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데아는 보았다. 여전히 자신의 침대 위에서 눈을 꿈뻑이는 줄무늬 고양이를!
“내가 오늘 아침에 나가면서 분명히 말했지. 기회는 오늘뿐이라고.”
데아는 철컥철컥 창문을 닫았다.
“넌 이제 끝났어. 이제 영원히 못 나가. 내가 자그마치 열 시간이나 문을 열어 두고 있었는데 안 나갔어. 이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
데아는 철컥철컥 모든 출구를 걸어 닫고는 마트에 뛰어 갔다. 그러곤 고양이 사료와 장난감, 모래와 같은 기초 용품들을 사고 다시 돌아왔다.
“한지야? 여기 있…….”
밤이 되어 데아의 방문을 연 석파란과 세연이 우뚝 굳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이름은 지었어?”
힘차게 고양이 장난감을 흔들어 주던 데아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빨리 문 닫고 들어와.”
“이름은 지었냐고.”
“…아니 아직.”
◈ ◈ ◈
고양이의 이름은 돌돔이 되었다.
“그… 원래 이런 무늬 가진 고양이를 고등어라고 많이 하는데, 돌돔이라니,”
“뭐. 왜.”
“너무 잘 어울려요. 그쵸. 이야, 역시 안목도 남달라!”
연가을이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세 치 혀를 놀렸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가끔 훈련장 안에 백리서가 출현해서 수십 번 생난리가 난 것을 제외하면 큰일은 없었다.
그래. 큰일은 없었다.
“뭐… 이런 날도 있어야 하니까.”
100명 남짓한 사람을 수용 가능한 거대한 1번 훈련장. 갑작스러운 백리서의 등장에 훈련을 하던 헌터들이 딱 굳어버렸다.
“백리서.… 헌터님이 여기엔 왜?”
귀찮음이 팍팍 느껴지지만 예의상 한 번 해줘야 하니까 해준다는 표정의 백리서가 자켓을 벗고는 붉은 띠를 팔뚝에 감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석파란이 벌떡 일어섰다.
“모두 한번에 덤벼보십시오. 이 붉은 띠를 먼저 채가는 사람이 승리입니다. 그리고…….”
백리서는 푸른 띠 한 장을 휙 던져 주었다.
“아무나 가지세요. 제가 먼저 푸른 띠를 채가면 제 승리입니다.”
헌터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백리서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대략 100여 명. 푸른 띠는 마치 폭탄 돌리기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데아에게 안착했다.
“왜 나야?”
“네가 힐러잖아. 앞으로 안 나설 거 아냐!”
“힐러는 나 말고 더 있잖아?”
“네가 제일 게을러! 잘 숨어 있어. 알겠지?”
자연스럽게 탱커가 앞으로 먼저 향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십시오.”
“얘들아! 보스 인어라고 생각하고 덤벼라! 상대는 고작 한 명이다!”
보스 인어라……. 틀린 말은 아니군.
데아는 팔에 푸른 띠를 꽉 묶고는 나무 그늘 쪽으로 빠졌다. 다른 헌터들이 푸른 띠를 지키기 위해 앞에 섰지만 한심한 눈빛 또한 뒤를 따랐다.
“…그… 계속, 누워 있을 겁니까?”
“네에.”
데아는 담요를 끌고 와 몸을 감싸곤 바닥에 찰파닥 누워버렸다. 난 모르겠다. 알아서 잘해 봐.
쿠웅!
그때 한 헌터의 앞에 거대한 방패가 나타났다. 그대로 앞으로 돌진하자 백리서가 가뿐히 검으로 막아 냈다.
“위와 아래, 그리고 왼쪽.”
석파란을 포함한 근거리 딜러들이 그다음을 이었다.
그들은 백리서의 전신을 공격하며 포위망을 좁혔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챙캉! 허공을 찢었다. 상대는 오직 한 명. 헌터들은 그 공백이 주는 찰나의 틈을 찾아 돌격했다.
“지금이야!”
노련한 마법계 헌터들의 주문이 바닥을 깔았다. 거대한 마법진이 번쩍! 빛나고, 저 멀리 원거리 공격계 헌터들이 동시에 무기를 들어 백리서를 겨냥했다.
쐐애애액―!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 견고한 포획의 덫. 그러나 백리서는 아득하게 몰려드는 헌터들을 보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순간, 석파란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백리서가 검을 고쳐 쥐었다.
“잠깐, 멈춰―!”
석파란의 비명은 묻혔다. 데아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백리서는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거대한 인파 속, 단 하나의 허점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모든 세상이 탈색되고, 동시에 다시 되돌아왔다.
그 누구의 공격도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백리서에게 훈련은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거둘 수 있는 삶의 수를 세는 것만큼이나 지루한 일이었으므로.
