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56화 (156/223)

※ 156화

“보는 눈이 없는 헌터들은 몰라도, 영상을 본 헌터들은 모두가 그걸 눈치챘죠.”

“…….”

“대비해야 해요.”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배협의 시선만 봐도 짐작이 됐으니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에요. 하지만 저는 데아 씨 편이니까…….”

사라지지 않은 출구 게이트. 게이트의 빛이 아스라이 흩뿌려지는 정적 속에서 그는 혼자 하얗게 웃었다.

“뭐든 곤란해지면 말씀만 주세요. 얌전히 조력만 할게요.”

“걱정 마세요.”

데아는 권도언의 말려드는 손가락을 놓으며 웃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상황 모면하는 거, 제가 한두 번 해봐요?”

“…….”

“길드장님이야 조금 시간차 두고 나오세요.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데아는 먼저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한지야!!”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세연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묘하게 뚱한 표정의 권도언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동시에 게이트가 뚝 꺼졌다.

“와, 방금 뭐였지? 보, 보스 인어가 죽었는데도 이상한 괴물이 나와서 달려드는 건 처음 봤어.”

“허, 그거 뭐야? 인어였나? 하지만 꼬리가 없었는데!”

그때 포세이돈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새로운 헌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가장 선두에 서있는 건 여기은이었다.

5년 만에 보는 여기은. 데아는 표정을 굳히고 일어섰다.

“지금 상황실에서 영상을 보고 급하게 달려왔는데, 무사하시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괜찮으신가요?”

“지금 괜찮아 보여요?”

누군가는 따졌고, 누군가는 때아닌 여례아 길드장의 등장에 놀라워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 사이에 홀로 입을 다물고 덜덜 떠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배협이었다.

“저희도 상황을 보고 놀라서 달려온 거예요. 영상을 보고요. 다들 영상의 존재는… 알고 계시죠?”

헌터들 사이에서 은은한 동조가 퍼져나갔다.

“그런데 여기 게신 여파 길드장 님이…….”

여기은이 빙글 웃는 권도언을 보고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더 빠르게 오신 것 같군요.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 괴물들은 뭐예요? 이상한 사람들!”

“아,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가 낭패의 기색을 억지로 지우고 있다는 걸 오직 데아만 알아보았다.

“인어의 돌연변이이죠.”

“돌연변이요?”

“네. 인어는 다들 알다시피 미개하고, 야만적인 종족입니다. 당장 살펴만 봐도 모습과 특정이 제각기 다르죠. 그 덩치가 큰 인간같이 생긴 괴물들은 인어의 돌연변이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헌터들을 사냥하죠.”

“어? 그런데 길드장님은 누가 보냈―”

‘다고―’ 턱! 배협은 빠르게 세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때마침 누군가가 여기은에게 말을 걸어 의심 없이 넘어갔다.

“우선, 공략을 축하합니다. 살아남은 여러분들의 인벤토리 안으로 각자의 공적치와 할당된 아이템이 들어갔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와아! 와!”

원래라면 자동으로 이루어지지만 상황이 워낙 특수한 상황인지라 시스템에 대해 잘 아는 길드장이 직접 나서는 거라며 여기은이 애석하게 웃었다.

“그리고… 권도언 길드장님?”

“네.”

“무모하셨습니다. 괴물들은 정보도 많이 없는 희귀 몬스터들인데 그렇게 무작정 들어가시다뇨. 혹여나 크게 다치시기라도 했다면,”

“제가 헌터들을 워낙 아껴서요.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행동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권도언과 여기은 사이에 서늘한 눈빛이 오고갔다.

“…평소에 봐오던 길드장님과 조금 다른 것 같군요.”

그러니까 ‘평소 누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썼던 네가 이번에는 왜 이번에는 발 벗고 나셨냐’는 물음이었다.

“다르다뇨? 이런 희귀한 상황이 뭐 얼마나 있다고 절 판단하십니까?”

그러자 ‘눈에 띌 만큼 억지스럽고 수상한 상황을 먼저 만든 네가 잘못’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은은 미간을 비틀었다. 권도언은 처리할 수도,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권도언이 원하는 게 협력인지, 투자인지, 혹은 적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지켜보다가 행동해도 되겠지.’

“그건 그렇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기은은 물러났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쌩 나간 여기은 길드장을 따라 다수의 헌터들이 줄줄이 나갔다.

그때, 배협이 권도언에게 다가왔다.

“도와주십시오.”

여기은과 권도언이 대화하는 순간, 배협은 분명 뭔가를 눈치챘다.

“이대로 저희가 돌아간다면, 분명 저희는 죽을 겁니다.”

“기, 길드장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

세연이 소리쳤지만 배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립니다.”

