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책임감을 가진 길드장은 자신의 무력을 인정했다.
“그러니 부탁한다. 네가 누구인지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털썩! 배협이 모래사장 위로 무릎을 꿇었다.
데아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아니,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진 말아다오. 제발. 어떤 목적으로 길드에 접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튼짓만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부탁합니다.”
데아는 한동안 배협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주변을 일렁였다. 데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념이다.
“아무것도 할 생각 없어요.”
“…정말입니까?”
“네. 마침 공략권이 종종 잘 나오는 소형 길드가 눈에 보여서 들어간 거예요. 다른 악의가 있는 것도, 뭐 몰살시켜 버리겠다는 거창한 임무 같은 것도 없어요.”
“아…….”
“네. 그리고 그 존대… 남들 앞에서는 하지 마세요. 오해받기 싫으니까.”
데아는 발목에 뭍은 모래를 툭툭 털고 아스팔트 위로 훌쩍 올라왔다.
“걱정하시는 건 이해 가요. 하지만 정말로 별 뜻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내일 오전 출발인데 벌써 그렇게 힘을 빼두시면 어떡해요?”
괜한 타박에 배협이 느리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서관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이 조금 홀가분해 보였다. 그러나…….
‘저, 저 봐라. 완전히 안심 안 했구만.’
배협의 등에는 잔해처럼 불안이 덕지덕지 남아 있었다. 일단은 믿되, 계속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데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책임감은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 ◈ ◈
중도 포기 하거나, 던전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으로 인해 참전할 수 없는 인원을 제외한 길드 통합 팀은 통 1920명 내외. 그중에서 4층 공략에 지원한 사람의 수는 1200명 정도. 그중에서 1000명이 선별되어 아침부터 부지런히 반도로 옮겨졌다.
“백리서 공격대장님은 힘드시겠다. 다 통솔해야 하잖아.”
“배가 몇 척이 지나다니는 거야?”
나머지는 3층과 똑같은 순서였다.
데아는 찰칵이는 기자들의 인파를 지나쳐 포세이돈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대기실이 나타났다.
“자, 3팀 이쪽으로 오십시오! 차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건투를 빕니다!”
데아는 슬쩍 권도언에게 문자를 보냈다.
[궁그한거있는데요 던전 안 카메라는 어디까지 촬영할 숭 있ㅅ는 거예요?]
답장은 곧장 왔다.
[대부분이겠죠? 대부분 하늘에 띄워서 고정시켜 놓더라고요.]
“아하…….”
움직이진 않는군. 그렇다면 행동하는 게 더 쉬워지지. 그 사정거리에만 벗어나면 되니까. 동굴 같은 곳에 들어가도 좋고.
그러나 10분 후, 데아는 식겁했다.
“진짜 동굴이 나올지는 몰랐는데.”
[포세이돈 4층 진입]
[보스 인어 ‘어두운 밤의 환상’(B)를 사냥하십시오.]
데아는 처음으로 조금 진땀을 흘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던전 안으로 들어간 3팀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너 설한지 아니야? 너 3팀이냐?”
“어.”
“야, 야, 네가 등급 대비 힐을 잘한다며?”
“그런데 오늘 컨디션 난조야.”
“미친, 또 아프면 어떡해?”
세연과 석파란, 백리서에 연가을, 하다못해 배협과 양철민까지. 다들 저들끼리 알아서 뭉쳤는데, 데아 혼자만 3팀이었다.
“뭐… 괜찮아. 이기면 되지. 나가서, 만나면 되는 거야.”
“누구 라이트 들고 온 사람 없어? 앞이 안 보이는데!”
4층 게이트의 장소는 동굴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넓은 동굴이었다.
데아가 인벤토리에서 손전등을 꺼내 딸깍 비추자 끝없이 이어진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추워…….”
헌터들이 엣취― 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서늘한 한기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였다. 앞에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갈림길이야. 여기서 나눠져야 하나?”
“이 끝에는 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냥 한 곳을 선택해 계속 다 같이 가면 안 돼?”
“그게 더 안전하긴 하지…….”
“그런데 이 물은 어디서 들어오고 있는 거야……?”
물?
심지어 동굴의 벽면에는 끊임없이 물이 줄줄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짠데?”
“그걸 먹었어?”
“바닷물이야.”
‘바다라고?’
데아가 빠르게 벽면을 훑고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정말로 짰다.
“이 주변에 바다가 있어. 아니 어쩌면…….”
헌터들의 고개가 동시에 위로 향했다.
“이 위에 있어. 여긴 바다 아래야.”
“자, 잠깐.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헌터들은 각자 최악의 가정을 상상하곤 파랗게 질렸다.
“동굴이 무너지거나, 그러진 않겠지?”
“동굴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아… 누가 충격을 줘서 깨지면 모를까.”
“깨, 깨진다면,”
“물이 밀려들어 오는 거지. 그래도 이 동굴은 넓어. 그렇게 쉽게 차오르지도 않을 거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데아는 주변을 손전등으로 샅샅이 살폈다.
“정 불안하면 오른쪽 왼쪽. 둘 중에 하나 길을 정해 그쪽으로만 나아가자. 아무래도 갈림길은 이게 하나가 아닐 것 같거든.”
일단 무조건 왼쪽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두려움에 떠는 100명의 헌터들이 다 같이 오순도순 걸어갔다.
“이렇게 있으니까 담력 훈련 때 생각난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더 걸었다.
갈림길이 세 번 정도 더 나왔지만 모두 왼쪽으로만 향했고, 인어는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자 헌터들도 하나둘 긴장이 풀려 저들끼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는 연습이었으니까 덜 무서웠지. 이번에는 어떡하나 싶어.”
“아… 잠시만.”
“왜 그래?”
