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축축한 물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데아는 느리게 눈을 떴다.
“뭐야…….”
다행히 살아는 있네.
“으으…….”
얼마나 떨어진 거지? 뻐근한 몸을 풀자 등에서 뚜둑 소리가 들려왔다.
데아는 저 멀리 굴러간 등불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여기 어디야…….”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천장에 카메라가 없다는 점이었다.
“여기까지는 예상을 못했나.”
어쨌거나, 이 던전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데아는 앞으로 걸어가다가 빠각! 뭔가를 밟았다.
“어? 해골?”
지천에 뼈가 놓여 있었다.
그건 인간의 뼈였다.
나도 이렇게 많은 뼈를 보는 건 처음인데! 데아는 팔을 벅벅 문지르다가 급침착해졌다.
“잠시만. 이거 설마 범인이 난가?”
난가? 정말인가?
해골의 상태는 처참했다. 척 봐도 몇 개월 방치된 해골이 아닌, 수십, 수백 년은 훌쩍 방치된 해골 같았다. 그렇다면 이 해골은 분명… 태초가 친히 멸망시킨 ‘이 세계’의 인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냐, 그 인간들은 죄다 대륙 위에서 죽었어. 이런 동굴에 있을 리가 없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태초가 트리야와 므아나만 데리고 세계 곳곳을 누빌 때, 가끔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태초를 포획하기 위해 온갖 수를 썼던 해적 집단이 있었다. 결국 태초가 불러낸 해일과 회오리에 먹혀 바다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냐, 분명 트리야가 더럽다고 해서…….”
아주 깊숙한 곳,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동굴 안에 해적들의 시체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보물을 처박아 두었었다.
“…….”
데아는 섬뜩해졌다.
해골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데, 과연 착각일까?
“아니, 그러게 왜 내 머리 위로 가시 그물을 던져, 던지긴…….”
저 멀리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잔뜩 더러워진 금화 더미였다. 이로써 확인 사살이 되었다.
“뭐, 성불하십쇼.”
데아는 건성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총총총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머지않아 다시 쏙 돌아왔다.
“여기 정말 카메라 없지?”
없었다.
데아는 스을쩍, 바닥에 굴러다니는 금화를 살살살 모아 인벤토리 안에 한 번에 집어넣었다. 보물이 여기에만 있진 않을 텐데…….
“사람에겐 죄가 있지만 돈에겐 죄가 없지…….”
인간의 삶을 살며 얻은 건, 태초일 때와 비교도 하지 못하게 탐욕스러워진 본성뿐이었다. 우아하고 초연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계속 뚜벅뚜벅 걷고 있는데, 저 멀리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누군가의 음성 또한.
“젠장, 여기에는 물이 없는데. 다 바닷물밖에……! 해열제, 해열제라도 있어야 하나? 내, 내가 힐러였다면……!”
배협? 데아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누, 누구냐!”
팍! 데아는 등불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상황에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세연과, 그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웅크린 배협이 있었다.
배협 또한 데아를 알아보고 어?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어떻게 여길…….”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어떻게 여기에 오셨어요? 여긴 3팀이 공락하는 던전 안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여긴 5팀이 공략하는 던전 안이다!”
정적이 흘렀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데아가 이마를 감쌌다.
“맙소사, 던전들이 다 이어져 있나 봐요.”
동굴 안에 있는 무수한 갈림길. 그건 열 개의 게이트를 잇는 통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스 인어가 잘 나오지 않는 것도, 던전 공략이 까다로운 것도 이해가 가죠.”
게이트는 열 개지만 보스 인어는 하나일 확률이 높았다. 이 동굴 전체가 4층의 무대인 이상, 모든 것은 이어져 있을 테니.
“그리고 어쩌면, 보스 인어가 나오기 위해선, 이 한 던전의 열 배에 달하는 이곳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는 소리가 되겠죠.”
“지금, 무슨 소리를…….”
“아 진짜 일을 복잡하게 만드네…….”
배협은 꾹 입을 다물었다. 데아는 곧장 세연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폈다
“얘 왜 이래요?”
“인어가 나타났었다……. 갑자기 어디론가 떨어져 버렸지만, 세연이가 인어의 공격을 받아서, 이렇게 해골이 가득한 곳으로 떨어져 버렸어……!”
두드득! 데아는 세연의 오른쪽 소매를 찢었다. 그곳에는 깊게 파인 인어의 손톱자국이 있었다.
데아는 일단 소매로 위를 묶어 지혈하고는 손으로 꾹 눌렀다.
“하급 인어에게는 모두 독이 있어요. 그것 말고는 따로 공격받은 건 없고요?”
“어, 없다. 없어.”
“길드장님은 따로 다치신 곳 없고요?”
배협에게는 떨어질 때 긁힌 찰과상과 멍이 다였다.
데아는 한 손 가득 세연의 상처 부위를 꼭 쥐고는 눈을 감았다.
“뭐, 뭐 하려는 거야?”
“뭐하긴요, 힐러의 본문을 다 해야죠.”
“아, 그렇지. 그렇지. 네가 힐러였지…….”
배협은 긴장을 풀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데아가 마력을 그대로 모아 상처 부위로 옮기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이런 건 별게 아니에요. 자. 치료 끝.”
“그런데 왜 안 일어나는 거지?”
“그냥 기절한 것뿐이에요. 곧 일어나요.”
