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왜. 네가 참여하려고 했어?”
“사실 그러려고 했는데.”
“뭔가 있군.”
권도언은 5년 전 마주했던 백리서의 본모습을 갑작스레 상기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섬뜩하고, 죄책감이 없는 금수의 얼굴이 다시 그려졌다.
“길드 통합 팀에 뭐가 있나?”
포식자가 웃었다. 권도언은 손을 내저었다.
“…네가 관심가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
“있군.”
“없어.”
“있군.”
“하하.”
권도언은 파일을 뽑아 넘겨주었다.
“여기. 가서 신청해.”
“그래.”
백리서는 파일을 들고 길드장실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권도언은 타닥타닥 책상을 두드렸다. 이데아가 백리서를 피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 분명 이데아가 더 신분이 높은데도.
“이걸 데아 씨한테 말해 줘야 하나 몰라……
◈ ◈ ◈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인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잔은 느릿하게 감았던 눈을 떴다.
거칠게 끌려와 외딴 방 안에 가둬진 지 한참. 며칠이 지났는지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자잔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주군의 모습을 그렸다. 날 구하러 와요. 주군. 나를 보러 와요. 주군. 언제 와요, 주군?
‘그런데… 그 주군이 누구지?’
이미 사라진 죄인 트리야인가, 모든 것의 근원 태초인가.
자잔은 벼락처럼 눈을 떴다. 폐가 갑작스럽게 부풀었다. 샤샤는 어디에 있지?
“깼나?”
―헉……!
철컹! 손에 묶인 수갑이 마찰음을 냈다. 자잔은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낯선 상처.
―카, 칸나니아 님…….
“오랜만이군.”
침대의 가장자리가 푹 꺼졌다. 자잔은 뒤로 물러섰다.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인데, 참 잘 자랐어. 그렇지 않나?”
―…….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어린아이 몸으로 지내 와서 완전히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성체의 몸에 욕심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칸나니아의 시선은 수십 번 피를 묻힌 칼날 같았다. 자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욕심은 없었지만, 들어온 기회를 저버리진 않았습니다.
“…….”
―그 모든 상황 속에서, 강해지는 것만이 제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자잔은 서둘러 상황을 판단했다. 자신을 납치한 칸나니아가 홀로 찾아온 이유.
그래. 이유는 하나뿐이다.
―…저에게 무엇을 제의하려고 하십니까.
“단도입적으로 말하지. 너에겐 선택지가 없다.”
―…….
“죽음도 선택지라고 볼 수 있다면, 뭐, 있을지도 모르지.”
자기가 하는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거였다.
“자잔. 네 모습은 지난 세월 동안 쭉 봐와서 잘 알아. 우리는 같은 우상을 섬긴 동료이자, 슬픔을 공유한 동족이지. 너라면 날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잔은 칸나니아가 무슨 말을 하든 대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네 주군 트리야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나?”
불가항력이었다.
5년 동안 애써 수면 아래 가라앉혔던 이름이 다시 떠올라 자잔의 뺨을 쳤다. 자잔은 눈을 부릅뜨며 칸나니아를 노려보았다.
―…….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가 감히 태초에게 반발하려 하느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인어의 이름은 잊은 지 오래다. 나의 새로운 주군은 바로 태초다― 등 할 말은 많았지만…….
그 모든 말 대신에, 자잔은 주저하며 속삭였다.
―…어떻게?
등신 천지 자잔. 여기서 이렇게 말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수로?
칸나니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주 쉽지. 태초를 버려.”
자잔은 자신이 이미 말렸음을 깨달았지만, 늦은 상태였다.
자잔은 먼 과거, 샤샤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 상기했다.
혹여나 누군가가 배신을 권유한다면?
“어떡하긴 뭘 어떡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면 해. 배신.”
샤샤는 특유의 무감각한 표정으로 자잔을 응시했다.
“살아. 어떻게든 살고. 다시 나에게 와.”
합리와의 시간이다. 살고, 다시 그에게 가면 되는 거다. 자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발 돕게 해주십시오. 저, 저는 제 주군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주군이 누구인지는, 칸나니아 당신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불쌍하기도 하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운이 좋았구나.”
칸나니아는 방안의 불을 켰다. 곧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 ◈ ◈
면적 8만 5621평, 둘레 7킬로미터, 서해안에서 남서쪽으로 20킬로미터. 해발고도 80미터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진 무인도.
그곳에 배가 속속들이 선착했다.
“흐아! 멀미……!”
