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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61화 (161/223)

※ 161화

“설한지 헌터… 아니에요? 왜 여기 계세요?”

백리서는 손전등을 딸깍, 비추곤 쭈그려 앉았다. 항상 올려봐야 했던 눈높이가 동등해졌다. 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한데, 그 라이트 좀… 눈이 너무 아파서.”

“아.”

데아는 백리서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고 있는데, 백리서가 주변을 쭉 비추더니 데아를 부축했다.

“혹시 혼자세요?”

“아뇨, 그 다른 사람 한 명 있었는데 무섭다고 먼저 도망갔어요…….”

“저런.”

데아는 괜히 무안해졌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장치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무슨 이런 게 담력 훈련이래…….”

“담력 훈련이요?”

라이트 아래 비춰지는 백리서의 표정이 묘했다.

데아가 쏘아 보내는 일방적인 불빛 속, 데아는 자신의 표정을 어둠 속에 감추며 백리서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대놓고 본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어째 5년이 지났는데도 백리서는 달라진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네. 오늘 열두 시부터 시작한 거 있잖아요.”

그는 마치 영원한 시간 속에 박제된 조각 같았다. 빛 아래에서 더 밝게 빛나는 짧은 금발이 목덜미와 이마를 절반쯤 덮고, 유려하게 그어진 눈매는 지지 않는 태양을 품고 있었다. 반듯한 코끝과 단단한 팔, 큰 키에 데아는 무심코 흐뭇하게 웃었다.

여전히 잘생기고 예쁘고 다 하는구나……. 처음 알을 깨고 나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소소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 백리서가 입을 열었다.

“담력 훈련… 그런 거 없는데. 뭘 들으시고 온 거예요?”

“네?”

심장이 땅 끝까지 떨어졌다. 달그락, 달그락. 손전등이 떨렸다.

“아뇨. 오늘 밤에 다들 언덕 밑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울렸잖아요. 그래서 F, E, D급 헌터들 다 모여서 여기 야산 올랐는데…….”

“그런… 방송이 있었다고요?”

“네. 여기에 막 마네킹 설치되어 있고, 헝겊 인형도 막 있고요, 다른 사람들도 여기에 엄청 많을 텐데…….”

“한지 헌터. 이곳엔 아무도 없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싸아아아아…….

데아는 피부를 스치는 바람에 그만 숨을 멈췄다.

“장…난치지 마세요. 아까 전까지 양철민이랑 저랑 같이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들 비명 소리도 막 들리고, 훈련소장들도 다 서있었는데……. 잘 들어봐요! 가끔 사람 비명 소리가 들리잖아요.”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 왜 안 들리지?’

“담력 훈련이 훈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여파 안에서도 담력 훈련 하잖아요. 잘 생각해 봐요. 매일 야산 오르지 않아요?”

“…네? 그게 무슨. 그런 기상천외한 훈련이 어디 있어요. 아니, 그보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덜덜 떠는 입술. 그리고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완벽하게 겁을 먹은 데아가 더듬거리며 백리서의 팔에 팔짱을 꼭 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배, 백리서 헌터님은 진짜죠? 가짜 아니죠?”

“네. 저는 진짜입니다. 그런데 한지 헌터는 아까부터 무슨 말을,”

“그만. 말하지 마세요. 진짜 제정신 아닌 꼴 보기 싫으면.”

“…일단 밑으로 내려가죠. 너무 많이 올라오셨어요.”

“그, 그런데 헌터님은 어쩌다 여기까지 올라오셨어요?”

데아는 백리서의 팔을 구원 줄 마냥 붙잡았다. 릴림에 대한 어색함과 어려움은 이미 탈색된 후였다.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안 되는 신고가 들어와서 종종 밤에 산을 돌곤 해요.”

“귀…신 말이죠.”

“네. 과거에 전쟁이 한 번 있었다는데, 그걸 누가 믿어요.”

백리서는 가볍게 웃었지만 데아는 웃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어.”

“어?”

데아가 든 손전등 끝에 익숙한 헝겊 인형이 잡혔다.

조잡하게 얼기설기 엮여 수풀 뒤에 버려진 인형은 분명 데아가 냅다 던졌던 그 귀신 인형이었다.

“…….”

“…….”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담력 훈련 그런 거 없다며?

데아가 삐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현실 감각이 되살아나며, 저 멀리 아스라이 들리는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백리서가 입꼬리만 올려 배시시 웃었다.

“아 너무 일찍 들켰네.”

“…….”

“어색해하는 것 같아서… 장난을 좀 쳐봤는데.”