그렇기에 백리서는 인정사정없이 검을 찔렀다. 붉은 피가 튀었다.
“크아아악!!”
“자, 잠깐만!”
“어!!”
피를 본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진영은 이미 흐트러졌다. 그러나 백리서는 짐승의 꼬리를 잡은 금수처럼 검을 치켜들었다.
데아는 숨을 들이켰다. 수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그건…….
“그 진영의 머리, 기둥을 이루는 핵심 인사를 단번에 죽여. 최대한 잔혹하고, 잔인하게.”
‘릴림이 판단한 진영의 머리는 선두에 섰던 방어계 탱커인가?’
백리서는 해당 헌터를 자빠뜨린 다음, 양 손바닥을 밟고 우뚝 섰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흐아악! 흐악!”
탱커가 경기를 일으키며 바르작거렸지만 이미 강렬한 살기에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안 돼! 저지시켜!”
“허, 헌터님!!”
당황한 헌터들이 헐레벌떡 무기를 잡고 뛰쳐나갔다. 데아를 지키던 헌터들 까지 모두.
그 순간, 데아는 비죽 올라가는 백리서의 입꼬리를 보았다.
아차.
‘릴림이 판단한 머리는 저 탱커가 아니라…….’
푸른 띠를 가지고 있는 사람.
백리서의 공격은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그의 살기는 변덕스럽다. 사람의 오감을 속이고 직감을 농락한다. 헌터들은 고스란히 말렸다.
“어어……?!”
“어!”
헌터들의 무기는 제 효능을 다 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이얍! 누군가 쭉 내민 검의 끝을 밟고 가볍게, 그러나 확실하게 돌진한 백리서가 향하는 곳은 바로 나무 그늘 아래, 푸른 띠를 맨 데아가 기대 있는 곳이었다.
‘미친. 릴림……!’
콰앙!!
“설한지!!”
데아는 빠르게 몸을 굴려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이 있던 자리가 움푹 패었고, 나무가 기우뚱 기울더니 이내 콰과광 무너졌다.
그러나 백리서는 나무에 꽂힌 검을 그대로 가로로 그어 데아에게 휘익! 휘둘렀다. 데아는 뒤로 넘어지는 척하며 가까스로 피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니, 이렇게 진심이라고……?’
데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느낌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백리서가 지금 자신에게 느끼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불쾌감이었으니까.
‘불쾌감이라니?’
데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릴림은 나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있어. 아니, 왜?
물론 직감이 아예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번에 5층에서 떨어진 걸 받아 준 게 그렇게 싫었나? 확실히… 릴림의 성격이라면 태초가 아닌 자를 구하기 위해 뛰어왔던 자신에게 화가 났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휘이익!
또 한 번, 검이 그어졌다. 대충대충 하다간 정말로 중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데아는 도망가는 척, 건너편의 나무와 계단을 밟고 뛰어올랐다.
‘아니, 그냥 푸른 띠 건네주고 끝내면 안 돼?’
데아는 부러 푸른 띠를 헐겁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백리서의 목표는 이미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눈빛. 데아는 치밀어 오르는 오기에 이빨을 깨물었다.
‘그렇게 나서 주면 내가 괜히 따르기 싫어지잖아.’
“지, 지금 백리서 공격을 다 피하고 있는 거야?”
“F급 힐러라며??”
“데아야! 이거라도 써!”
그때 보다 못한 세연이 데아에게 단도를 던졌다. 훈련용으로 나온 뭉툭한 단도였지만 이걸로도 충분했다.
데아는 남몰래 푸른 띠를 풀었다. 그리고 단단히 단도를 고쳐 잡았다.
그러고 보니 ‘샤샤’가 ‘리서 언니’에게 받은 첫 번째 무기도 단도였던가.
익숙한 길이, 손에 정확히 잡혀 빙그르르 돌아가는 짧은 날붙이. 데아는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을 떼었다.
딱딱한 대지 위에 다시 그 발이 닿는 찰나, 데아는 백리서의 비어 있는 역린을 조준했다.
‘네가 진심이라면 나 또한 진심이 될 수밖에 없어. 난 아직 네가 어렵거든.’
버석하게 마른 모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사면이 바다인 낯선 섬 위, 데아는 가장 빈곤한 눈빛을 한 인어의 심장을 겨냥했다.
먼 옛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한 인어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제 심장과 삶을 주군에게 바칩니다.”
그렇다면 바쳐. 하나도 남김없이. 말끔하게.
백리서가 들이닥쳤다. 모두가 침묵하며 지켜본 찰나의 수 초, 데아는 백리서의 몸에 자신의 몸을 그대로 쾅! 부딪치며 그대로 단도를 꽂아 비틀었다.