“나 손전등 배터리가 다 떨어졌어. 여분 있는 사람?”
“없는데…….”
동굴 안에 들어 온지 세 시간. 지루한 행진이 이어졌다. 헌터들이 하나둘 지쳐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손전등의 수명 또한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남아 있는 라이트 다 꺼내 봐. 팀을 나눠서 배분해야겠어.”
헌터들이 꺼낸 손전등은 총 스물다섯 개. 데아는 곧장 4인 1팀을 나눠 손전등을 배분했다.
“혹시 손전등이 꺼지면 최대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맞아. 특히 이곳은 내리막길이니까 조심해!”
점차 숨이 탁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동굴의 깊숙한 곳까지 온 것이다.
그때였다. 저 멀리 두두두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야, 잠시만… 이 소리 뭐지?”
암석과 돌이 서로 부딪쳐 으스러지는 소리, 둥글고 거대한 무언가가 거침없이 굴러오는 소리. 데아는 당장 뒤를 돌았다.
저 멀리서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고 있었다.
“바위야! 피해!!”
“자, 잠시만!!”
“뭐하고 있어? 당장 앞으로 달려!”
동굴의 퇴로를 꽉 막은 채 데굴데굴 굴러오는 거대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헌터들은 서로의 손을 놓고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렸다.
“방어계! 뭐 하고 있어!!”
“내가 나선다!”
네 명의 방어계 헌터가 동시에 방패를 소환해 돌을 카앙! 막았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갈수록 가팔라졌으며, 돌은 헌터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컸다.
“자, 잠시만, 안 될 것 같다……!”
“버텨! 버텨!”
“안 돼!!”
이윽고 방어계 헌터들은 포기를 외치고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포획 마법, 돌진계, 거창, 검. 온갖 무기가 튀어나와 바위를 겨냥했지만 바위는 깨지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다쳐, 깔리기 전에 나와!”
헌터들은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깔려 죽지 마! 달려!!”
“발, 발밑이 너무 미끄럽습니다!”
이제 한계였다. 바위의 속도는 한계를 초월했다.
깜빡깜빡.
“아 진짜……!”
심지어 데아의 손전등까지 수명을 잃고 깜빡이고 있었다. 데아는 미친 듯이 손전등을 흔들며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앞을 향해 달렸다.
‘나서야 하나?’
흐릿한 손전등으로 위를 비췄다. 반짝이는 검은 카메라가 언뜻 보였다.
‘아니, 여기까지 어떻게 카메라를 설치한 거야? 역시… 괴물들을 풀어서 시켰나?’
그보다 카메라가 이곳에까지 있다면, 데아가 나설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환하게 소리쳤다.
“저, 저 앞에 갈림길이 있다!!”
심지어 수 갈래로 나누어진 갈림길이었다. 작은 체구의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것 같은 길이 있던가 하면 널찍한 길도 있었다.
다행히 그 어떤 길도 바위보다는 작았다.
“아무 길에나 들어가! 일단 바위를 피해 숨어!”
헌터들이 속력을 내어 미끄러지듯 달렸다. 데아 또한 바쁘게 달렸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지? 역시 넓은 길이 제일…….’
그 순간, 데아는 부정할 수 없는 바다의 냄새를 맡았다.
가장 익숙한 심해의 냄새. 인간계에서는 한 번도 느껴 볼 수 없던 기이한 이끌림이 데아의 고개를 잡아 돌렸다.
‘가장 작은 통로…….’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곳에서 바다의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었다. 데아는 홀린 듯이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설한지! 한지 헌터!! 지금 어디로 가는―!”
그러나 이미 돌아가기엔 늦었다.
헌터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가까운 길로 휙 들어가 몸을 숨겼고, 데아 또한 길 안으로 우당탕! 몸을 내던졌다.
쿠아앙―!!
바위가 벽면에 거칠게 들이박혔다. 모든 길의 입구가 틀어막혔다.
데아는 엎어진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한 치 앞에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깜깜한 어둠 속, 데아는 손을 더듬어 손전등을 찾았다.
딸깍딸깍.
“이런…….”
손전등은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데아는 다시 인벤토리 안으로 손전등을 집어넣었다.
“그거라도 있으려나…….”
인벤토리를 뒤적이자 옛날 옛적에 피파글랜이 챙겨 준 등불이 쏙 튀어나왔다.
성냥을 탁 켜서 불을 붙이자 손전등만큼은 아니었지만 사위 분간이 될 정도로 환해졌다.
시야를 확보한 데아는 주변을 살폈다. 동료 헌터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완벽하게 홀로였다.
“그래도 다행이네. 등불도 있고…….”
다들 무사히 들어갔겠지. 데아는 몸을 옆으로 돌려 아슬아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더 좁아지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은 무슨. 진짜로 더 좁아지고 있었다.
역시 거꾸로 돌아가 저 바위를 깨버릴까? 그 생각까지 한 순간이었다.
쿠웅―!
“어……?”
저 멀리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설마… 갈림길에서 헤어진 또 다른 헌터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심지어 그 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쿠웅―! 쿠우웅―!! 쿠궁―!
“뭐야…….”
데아는 벽면을 짚었다. 벽에서 바닷물이 흐르는 양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이 목소리는…….”
세연이랑, 배협 길드장님?
분명 5팀에 소속되어 다른 게이트로 들어갔던 그들의 목소리가 왜 여기서 들린단 말인가?
불길함에 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쿠웅―!!
“?!”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거칠게 낙하하며 바닥을 구르는 암석의 파편 소리. 그건 바로 지척에서 들리고 있었다.
데아는 숨을 들이켰다. 발밑이 쩌적 갈라지고 있었다.
“아, 젠장.”
이미 늦었다. 벽을 잡으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데아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