“우욱…….”
어선을 타고 온 헌터들이 하나둘 내려 구역질을 했다. 데아는 그중에서 아주 멀쩡하게 대지를 밟은 인물 중 하나였다.
“빨리 일어나 약골들아.”
“너, 진짜, 보기와 다르게, 우욱, 튼튼…….”
저 멀리 크고 작은 배가 하나 둘 정박하고 있었다. 곧 이곳은 헌터들로 와글와글 차게 되겠지.
“그런데 진짜 엄청나다. 난 여기가 무인도인지도 몰랐어!”
“진짜. 무슨 소규모 도시 같은데.”
조 단위가 넘는 개발 비용을 들여 지은 헌터들의 작은 도시. 그곳은 이미 무인도가 아니었다.
데아는 캐리어를 질질 끌며 거대한 고성처럼 우뚝 선 저택으로 들어갔다.
“한지야. 여기 안내 있어!”
“어어. 읽고 있어. 수용 인원 2,000명. 동관은 여자, 서관은 남자. 지원계, 힐러, 마법계는 모두 저층을 이용하고, 공격계 방어계일수록 고층 이용…….”
“그런데 여기에 정말 S급이 올까?”
“몰라. 오늘 확인할 수 있겠지.”
“너희들 이리로 와라!”
“어, 길드장님!”
세연이 데아를 끌고 배협에게로 달려갔다.
“어, 한지 너는 멀미 잘 안 하나 봐? 부럽다.”
“아니, F급 쩌리는 왜 여기 낀 거야?”
“다물어라, 양철민.”
어느새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해진 석파란과 여전히 재수가 없는 양철민 또한 그곳에 있었다.
저택 1층의 거대한 로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다 소형 길드의 헌터들뿐이었다.
“이거 받아라.”
그때 배협이 등급이 적힌 브로치를 나누어 주었다. 세연은 우물쭈물 E라고 적힌 브로치를 가슴에 달며 투덜거렸다.
“이런 곳에서 까지 등급을 나누다니…….”
데아 또한 찰칵, F급 브로치를 가슴에 달았다.
하급 헌터가 많이 모이는 장소였지만 F급은 몇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데아는 자신이 F급을 달자마자 쏘아져 내려오는 많은 무시의 시선을 느꼈다.
‘벌써부터 서열질이라고?’
“S급 보여?”
“아니… 다 시궁창들이야.”
“시궁창이 뭐야, 시궁창이.”
양철민은 바닥에 칵― 침을 뱉었다. 데아가 정강이를 까자 욕을 고래고래 소리쳤다.
“정말 S급이 여기에 올까? 그런데 궁금하긴 하다. 저번에 권도언 길드장님 만났을 때… 진짜 위압감이 장난 아니더라고. 모든 S급이 다 그럴까.”
“어! 잠깐만, 지금 거대 길드 헌터들이 오고 있대!”
거대 길드의 심볼을 깃발에 단 헌터들이 저 멀리 우르르 모여들고 있었다.
“여례아다!”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여례아? 여례아라고? 그럼 거기 헌터들은 다 B급 이상이라는 거잖아? 헌터들의 얼굴에 기묘한 흥분이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때,
“어! 여기 있다!!”
데아의 몸이 우뚝 굳었다. 그 옆 사람들 또한 우뚝 굳었다. 날랜 걸음으로 샤샥 다가와 데아를 와락 껴안은 사람의 정체, 그건 바로 연가을이었다.
“저 왔어요! 역시 여기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저 완전 잘 찾아왔죠!”
낯선 곳에 혼자 가서 마음고생이 많았던 탓일까, 예전보다 살이 조금 내린 모습의 연가을이 반가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방방 뛰었다.
“저 여례아 들어간 것 까지는 좋았는데 솔직히 적응하기 너무 힘들어 가지고… 진짜 하루에도 빠짐없이 태, 아니, 한지 언니 생각이 나더라니까요. 아,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데아는 맘만 같아서는 연가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가, 가을아. 입. 입 좀.”
“아, 저번에 공략 문자 보낸 뒤로 소식이 없어 가지고 걱정 엄청 했어요. 근데 여기 있어서 정말 다행…….”
“가을 헌터! 빨리 이리로 오십시오!”
“앗, 네! 언니. 저 갈게요. 꼭 연락하기. 알죠? 방이 다 독실이던데 나중에 찾아가도 돼요? 저 친구가 몇 없어서…….”
“가을 헌터!”
“네, 네!”
