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S급 백리서가 이 섬에 왔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심지어 백리서는 무작정 뛰어와 떨어지는 설한지를 구했다. 모든 헌터들이 그 상황을 목격했다.
“무슨…….”
목구멍이 바싹 말라왔다.
데아는 후다닥 백리서의 위에서 일어났다. 나에 대해 눈치챘나? 벌써? 아니, 물론 알아도 되는데, 그냥 아직 내가 릴림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왜?”
“…네?”
그러나 백리서 또한 왜 자신이 뛰어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왜?”
‘왜 나는 널 구했지?’라는 눈빛이라 데아는 그만 백리서의 멱살을 짤짤 흔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훌륭하게 참아 냈지만.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발을 헛디뎌서.”
아마 주군을 지키기 위한 권속의 본능이었을 거다.
아직 백리서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 데아는 빠르게 손절하기로 했다. 보아하니 예전 여파 길드에서 마주친 건 기억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하나도 안 다쳤어요. 혹시 다치신 건… 아, 멀쩡하시구나. 그렇지 역시 S급이죠. 다행이네요. 네…….”
“…….”
데아는 툭툭 바지를 털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여전히 바닥에 반쯤 누워 있는 백리서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때마침 1층으로 내려온 세연과 마주쳤다.
“안 다쳤어?”
“어? 어. 완전 멀쩡해.”
“지금은 올라가지 마! 아까 전에 이 부러진 헌터들이 너 찾는다고 난리 났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우선 자리 피하자.”
저 멀리 고함을 지르며 데아를 쫒아오는 헌터 무리가 보였다. 데아에게 이빨이 털린 헌터의 등급은 A. 오, 꽤나 거물이네…….
“감히 여파 헌터의 이빨을 깨? 저 건방진 새끼가!”
심지어 길드 여파의 소속이라고? ‘너 내 후배 아니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넘어갔다.
“저기 사람 많아! 저 속으로 들어가!”
“그래!”
장거리 달리기로 인해 세연이 지치자 데아는 덥썩 그를 안아 올렸다. 덩치는 비슷한데 이렇게 쉽게 들린다고? 경악한 세연이 버둥거렸지만 데아는 빠르게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
그때 신나게 고기를 뜯던 연가을이 데아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마침 잘 왔어요! 여기서 이거 드실……!”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데아를 보고 기겁했지만. 그러나 연가을은 데아의 뒤를 쫓는 헌터들을 보더니 이내 표정을 싹 굳혔다.
“제 뒤로 가세요.”
“넌 뭐야! 여례아?”
“너희들은 뭔데?”
여파와 여례아의 싸움이다!
바비큐를 구워 먹던 헌터들이 원을 그리며 싹 갈라섰다. 아예 자리를 깔고 관전하는 헌터들도 몇 보였다.
“여기 있는 한지 언니는 내가 아주 자알… 아는 사람인데. 왜, 볼일 있어, 여파?”
“어어, 그래? 여기 얘 이빨 보이냐? 저 F급이 이렇게 만든 거야!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 비켜라.”
“뭐? 너희들 A급이잖아?”
연가을은 바비큐 꼬챙이를 휙 돌리며 픽 비웃었다.
“지금 F급한테 처맞고 친구들 불러와서 찡찡대는 거야? 우와, 창피해. A급 딱지 떼지 그래?”
그러자 여례아의 헌터들이 대놓고 낄낄거렸다. 데아는 믿을 수 없어 눈만 껌뻑였다.
‘내가… 살아생전 여례아 헌터들에게 도움을 받을 날이 오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이, 미친 새끼가… 말 다했냐?”
“다 안 했지. 나라면 F급한테 졌다? 그러면 울면서 산에 들어가서 훈련했어. 너 등급 재판정 한번 받아 보는 게 어때? 같은 A급으로서 내가 어딜 가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등급 재판정은 내가 아니라……!”
그러자 남자는 발발 뛰며 데아를 손짓했다.
“쟤! 쟤가 다시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등급은 각성 능력이 기준이지, 원래 가지고 있던 신체 능력이 기준은 아니거든. 내가 이런 말까지 하기는 싫었는데…….”
연가을이 목소리를 낮추는 척, 다 들리게 속삭였다.
“네 각성 능력이 그냥… F급 헌터의 기초 체력보다 낮은 것뿐이야.”
‘원래 이렇게 연가을이 말을 잘했던가?’
“창피를 알면 그만하고 꺼져. 내일부터 단체 훈련 들어가야 하는 거 알지? 거기서도 F급한테 처맞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자두던가.”
그러자 여파의 헌터들은 이를 까드득 갈더니 데아를 휙 노려보았다.
“언젠가 큰일 날 줄 알아라.”
“응.”
데아의 대꾸에 더 화가 난 기색이었지만 그들은 이내 씩씩거리며 물러섰다. 그제야 세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진짜 상위 헌터들 기백 장난 아냐. 나 숨 못 쉬는 줄 알았어…….”