콰득!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사방이 고요했다. 착각인 줄 알았던 피비린내가 후각을 잠식했을 때, 데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예상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결말이다. 데아는 짜증스럽게 자조했다. 미안해.
“다, 단도 다루는 게 익숙하질 않아서…….”
데아는 손을 벌벌 떨며 얼굴을 감쌌다.
“실수로 제 다리를 찌를 뻔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헌터님이 저를 구하시려다가…….”
백리서는 단도에 긁혀 피를 흘리는 자신의 손등을 표정 변화 없이 지켜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 데아는 손을 헛디딘 척 자신의 허벅지로 향해 단도를 내리찍었고, 백리서는 본능처럼 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뭉툭한 단도에 베인 상처가 선명했다.
“어! 배, 백리서 헌터님이 푸른 띠를 가져가셨다!”
더군다나 백리서의 또 다른 손에는 푸른 띠마저 잡혀 있었다. 그에 반해 붉은 띠는 백리서의 팔뚝에 그대로 매인 채였다.
헌터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그런 주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리서는 푸른 띠를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럼 백리서 헌터님이 F급이 실수하니까 손으로 막아 주신 거야?”
“동시에 이 시합에서 우승하셨어!”
“와, 역시 S급~ S급~ 하는 이유가 있구나. 진짜 압도적이다. 인성도 실력도. 와 씨, 소름.”
“야 그런데 저 F급도 장난 없어……. 아까 공격 다 피하는 거 봤냐?”
“그건 그래. F급 맞아?”
“회피 실력이 좋으면 뭐 해. 아까 보니까 엄청 게으르고 단도 하나도 잘 못 다루던데.”
상황을 모두 지켜본 연가을은 창백해져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세연은 후다닥 데아의 옆으로 달려왔다.
“괜찮아?! 넌 안 다쳤어?”
“난 괜찮아. 그보다 헌터님이…….”
“전 괜찮습니다.”
백리서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이전까지 뚜렷했던 불쾌감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름이 설한지?”
데아의 척추를 따라 작은 소름이 죽 내려왔다.
백리서가 재차 물었다.
“왜?”
데아의 갈색 눈동자와 백리서의 노란 눈동자가 서로를 투영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백리서였다.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냐. 됐어. 됐어요.”
사태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데아는 도망칠 수 없는 X 됨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나 저 헌터님 웃는 거 처음 봐……. 공식 영상에서도 안 웃으시던 분인데…….”
“…….”
“너 뭐야? 회피 대박이었어!”
그때 헌터들 몇 명이 놀라워하며 데아에게 몰려왔다. 물론 그들은 일부였다.
“그게 놀랍냐? 척 봐도 백리서 헌터님이 봐주신 거잖아.”
“그리고 단도 하나 못 다뤄서 S급이 스스로 손등에 상처 내게 하는 게 실력이냐? 꼼수지!”
헌터들 중 몇 명은 악의적인 말을 퍼뜨렸고,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데아는 피하지 않았다.
“이것들 봐라, 질투는…….”
“뭐?”
“이 쓰레기 F급이!”
이 합동 훈련소에서 생활한지 몇 주, 데아는 대충 이곳의 돌아가는 생리를 파악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F급은 이곳에서 동네북이었다. 이유 없이 처맞는다는 점이 그랬다.
역시나 그때,
퍼억!
누군가 데아에게 주먹을 날렸다. 데아는 빠르게 피했지만 머리끝까지 오르는 열을 무시할 도리는 없었다.
“너, 나 쳤냐?”
이곳은 짐승의 세계다.
약육강식. 강한 자의 법이 곧 논리였다. 그런 규칙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S급 백리서의 공격을 죄다 피한 F급을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어디서 피해망상이야?”
“눈은 발가락에 달렸나? 왜 보고도 모른 척이지? 파줘?”
데아가 생각하기론, 역시 인간계가 문제인 것 같았다. 태초의 섬에선 분명 성격이 우아했던 것 같은데, 인간계에 온 지 몇 달 만에 이렇게 개차반이 되다니.
“어어, 싸운다! 싸운다!”
“아까 그 F급? 이름이 설한지 아니야?”
“C급이 설한지한테 시비 걸었다!!”
심지어 헌터들은 보란 듯이 강 너머 불길에 장작을 넣었다.
“야! 싸우니까 돈 걸어!”
“옆 훈련소에서 구경 왔대! 너희들도 다 걸어!”
“야, 당연히 C급이 이기겠지. F급이 뭔 죄냐? 난 C급에 이십만 건다.”
돈내기까지 오고 갔다.
데아는 누군가 차려 준 밥상에 숟가락을 꼽기로 했다.
“나도 걸래. 나한테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