제기랄, 젠장. 망할 백리서, 젠장 이 또라이야!

“아직도 내가 어려워?”

백리서의 노란 눈이 데아를 마주했다.

평소 같았으면 수습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그렇기엔 백리서가 친 장난의 정도가 너무 강했다. 넌 이딴 걸 장난이라고 치냐? 내 심장 떨어진 거 안 보여?

“장난이 과하시네요.”

데아는 팔짱을 팍 풀어버렸다.

“어렵고 자시고 모르겠고. 전 이만 내려갑니다. 알아서 내려가세요.”

지금 날 떠보려고 이런… 하……. 데아는 끝까지 백리서를 모른 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뒤에서 백리서가 졸졸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 하나 돌리지 않았다.

“너무 서운해서 그랬는데. 죄송해요.”

“왜 저한테 죄송해하세요.”

“정말 그렇게 끝까지 혼자 내려갈 거예요?”

“네. 따라오지 마세요.”

“이렇게 계속 모른 척을 하실 거고요?”

“전 애초에 백리서 헌터님 잘 모르는데요.”

“정말?”

“저희가 이번 훈련 말고 또 뵀던 적이 있던가요?”

데아의 거침없는 단절 선언에 백리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길, 그쪽 아닌데.”

데아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가 다른 곳으로 걸음을 돌려 나아갔다.

“그쪽도 아닌데.”

길을 제대로 찾기엔 너무 어둡긴 했다. 백리서는 다시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망할……. 모르겠고 마음대로 해라는 식으로 손전등을 넘겨버리자 백리서가 작게 웃었다.

“이런 건 밑을 봐야 잘 보이…….”

그러나 그 순간, 데아와 백리서 둘 다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뭐지? 저 하얀 빛?’

어둑한 숲길의 끝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데아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건 게이트였으니까.

“게이트……?”

“갑자기 무슨.”

백리서는 손전등을 데아에게 맡기고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달렸다.

길의 끝에 있는 불투명한 원형의 고리. 불완전한 게이트가 허공에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게이트, 일명 ‘창’을 만들 수 있는 건 피파글랜과 윌로, 칸나니아와 태초인 자신뿐이었다.

하나 피파글랜이나 윌로가 저 게이트를 만들었다기에는 형태가 많이 달랐고, 자신이 만들었다기에는 불완전했으므로 남은 가능성은…….

‘칸나니아? 설마 칸나니아가 주변에 있나?’

데아는 빠르게 마력을 풀어 주변을 헤집었다. 그러나 칸나니아는커녕 다른 백리서를 제외한 다른 인어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저건 칸나이아의 소행이 아니다. 그렇다면 뭐지?

“잠시만!”

데아가 외치며 백리서를 쫓았지만 데아가 다가서자마자 게이트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기묘하고 불안한 징조였다.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라니. 이게 도대체 뭔…….

“!!”

그때, 덥석 손목이 잡혀 데아는 강제로 올려졌다. 백리서가 데아의 손등에 코를 묻고 있었다.

아차, 데아는 그제야 빠르게 퍼뜨렸던 마력을 걷었다.

“왜, 왜요?”

데아가 끝까지 시치미를 떼자 백리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속되는 모른 척에 장단을 맞춰 주기라도 할 생각인 건지, 백리서는 데아를 놔주고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어, 다 왔다!”

“한지야! 여기로 와!”

산의 입구 부분에 도착하자 먼저 내려온 헌터들이 가로등 아래에서 데아를 맞이했다.

“양철민 헌터가 혼자 돌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백리서 헌터님이 너 수색하러 가신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역시 무사히 돌아왔구나. 진짜 다행이다. 그치.”

“응. 그렇구나…….”

이렇게 날 수색하러 와서 날 속이고, 내 반응을 보면서 즐기고…….

“어? 백리서 헌터님. 뭐가 잘못됐나요?”

“아뇨.”

백리서는 산의 중턱, 게이트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데아의 낯 또한 같이 어두워졌다.

“이상한 걸 봐서요. 큰일은 아닐 거라 믿지만…….”

큰일이 아니기는. 지금 백리서의 머릿속에 비상 경고 등 300개가 삐용삐용 돌아가고 있을 거라는 거에 권도언의 무릎뼈를 걸 수 있었다.

“저, 피곤한데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데아는 먼저 선수를 쳤다. 같이 돌아가자는 세연을 옆에 세워 놓고 백리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절 찾아와주셔서 감사해요, 헌터님. 덕분에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아주 고오맙다. 덕분에 어색함과 어려움이 싹 가셨다.