◈ ◈ ◈
하루는 빠르게 저물었다. 저택에 들어가야 하는 통금시간은 오후 열한 시. 현재 시간은 오후 열 시 반이었다. 데아는 점차 꺼지는 캠프파이어의 불빛을 바라보며 눈을 꿈뻑꿈뻑 감았다.
이제 대부분 안에 들어가거나,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해안가에서 파티를 즐기는 인원은 몇 되지 않았다.
“한지야. 나 먼저 들어갈까?”
“응. 난 여기 더 있다가 갈게.”
“조심해. 아까처럼 무서운 헌터들이 오면…….”
“걱정 마.”
세연이 안으로 들어가고, 끊임없이 꼬치를 먹어 치우던 연가을이 은근슬쩍 데아의 옆으로 붙었다.
“산책 갈래요?”
“어디로.”
“바다 해변길 쭉 따라서. 보니까 사람도 아무도 없고… 물어보고 싶은 말도 있고요.”
데아는 일어서 손짓했다.
“그래. 가자.”
데아는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백리서 헌터 말이에요… 엄청 대단한 거 아시죠.”
“내가 너보다 잘 알걸.”
“저기 저 전광판 보여요?”
섬의 중앙에는 우뚝 거대한 전광판이 세워져 있었다. 1위 권도언, 2위 여기은, 3위 차현, 4위 하영주…….
“다들 아쉬워해요. 백리서 헌터가 랭킹 전에 참여했다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일 거라고.”
‘릴림이 좀 잘나긴 했지.’
“왜? 권도언도 만만치 않게 강한데.”
“그건 그런데… 그냥 느낌이 있잖아요. 권도언 길드장님은 아낌없이 드러내는 강자라면, 백리서 헌터는 자신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고 하는 강자의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그게 할 말이야?”
백리서와 관련된 화제는 달갑다. 그러나 그걸 굳이 말하는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오늘 백리서 헌터가 태초 님을 구했다면서요.”
“응.”
“왜 그러셨을까요? 백리서 헌터는 강하고 멋지지만… 남의 일에 신경 안 쓰기로 유명하거든요. 여차하면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자기 할 일만 하는 사이코라고 소문이―”
“그래서 본론이 뭐야.”
“백리서 헌터가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설한지에 대해서 잘 아냐고.”
뚝, 걸음이 멈췄다.
“그래서 모른다고 했어요.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넌 서론이 너무 길어.”
데아는 자박자박 거대한 바위 뒤에 몸을 숨긴 다음, 파도 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하얀 인어의 비늘이 달빛을 맞아 반짝였다. 연가을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 이름을 기억하는 건 의외네…….”
만월 아래 미소 짓는 사해의 신.
연가을은 그 순간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모른 척해.”
“네…….”
첨벙! 한 번 발을 퍼덕이자 인어의 꼬리였던 그것이 다시 인간의 다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어? 제가 확인하고 올게요.”
쌩하니 가버린 연가을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결국 데아가 나서려는데, 소란의 한가운데에 아까의 여파 헌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헌터씩이나 되어서는 잘하는 짓이다!”
“시이발, 무슨 상관인데!”
해변의 구석에 서있는 여파의 헌터들 사이, 피를 뚝뚝 흘리며 한쪽 다리를 덜덜 떠는 줄무늬 고양이가 있었다. F급 헌터에게 진 억울한 헌터들은 자신의 화풀이 대상을 동물에게로 돌린 것이다.
데아의 눈이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데아는 몰래 동영상을 찍고는, 권도언에게 전송했다.
[여파 망했네…….]
[??]
“지금 말 못하는 동물한테 화풀이하는 게 너네 최선이냐? 와, 여파 길드 한물갔네!”
연가을 또한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이 새끼가 지금 뚫린 입이라고……! 그러는 여례아는 만년 2위잖아!”
“어. 맞는데 너희들 하는 꼴 보면 곧 1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데아는 몰래 바위 뒤에 숨어 연가을에게 손짓했다. 이리와.
“작작해라. 알겠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가을은 데아 쪽으로 걸음을 뗐다. 고양이가 연가을을 끝까지 바라보며 애옹거렸다.
“아, 존나 시끄럽―!”
그러나 그때, 철썩! 거대한 파도가 몰려와 헌터들을 강타했다.
“으악!!”
“어! 뭐야?!”
한순간에 서늘한 온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데아는 다시 손을 휘둘러 다시 거친 물살을 만들어 냈다.
철썩!
“어!! 뭐야! 뭐야!”
“시발, 뭐야! 야, 미친!”
파도에 맞은 헌터들은 미끄러져 바위에 무릎을 찧거나, 모래에 코를 박았다. 누군가는 코피를 질질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파도가 자아를 가진 것처럼 날뛰다니? 헌터들은 겁에 질려 헐떡였다.
