 같은 N급 됐다고 나한테 시비 건단 말이야. 돌아가면 나대지 말라고 얼마나 신경질을―!
뚝, 그러나 데아는 스킬을 취소시키고 등을 돌렸다.
예상대로 덜덜 떠는 배협이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정리했다고 해서 랭킹이 바뀌지 않겠지?’
“이제 괜찮아요. 나오세요.”
배협은 부들거리며 일어났다.
“지금은 괜찮아졌긴 한데… 그래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요. 여긴 이제 안전하지 않아요. 하급 인어들은 대부분 무리 생활을 하고, 서로 냄새를 맡고 위치를 파악하니까요. 피 냄새가 났으니까 머지않아 이곳으로 또 올 거예요. 늦기 전에 가야 해요.”
서늘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박힌 눈동자의 색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그때 사르륵 붉은색이 사라지고, 원래의 투명한 흰색이 자리 잡았다.
‘설마 저것이… 그 유명한 ‘약점 파훼’ 기술인가?‘
손이 떨려 왔다. 익숙하지만 한없이 낯설고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배협은 가까스로 일어나며 속삭였다.
“샤샤 헌터.”
“……?”
데아는 그제야 설핏 보이는 백발을 보았다. 더듬거리며 목을 매만졌다.
“어… 어디 갔지?”
“역시, 역시 맞았군요. 전광판은 오류가 아니었어.”
“망했네…….”
“하지만 더, 더 이해를 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왜 F급으로 속여서 여기를 왔죠?”
“당황스럽겠지만…….”
사실 들킬 거 각오하고 벌인 짓은 맞지만.
“지금 그거 따질 시간 없어요. 인어 오기 전에 가야 합니다.”
데아는 뻔뻔하게 세연을 다시 부축했다.
“2층 공략 때 권도언 길드장님이 온 이유도 따로 있었습니까? 그래, 그래… 이렇게 통하는 거였어… 이렇게.”
“지금 당장 가야한다고요. 또 하급 인어들이 몰려오는 소리 들리잖아요.”
그때였다. 데아의 어깨위로 뚝 뭔가가 떨어졌다.
“어?”
배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인어?”
“뭐?”
데아의 어깨 위에는 손바닥보다 더 작은 크기의 하급 인어가 당당하게 올라서 있었다.
동굴 안에서 본 인어와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많은 다리를 가진 하급 인어. 연체동물과였다. 데아는 당황했다.
―바다님!
얘 뭐야! 왜 여기 있어!
―왜 여기 계세요? 다른 애들이 다 바다님 보고 싶다고 했는데에!
배협이 검을 뽑아들었다. 작으니까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배협이 달려왔다. 더 생각할 시간이 없다. 데아는 그 즉시 경배를 소환해 휘익 배협의 목을 겨누었다. 배협이 우뚝 굳었다.
“잠시만요…….”
“왜, 왜…….”
배협의 눈에 혼란이 차올랐다.
“죄송해요. 하지만…….”
데아는 하급 인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게도 협박을 해야 했다.
“이제부터 여기서 본 것은 전부 함구하세요.”
입단속을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노골적인 발언에 배협이 석상처럼 굳었다.
데아는 작은 하급 인어에게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하급 인어가 총총 데아의 손등 위로 기어 올라왔다.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저희들은 원래 여기 근처에 살아요! 이 안에는 그냥 들어왔어요!
그래. 여긴 바닷속이었지. 이렇게 작은 크기라면 어디든지 몸을 비집고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혼자 들어왔어?”
―아뇨?
하급 인어는 무리 생활을 한다. 데아는 당장 등불을 들어 높이 들었다.
“저, 저게 다 뭐야!”
배협이 비명을 질렀다. 높다란 동굴의 벽에는 수백 마리의 하급 인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하급 인어들이 데아를 보자마자 입을 세모로 벌렸다.
―바다님이다!
―바다님!
―바다님이 여기 계셨어!