연가을의 가슴팍에 달린 브로치에 적힌 알파벳은 A. 양철민이 바들바들 떨며 휙 데아를 노려보았다.
“치, 친구가 A급이라고 해서 네가 A급이 된 줄 아냐?”
“뭐래.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한지야. 너 A급 헌터하고 아는 사이였어? 왜 그 동안 말 안했어? 진짜 대단하다!”
A급은 쟨데 왜 내가 대단해…….
“어디가?”
“나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선형으로 나있는 계단을 타고 5층에 올라가면 꽤나 넓은 발코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여럿 헌터들이 저들끼리 모여 잡담을 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데아는 그 구석 난간에 몸을 기댔다.
“비눗방울 할래?”
당연히 후후 부는 비눗방울을 상상했는데 세연이 꺼내든 건 권총이었다.
“……? 그게 뭐야?”
“……? 비눗방울.”
방아쇠를 당기자 해일과도 같은 엄청난 양의 비눗방울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을 지나던 헌터들이 그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축제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수련회 온 것 같아! 합동 훈련이 이런 분위기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렇지 않아?”
“난 수련회 가본 적 없어서 몰라.”
“앗, 미안해…….”
“미안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나둘, 투명한 비눗방울이 데아의 시야를 스쳤다. 데아는 제 눈앞에 보이는 비눗방울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비눗방울이 연달아 터졌다. 데아는 상념에 잠겼다.
‘자잔은 어떻게 구하지? 밤에 몰래 바다로 헤엄쳐서 MBL에 들어가야 하나?’
“어? 저기 바비큐 파티하나?”
‘그건 그렇다 쳐도, 분명 놈들은 포세이돈의 공략을 빠르게 하는 걸 원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게이트가 유지될수록 좋은 거니까. 그러면 내가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공략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럴 방법이 있나?’
“한지야, 우리 저 아래로 내려갈래?”
‘아, 좋은 생각이 났다. 힐러는 기본적으로 지원도 병행하지?’
지원, 버프 스킬. 이거다.
‘몰래 보조만 하면 난 눈에 안 띄고 좋잖아?’
데아는 살짝 마력을 불러내고는 비눗방울을 톡 건드렸다. 비눗방울 위에 아주 미약한 마력이 갑옷처럼 둘러졌다. 맨손으로 다시 건드리자, 그 비눗방울은 터지지 않았다.
‘됐다!’
“뭐야? 이 F급은?”
퍼억!
그리고 그때, 데아는 휘청 기우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한지야!”
“재수가 없으려니, 쓰레기 F급이 감히 다른 헌터들 지나는데 길을 막아?”
덩치가 큰 남자들이 지들끼리 킬킬거리며 데아를 내려다보았다.
낮은 등급을 상대로 벌어지는 폭력과 따돌림이 실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난간에서 민다고?
‘아, 그나저나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최소 중상인데. 어떡하지?’
방법 1. 그냥 떨어지고 중상을 입은 다음 입원한다.
방법 2. 반격한다.
그렇게 방법 2로 실행하게 되면 등급 재판정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칸나니아와 MBL의 시선을 끌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계획이 망하는데…….
그러나 데아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등급 재판정? 얼마든지 하라 그래. 다시 F를 맞아 주마.’
터억! 데아는 난간을 잡고는 그대로 다리를 차올렸다.
굉음이 울렸다.
“크아악!!”
“저, 저……!”
고스란히 하관을 얻어맞은 남자들의 얼굴에서 붉은 피가 터져 올랐다. 주변 헌터들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별것도 아닌 게 자꾸 시비질이야…….”
데아는 난간 위에 사뿐히 착지하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 차 면상을 가격했다. 남자의 이빨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데아는 어이없게도 발을 헛디뎠다.
“어……?”
이런 실수를?
“하, 한지야!!”
세연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데아는 속절없이 느껴지는 중력을 감내 했다. 아, 이건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저 멀리 보이는 헌터들의 얼굴이 놀라움과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세연 또한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누군가 떨어지는 자신을 받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쿠당탕!!
5층 높이에서 떨어졌지만, 데아는 상처 하나 없이 누군가의 품 안에서 눈을 떴다. 충격을 받아 내기 위해 엎어진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맥박이 빨리 뛰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때 누군가 아스라이 소리쳤다.
“배, 백리서 헌터……!”
“세상에!”
불길한 예감.
데아는 허겁지겁 고개를 들어 상대를 마주했다. 익숙한 색채가 시야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