“이름 배협. 헌터명 협. 방어계 탱커 D급.”

“네?”

“여례아 산하 길드 ‘정의’의 길드장. 32세. 포세이돈 2층이 열리고 가장 먼저 던전을 공략했던 헌터. 전멸당한 팀의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본인이 생존자라는 걸 숨겼고. 이동 스크롤로 아무도 없는 새벽에 포세이돈에서 몰래 탈출. 맞죠?”

“…….”

주변이 고요해졌다. 권도언은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을 기울여 다시 물었다.

“틀렸어요?”

“…아니. 맞, 맞습니다.”

“길드장님, 정말이에요?”

세연과 양철민이 충격에 어려 소리쳤다.

“그, 그래. 나는 안에서 봤어……. 괴물들을 누가 보냈는지, 같이 공략에 참가했던 헌터들을 다 죽인 괴물들이 누구 앞에서는 얌전했는지…….”

“그럼 아까 괴물을 누가 보냈다는 게…….”

“거기까지만 얘기하세요. 누가 들을 지도 모르니까.”

권도언을 제외한 다섯 명의 헌터들은 곧바로 침묵했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자라났다.

갑작스러운 여기은의 등장. 열리지 않던 게이트의 출구. 갑작스럽게 공격하던 이상한 괴물까지……

그때 누군가가 툭 말을 뱉었다. 같이 살아 나온 또 다른 한 명의 헌터였다.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다음 하나로 땋아 내린 여자는 검을 검 집에 집어넣고는 후, 한 숨을 뱉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괴물이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붉은 팀 전원을 죽이려고 일부러 풀었고요.”

“하지만 게이트 안이었잖아요! 인어들의 세상인데, 그걸 왜, 누가 어떤 수로…….”

“설마… 사해의 신인가?”

“아냐.”

툭, 그 사실을 부정한 데아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사해의 신이 헌터를 죽이는 귀찮은 짓을 왜 해? 본인이 직접 왔으면 왔겠지. 바다도 아닌 늪지대에…….”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 사해의 신은 잔인하고 미친 신이야.”

“아니, 물론 그것도 맞는데…….”

의심받느냐, 마느냐. 데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본인 디스를 시작했다.

“사해의 신이 진짜 멍청하고 포악하고 잔인하고 미치고 나쁜 인어는 맞거든?”

“그렇지. 잘 아네!”

“근데 그럴 거면 본인이 직접 나와서 살육을 즐겼겠지, 남들한테 왜 시켜?”

권도언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까 전에 배협 길드장님이 하신 말씀 들었잖아. 괴물들이 얌전해진 상대는 게이트 밖에 있었다고! 그게 누구였어요?”

“그건…….”

배협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나도 잘 몰라. 확실한 건 인간이었다는 거다. 게다가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인간이라니!”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 그 괴물을 조종했다고요?”

“그래,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배협은 다시 권도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여파의 길드장님은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부탁입니다. 저도 그 괴물들을 다루는 인간들이 누군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대로 길드에 돌아가면 저희는 다 죽습니다. 부디 조금만이라도 도와주세요.”

◈          ◈          ◈

“이 애, 웃기네?”

여례아의 길드장실 안, 여기은은 던전에서 살아 나온 다섯 명의 명단을 보다가 우뚝 멈췄다.

“설한지, F급 힐러? 뭐가 잘못된 거 아닌가? 그 치유력이 어딜 봐서 F급이야. 최소 D급은 될 것 같았는데.”

여기은은 곧바로 스크린을 뚝뚝 넘겼다. 녹화되었던 던전 안의 영상이 리플레이되었다.

“길드 정의의 유일한 힐러… 우리 산하네?”

“숨겨진 진주일까요? 말씀만 주신다면 곧바로 스카우트를…….”

“아니. 아냐. 기다려 봐.”

여기은은 달력을 흘끗 보고는 나머지 플랜을 쫙 넘겼다.

“여파가 이 다섯 명을 보호하고 있더라고.”

“여파가요?”

“권도언의 꿍꿍이를 모르겠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하지만 막상 이 다섯을 죽이면 눈에 너무 띄게 되었으니까.”

여기은은 고민하다가 모니터를 켰다. 영상 속에서는 던전 안의 설한지가 누군가를 치료하고 있었다.

“…공범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입단속의 한 방법이지.”

“공범이라면…….”

“길드 통합 팀에 이 다섯 명을 전부 집어넣어.”

“네?”

길드 통합 팀.

여기은은 의자를 드르륵 돌렸다.

“아무래도 2층 공략을 서두르는 게 낫겠어. 난이도 낮춰서 알아서 공략하도록 해봐. 그리고 3층이 개방되었을 때, 길드 통합 팀을 하나 만들자고.”