―우와아 바다님 여기 계셔―! 안녕하세요오!
“그만, 그만 정신없어.”
그러자 뚝, 소음이 그쳤다. 하급 인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며 입단속을 시켰다.
―그런데 바다님! 저기 저어기 있는 애들은 뭐예요?
두두두두두…….
배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성을 잃은 하급 인어가 또 들이닥치고 있었다.
―끼아아악!!
고성이 들려왔다. 작은 인어들이 휘익―! 단체로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쟤네는 조금 이상한데…….
―진짜 이상하지? 냄새도 이상해!
―왜 저래?
―우리랑 다른 무리야.
―심지어 바다님도 못 알아보고 있어! 이렇게 티 나는데!
―대장이 이상해진 거랑 관련이 있는 걸까?
―있을 것 같은데!
―죽일까?
―죽여!
―죽이자.
그리고 작은 인어들은 다 같이 입을 벌렸다. 세로로 날카로운 이빨이 쩌억 드러났다.
―바다님. 쟤네들은 우리가 먹어도 돼요?
데아는 배협이 움직이려고 하자 다시 창으로 막았다.
“지, 지금 혼자 무슨 말을, 하는, 하는 겁니까?! 저 인어들은 뭐고……!”
“이 인어들이 저 인어들을 먹고 싶다고 하네요.”
“왜, 왜 인어들과, 대화를… 대화를 하는 겁니까?”
배협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달아올랐다.
“할 수 있으니까 하겠죠.”
데아가 무미건조하게 넘어가자 배협이 재차 물었다. 음성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이, 인어들이 서로 싸우기도 합니까?”
“당연하죠. 하급 인어들에게는 무리가 많아요. 그런데 이렇게 작은 애들이 공격성을 가진 경우는 오랜만에 보네…….”
이상할 정도로 인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헌터. 그는 5년 전에 사망했던 헌터 샤샤였고, 또 다른 무언가였다.
배협의 심장이 널뛰었다.
“…그래서, 먹, 먹고 싶다고 합니까?”
“네. 그렇네요.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는데…….”
헌터 샤샤, 인어들이 허락을 구하는 자. 배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배고픈가. 그걸 어떻게 말리겠어요.”
그때 키아아악! 또 거대한 하급 인어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거친 악취가 풍겨져 왔다.
“먹고 싶은데, 먹어야지.”
데아의 말이 기폭제처럼 떨어졌다. 작은 인어들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휘익! 수백이 넘는 하급 인어가 상대 인어들의 머리 위로 몸을 날렸다.
그건 거대한 충돌이었다. 견고하고 촘촘한 육식용 이빨이 그대로 인어들의 목덜미와 눈에 냅다 박혔다.
―끼아아아아!!
―끄아아아!
“배협 길드장님.”
야만적인 인어들의 전쟁. 배협은 등불 아래 반짝이는 데아의 하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출구가 막힌 것 같은데 어떡하죠?”
“…….”
“우리에게 길은 하나밖에 없네요.”
데아의 손가락은 바다를 향해 있었다.
“저 아래에 길이 있을까 불안하다고 하셨죠. 불안하면 물어볼까요?”
“뭐를…….”
이렇게 된 이상, 이미 드러난 정체와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 옳았다.
데아는 실컷 거대한 인어를 뜯어먹고 있던 작은 인어를 들어올렸다.
“식사 중에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작은 인어가 꿀꺽 먹이를 삼켰다.
―네? 뭔데요?
“저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인간이 숨을 쉴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아보고 와 줘. 적어도 1~2분이 넘지 않는 거리에…….”
―네!
퐁당!
인어가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있어요! 조금 지나서, 바로 위로 올라가면 나와요!
“고마워.”
그리고 데아는 다시 세연을 업었다.
“그럼 갈까요?”
그때 배협이 덜덜 떨며 검을 들었다. 목표물은 데아였다.
“헌터 샤샤. 당신, 당신…….”
배협의 눈에 실핏줄이 돋았다.
“인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