“…….”

“또 신세를 졌네요. 재밌었어요.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하지만 괘씸죄가 남아 있었다.

할 말 많은 표정의 백리서가 데아를 뚱하게 응시했지만 데아는 세연과 함께 돌아가 버렸다. 내일 일찍 일어나서 조깅이나 해야지.

◈          ◈          ◈

담력 훈련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의 저녁. 합동 훈련소는 발칵 뒤집혔다.

“드디어 내려왔어!!”

“뭘?”

“3층 공략권!”

3층이 개방된 건 한 달도 더 전의 일이었지만 쉽사리 길드 통합 팀에게 공략권이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소형 길드에게 공략 우선권을 줘야하기 때문도 있었지만, 우선 내부 파악이 조금 힘들었기 때문이다.

“3층에 게이트는 하나래, 하나.”

“와… 그러면 엄청 크겠네.”

“그것도 그런데, 게이트를 재공략할 때마다 던전 내부 지형이 다 바뀐대. 그래서 데이터 얻기가 어렵다고…….”

“그런데 그건 2층도 그랬지 않아?”

그건 그래. 데아는 동조했다.

포세이돈의 위치에 혼동을 주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칸나니아는 던전을 재생성할 때마다 자꾸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진짜 어렵대. 2층하고 비교하면 안 된다는데? 여기 공략한 헌터 대부분이 사망했다고 하잖아……!”

데아는 모든 소문들을 뒤로하고 기숙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응. 나 왔어.”

그리고 자신의 무릎으로 껑충 올라오는 돌돔을 폭 껴안았다. 고륵거리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내일이다. 던전의 공략이 내일이야.

눈에 띄지 않게 활약을 해야 하고, 동시에 포세이돈의 내부까지 침투해 신호를 보내야 해. 피파글랜이 눈치챌 수 있도록.

“난 언제까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까?”

기묘한 의문이 들었다.

그냥 문득, 데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옆에서 수다를 떠는 세연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너는 언제까지 속을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인어는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너는, 언제까지 내가 태초라는 걸 모를까?’

“응? 언제까지라고 생각해.”

―너무 머리 아픈 고민은 하지 마. 자기야.

익숙한 음성. 데아는 슬며시 웃었다.

―아직 3층밖에 안 됐는걸? 아직 시간도 많이 지나지 않았어. 급하게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될 거야. 칸나니아 성격을 아직도 몰라?

“아니. 알지…….”

―넌 지금도 잘하고 있어. 칸나니아가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자기는 잘할 거야.

“그런데 경배야. 난 무서워. 설마 그 괴물들이 옛날의 병기일까 봐. 그것들이 완성될까 봐…….”

데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병기가 인어들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태초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필립이라는 왕자 놈이 만들었던 그 병기?

“맞아. 그거.”

―괴물 수준을 보니까 한참을 멀었던데, 뭘. 너무 걱정되면… 3층에서 나를 써. 최소한 너는 내가 지켜 줄 수 있으니까.

“내가 샤샤라는 걸 만천하에 알리는 것도 아니고, 널 어떻게 써?”

―이미 난 사해의 화살까지 된 형태야. 자기가 원한다면 난 어떤 무기의 형태도 될 수 있어.

보이지 않는 손이 데아의 머리를 토닥이는 것 같았다.

―잘 생각해 봐. 난 자기 편이야.

데아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세상이 수마 속으로 잠겨들었다.

◈          ◈          ◈

3층.

포세이돈 앞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인파로 가득 차있었다. 오랜만에 육지 땅을 밟은 헌터들과, 또 그것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거대한 열기를 만들어 냈다.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일단 대기실 입장합니다!”

3층 공략에 선발된 인원은 총 300명. 역대 최대의 어마어마한 수였다.

“다들 알다시피 3층 게이트의 수는 단 하나입니다. 위치는 늘 바뀌고요!”

데아는 그 300명의 인원 중, 가장 선두에 서있는 한 헌터를 보았다.

서늘한 무표정을 지키고 있는 백리서였다.

불완전한 299명의 정신적 지주. 승리의 표상.

데아는 괜히 맨 뒤에 자리 잡았다.

“무기 점검은 전부 마쳤죠? 그렇다면 건승을 빕니다. 입장하십시오!”

목표는 딱 두 개. 들어가서 피파글랜에게 신호를 보내고, 눈에 띄지 않게 공략을 하는 것.

‘무난무난하게만, 눈에 띄지 않게…….’

결국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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