“야, 야, 미친, 오늘 바다 상태 왜 이래.”
“시발, 야 그거 아냐? 여기 섬 옛날에 전쟁터였다며. 귀신 아냐, 귀신?”
“장난하냐? 무슨 귀신이야, 귀신은……!”
그러나 또다시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자 헌터들은 기겁하며 줄행랑을 쳤다.
“아! 방금 저 파도가 내 발목 잡아끌었어!!”
“헛소리하지 마!!”
“일단 가! 일단 여기서 나가!”
헌터들이 사라지고 연가을과 고양이만 남은 자리, 데아는 자박자박 고양이에게로 다가갔다.
“어, 어떡해! 상처가 너무 심한데요? 그, 그래도 정말 대단하세요. 파도 그렇게 다루는 거 처음 봐요.”
데아는 가볍게 고양이의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감쌌다.
“됐다.”
손을 떼자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이 말끔해졌다. 고양이는 몇 번 그 부분을 샥샥 핥고는 더듬거리며 일어섰다. 그렇게 고양이를 두고 떠나려는데―
“저 고양이... 방금 저어쪽 바위 위에 있지 않았어?”
“어… 그렇네요. 지금은 나무 옆에 있는데요?”
한 번 뒤 돌때마다 고양이는 괴담 속의 인형처럼 소리 없이 다가왔다.
“왜 자꾸 쫓아오는 거야? 내가 물고기라 이건가?”
“그, 태초 님, 물고기 아니고 인어. 인어…….”
그렇게 고양이는 저택 앞까지 따라왔다.
‘어쩌지?’하고 서있는 데아와 다르게 연가을은 혼절 직전이었다.
“이거… 간택 아닐까요? 여기서 키워도 되나? 여기 캣타워 배송 돼요? 초기 비용이 얼마였지?”
“여기서 어떻게 키워. 허락 맡아야 하는 거 아냐?”
“아니에요. 저 아는 애는 여기에 몰래 달팽이 데려왔어요. 사과 주고 키우고 있던데?”
“그건 달팽이잖아……!”
데아와 연가을이 움직이지 않자 고양이는 은근슬쩍 꼬리를 세우며 다가왔다. 데아의 종아리에 뭉근하게 몸을 비비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대박. 키우라는 신호인가 봐요!”
데아는 고민하다가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따끈한 뱃살이 손가락 사이에 잡혔다. 뼈가 없는 것처럼 쭈욱 늘어나는 감촉이 기묘했다.
“그런데 밖에 있으면 또 이상한 사람들한테 당할지도 몰라요.”
“그건 그래…….”
데아는 고민하다가 고양이와 함께 저택 위로 올라갔다.
“오늘만이야. 오늘만.”
◈ ◈ ◈
그다음 날 아침. 데아는 일부러 창문이며 문을 활짝 열어 두고 훈련장에 갔다. 고양이가 나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난 힐러니까 힐에 충실해야지”
그러나 결국 그 힐 훈련이라는 게, 딱히 따로 할 만한 게 없었다.
저명한 훈련장들이 와서 데아를 훈련시켰지만 데아는 일부러 게으르게 훈련에 임했고, 결국 그들 또한 두 손을 놓고 옆을 떠났다.
그래서 데아는 한순간에 고위 헌터들에게 밉보인 주제에 훈련도 제대로 안 하는 글러먹은 F급이 되었다.
‘고양이… 아직도 있을까? 나갔을까?’
“어쭈? 배가 아주 불렀네?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그냥 보낸다고? 너 진짜 거만하고 멍청하다.”
“어디서 개가 짖나.”
양철민이 시비를 걸었지만 무시했다.
“오늘 무슨 일 있나? 왜 건성이지?”
“제가 그랬어요?”
“그래. 뭐 있나? 세연이가 말하는 거 보니까, 고양이 한 마리 데려왔다데. 혹시 신경 쓰이는 거면…….”
“무슨 소리예요. 저 오늘 문 다 열어 주고 왔거든요? 하룻밤만 재워 준 거예요. 고양이 나가든 말든 내가 알반가?”
“어? 한지야, 너 고양이 키워?”
“아니? 그냥 하루만 재워 준 거야. 어제 졸졸 따라와서.”
“아 귀엽겠다. 보러 가도 돼?”
“없을걸? 나가라고 문을 다 열어 주고 왔거든.”
석파란은 달달 떠는 데아의 다리를 보고는 슬며시 웃었다.
“그래. 그래. 오늘밤에 보러 갈게.”
“와도 없을 거라니까?”
그러나 당일 훈련이 끝나자마자 데아는 부리나케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201호. 실평수 10평이 조금 넘는 원룸. 그곳이 바로 데아의 새로운 방이었다.
데아는 방 안의 불을 켰다. 데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