“길드 통합 팀이요?”

“그래. 이 다섯 명을 전부 합해서. 여례아, 023, 여파까지 전부 합한 포세이돈 전문 단체 공략 팀. 거대 길드들의 엄청난 특혜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특별 팀이지.”

“아, 지원과 물량으로 입단속을 시키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길드 통합 팀은 반드시 필요해. 칸나니아가 한 말을 들었나?”

“아뇨. 저는 그분을 잘 뵐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길드 통합 팀. 여례아는 이미 길드와 등급에 상관없이 모인 몇 백 명의 헌터들의 훈련을 위해 섬을 매수하고, 거대한 도시를 지었다.

“포세이돈이 유명해진 만큼 그 태초도 이미 우리 쪽 상황을 눈치 챘을 확률이 크다는군. 전멸하기 싫으면 인간들끼리 뭉치라는데 말에 따라야지.

여기은은 살아남은 다섯 명의 명단을 파일 안에 넣고는 휙 날렸다.

“물론 소형 길드를 포세이돈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전멸시켜. 유명세를 모으는 짓은 계속할 거야. 하지만 동시에 곧 올 태초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야지.”

“태초가 곧 온다. 태초가 오지 않을 리가 없어. 그 전에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니 전체 헌터의 수준을 올려라. 가능성이 있는 하급 헌터들을 중심으로 군사 훈련을 시켜.”

한쪽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잿빛 머리카락의 기묘한 인어 칸나니아. 여기은은 그 인어가 껄끄러우면서도 달가웠다. 그의 말에는 분명한 힘과 설득력이 있었으니까.

“거대한 군대를 만들자는 거지. 우리가 전멸당하기 싫으면, 인간들을 뭉치고 선동해야 해.”

◈          ◈          ◈

2층이 공략되고, 3층이 개방되었다. 2주 뒤의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공략되다니,”

“이제라도 돼서 다행이지.”

그러나 세상은 여례아가 발표한 ‘길드 통합 팀’의 발표로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길드 통합 팀? 그게 뭔데?”

“여례아 주최라는데… 사실상 거대길드 전부가 모여서 주최하는 거래. 와, 등급 낮은 헌터들이 눈에 불을 켜겠는데?”

“벌써 난리 났지. 당장 우리만 봐도.”

‘길드 통합 팀’. 전국에서 선별된 헌터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략 팀. 등급에 상관없이 높은 거대 길드의 훈련과정을 그대로 밟을 수 있고, 등급에 상관없이 아이템을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었기에 낮은 등급의 헌터들은 곧바로 흥분하여 선별 시험에 뛰어들었다.

그 동안 기회가 많이 없던 하급 헌터들에게 기회를 주고, 인재를 등용하여 하루빨리 탑을 공략하고자 한다는 게 ‘길드 통합 팀’의 대외적 이유였다.

물론 데아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그런데 왜 우리는 시험 안 봐요?”

“그게… 시험을 보는 헌터들이 있고, 곧장 스카우트로 올라가는 헌터들이 있는데, 우리는 후자인 모양이야.”

포세이돈의 공략이 끝나고, 데아와 다른 헌터들은 여파의 보호 하에 각자의 길드로 돌아갔다. 물론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명의 헌터는 어쩔 수 없이 임시로 같이 지내야만 했지만.

E급 근거리 딜러 검사 석파란.

석파란이 인상을 구겼다.

“우리를요? 왜?”

“그거야 모르죠.”

“수상한데…….”

“그래도 여기서 계속 여파의 보호를 받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딱 보니까 대규모로 합숙하던데. 가면 그나마 보호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분명 높은 등급 헌터들도 올 거라고요.”

“그건 그렇죠.”

“앗, 그러면―”

그때 세연이 떨리는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S급 헌터도 올까요?”

“한국에 S급 헌터들은 네 명밖에 없어. 다른 나라 S급은 포세이돈이 없어서 그런가… 예전만큼 힘도 못 쓰는 분위기고.”

“그, 있잖아요. 백리서 헌터님이요.”

음료를 들이키던 데아는 우뚝 굳었다.

“그분도 오시려나요? 유일하게 길드장이 아니시니까, 어쩌면…….”

“백리서 헌터가? S급이 뭐가 아쉬워서 여길 와?”

“그건 그렇겠죠…….”

“물론 오면 좋겠죠. 잘 가르쳐 줄 것 같거든.”

석파란이 키득거렸다.

“나도 검사인데 많이 배우고 싶어서…….”

◈          ◈          ◈

“나도 갈게.”

“네가?”

백리서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의자를 끌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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