데아는 영차, 세연을 업고 일어났다. 배협이 등불을 들고 급하게 뒤를 따라왔다.
“어디 가는 건가!”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데아는 주변을 휙휙 돌고 대충 직진했다.
“이 아래서 바다 냄새가 더 많이 나고 있어요.”
“바, 바다 냄새?”
“보스 인어가 있을 가능성이 높죠. 그나저나 4층 던전이 바다와 가깝게 열릴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긴, 까마득한 구석이긴 하지.”
서늘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바다.
데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원래 습도가 일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습한… 길이 좁아져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잠시만. 저기 벽이 끊겨 있다.”
배협이 달려가 비추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등불 사이로 엄청난 양의 종유석과 석순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호수가 아니라…….
“이것도 바닷물이네요. 이 아래에 길이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헤엄칠 줄 알아요?”
“헤엄? 할 수는 있지만… 등불을 들고 헤엄을 칠 수는 없지 않나?”
생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방법이었다.
등불이 없다면 이 아래는 완벽한 어둠에 가까웠다. 길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목숨을 걸고 아래로 뛰어들자니.
“무모해.”
“하지만 길이 없어요.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돌아갈 수 있어요?”
“차라리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거다. 이 동굴 안에 1,0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있는데 그동안 아무도 못 마주치지 않았나? 분명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걸 거야.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거나―”
“그건 그렇네요.”
저 위에 인간이 숨을 쉴 수 있는 길이 있는지도 미지수이긴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돌아가려던 찰나, 데아는 후두둑, 뭔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거 무슨 소리예요?”
“이게 무슨 소리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데아는 동굴 구석에 세연을 눕히곤 등불을 받아 높게 쳐들었다.
질척거리는 점액질 소리, 새된 음성,
“인어가 여기로 오고 있어.”
“뭐?”
“무기 빼들어요. 정상이 아닌 하급 인어 같으니까. 그것도 한둘이 아니야!”
‘설한지’는 공격 스킬이 없는 힐러다. 하지만…….
“길드장님은 제가 F급 힐러 아닌 거 알죠?”
“…….”
전날 밤, 배협은 그 사실을 눈치챘다.
―끼아아아악!
그때 좁은 통로를 따라 하급 인어가 뱀 떼처럼 쏟아 들어왔다.
서로를 밀치고, 입맛을 다시며 다다닥 기어들어오는 꼴에 배협이 숨을 들이켰다.
눈에 가득한 검은자위, 괴이하게 돋은 비늘과 이빨. 동굴 바닥에 끼기긱 흠집을 내는 손톱을 가진 거대한 인어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달려드는 인어들에 맞서 배협은 서둘러 방패를 펼쳤다.
쾅!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우선 세연을 데리고 피해!”
“피하라고요?”
“내가, 크윽, 내가 뒤로 빠질 테니까 그 틈을 타서 왔던 곳으로 돌아가!”
데아는 서둘러 상황을 훑었다.
배협은 D급 방어계 헌터. 저 인어들의 등급 또한 높게 잡아 봤자 D급. 그러나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다. 배협을 홀로 뒀다간 잡아먹히게 될 것이다.
“크아악!”
배협은 몸이 밀리자 방패를 회수하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흐아아압!”
있는 힘껏 인어를 공격했지만 인어의 단단한 몸에 밀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인어가 펄쩍! 뛰어 돌진하자 배협이 몸을 굴려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그리고 거기까지 본 데아는 바다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풍덩!
“지금 뭐 하는!”
그리고 데아는 축축한 몸 그대로 첨벙! 다시 밖으로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옷을 쭉 짜내며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낯설었다. 배협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붉었다.
“비키세요.”
‘설한지’에게는 알 수 없는 기백이 있었다. 그제야 배협은 저 ‘설한지’가 얼마나 명령에 익숙한 사람인가를 실감했다.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자신만의 군대를 가져 본 자의 얼굴. 무수한 상황을 역전시킨 자만 가질 수 있는 눈. 그것들이 지금의 ‘설한지’에게 있었다.
“너, 크윽, 아니…….”
배협은 퍽! 인어를 발로 밀치고는 가까스로 뒤로 빠졌다.
“당신은…….”
붉은 눈, 정확히 사냥감을 조준한 매서운 금수의 동공. 데아의 손안으로 푸르고 시린 무언가가 반짝 빛났다.
[바다의 경배(N) :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5년 전, 배협은 여파 길드 앞에서 생성된 SS급 던전의 생중계를 본 적이 있었다.
모두가 틀렸다고 외치던 순간에 나타난 구원. 파도를 일부 베어 낸 것 같은 장창을 들고 압도적으로 SS급 보스 인어를 구석으로 몰아넣던 누군가의 모습이 지금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떠한 무력도, 그 어떠한 논리도 그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힘의 균형만이 모든 걸 지배하는 헌터계. 그는 그 곳의 제왕이었다.
비록 끝이 좋지 못 할지라도, 그 누구도 그를 대체할 수 없었다. 그 전투를 지켜본 자들은 다 같은 생각을 했다.
그의 걸음에는 낭비가 없었고, 가볍게 내리치는 동작에는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유연하게 공격의 방향을 바꾸는 기술에는 경탄마저 서렸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짙은 농도의 마력이 안개처럼 설렁였다.
이길 수 없는 강자의 목도. 배협은 숨을 헐떡였다.
지금 그가,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 헌터가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