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화면이 켜졌다. 아직 괴물은 나오지 않았다.
“잘됐네. 아직 안 나갔잖아. 계속 보자고.”
안 돼, 이대로 괴물이 나오면 괴물의 존재가, 병기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다.
‘아직은 때가 아닌데……!’
여기은이 다시 휴대폰을 들어 올리려던 때였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밀린 의원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의원은 여기은의 등에 머리를 박았으며, 여기은은 휴대폰을 놓쳤다. 데구르르― 휴대폰이 바닥을 굴렀다.
“권, 도언!”
“왜?”
여기은의 휴대폰을 주운 권도언이 싱긋 웃으며 넘겨주었다.
“강하게 떨어뜨려서 내부가 아예 맛이 간 것 같은데. 다음부터는 조심해, 여례.”
“이 새끼가…….”
여기은은 다시 연회장 안으로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권도언은 보았다. 화면 속에서 헌터들 주변을 도사리는 검은색 그림자들을.
‘저게 뭐지?’
그러나 그때, 뚝, 화면이 한 번 더 꺼졌다.
“이런! 화면이 또 꺼졌어!”
“이거 또 켜주실 수 있는… 어? 길드장님?”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권도언 또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 권도언 길드장님! 어디 가십니까?”
“잠시 밖에요.”
권도언은 발로 문을 밀어 열었다.
“시간 끌기 실패했거든요.”
◈ ◈ ◈
“나무가 안 보여.”
“뭐? 나무라면 여기 많잖아?”
데아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태초의 고목이 보이질 않는다. 역시 이곳은 제국의 반대편인 걸까? 그만큼 멀리 있는 뜻이겠지.
“큰일났어! 게이트가 안 열려!”
“뭐? 보스 인어는 처리했잖아!”
헌터들은 허공에 대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나오지 않는 출구 게이트. 데아는 공황 상태에 빠진 헌터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달렸다.
“한지야, 어디 가!”
“저기 뭐가 있어!”
그 말에 헌터들이 우뚝 굳었다.
습한 공기, 울창한 숲. 광활하게 펼쳐진 늪. 헌터들은 예민하게 침입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누군가 온다!”
“왜, 왜! 보스는 처리했잖아!”
“설마 아직 안 끝난 건가?”
바람이 불었다. 데아는 보통 사람의 몸집에 세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그림자들을 보았다.
저건 분명…….
‘저 덩치들은… 자잔이 한 번 당했던 그 덩치들이잖아?’
“저거 사, 사람 아니요?”
“사람이 저렇게 크나? 저, 누구세요?”
그러나 배협의 반응만이 조금 이상했다. 배협은 즉시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길드장님? 왜 그러세요?”
“저, 저거 괴물이야.”
“네?”
“우리를 몰살시킬 예정이야. 우리를 다 죽일 셈이라고!”
그리고 배협은 미친 듯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고요!”
“저 괴물들이 지금 다가오고 있잖아! 잡히면 안 돼! 다들 도망가!”
“그게 무슨……!”
“나가야 해! 이동 스크롤 있는 사람 여기 없나? 이동 스크롤!!”
이동 스크롤은 하급 헌터가 쉽게 얻을 수 없는 고가의 아이템이었다. 당연히 헌터들은 나서질 못했다.
그때 덩치가 큰 인간형의 사람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무장한 괴물들에게 누군가 다가갔다.
“당최 누군데? 거, 얼굴이나 좀 봅시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헌터들은 끔찍한 참상을 목도했다.
괴물이 한 손으로 번쩍 헌터를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비틀어 죽인 것이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
“으아아아아악!!”
그때서야 헌터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러나 헌터들이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고, 달리는 속도 또한 괴물들이 더 빨랐다.
“저, 저거 뭐야!! 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건데!”
“인어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세연아, 이리 와.”
데아는 파랗게 질린 세연을 뒤로 끌었다. 그대로 허리를 움켜잡고는 도약해 나무 위로 올랐다.
“흐아, 아악!”
“소리 지르지 마.”
“어! 어어. 알겠어…….”
저 덩치의 신장은 어림잡아 3미터. 늪에 빠져도 가까스로 고개를 내밀 수 있으니 늪으로 유인해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접어야 했다.
‘그래도 시간은 끌 수 있을 것 같은데…….’
열네 명이었던 붉은 팀은 하급 인어에게 다섯 명이 죽어 아홉 명이 되었고, 방금 저 괴물들에게 잡혀 순식간에 네 명이 더 죽었다. 데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남은 인원은 오직 다섯 명. 데아와 세연, 양철민과 배협. 그리고 초면의 헌터 하나뿐이었다.
“늪 쪽으로는 가지 마세요!”
카메라가 지금은 꺼졌을까? 이런 몰살의 현장을 보여 줄 리는 없으니 꺼졌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데아는 선택해야 했다.
이 사람들에게 위험을 감수하고 저 덩치들을 죽이느냐, 아니면 이대로 계속…….
데아의 첫 번째 목표는 자잔의 구출이었고, 두 번째 목표는 인어 제국을 위협하는 포세이돈의 파괴였다. 그 사이에 인간들의 목숨은 없었다.
그러나.
“여기 앉아 있어.”
“어, 어! 한지야, 너 어디 가!”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핏빛의 노을이 늘어지고, 밤이 몰려드는 시간. 데아는 약점 파훼를 썼다. 역시나 붉은 점은 덩치의 머리 쪽에 있었다.
‘한 번에 비틀자.’
그렇게 그 위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나, 나 이동 스크롤 있어!!”
그렇게 말한 양철민이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에 잡힌 건 분명한 하급 이동 스크롤이었다.
“왜 이제야!”
“나, 나도!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질 줄은 몰랐다고!”
양철민이 허우적거리며 이동 스크롤을 찢으려던 찰나였다. 배협이 반색을 하더니 돌연 소리쳤다.
“안 돼!! 찢지 마라!”
“뭐?!”
“찢으면 밖에서도 괴물이 들어 올 거야! 우리는 포위 된 거라고! 우리에게 이 괴물을 보낸 사람들은 밖에 있으니까!”
양철민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
“여기서 다 개죽음당하자고?! 저 괴물 새끼들 우리 공격도 안 먹히는데!! 저 앞에 서면 이상하게 힘이 약해진다고!!”
이상하게 힘이 약해진다고? 데아는 눈을 찌푸렸다.
‘마력을 약하게 만드는 힘. 그건…….’
먼 과거, 기억의 편린이 고개를 들었다.
과거, 태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병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저 둘이 연관이 있을까? 아니 설마. 아무리 그래도…….
‘…정말일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내가 태초라는 여지를 주면 줄수록 위험해져. 나뿐만이 아니라 인어 제국 전체가.’
포세이돈과, 저 병기를 없애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남은 방법은…….’
데아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눈을 감은 카메라가 시야에 담겼다.
그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가능성은 낮지만. 불확실한 확률에 큰돈을 걸어 볼까.
‘나를 보러 온다고 했었지.’
“양철민 그 이동 스크롤 찢어!”
데아는 버럭 소리쳤다.
“뭐, 뭐! 어디서 명령질이야!”
“죽고 싶지 않으면 찢어!”
“한지 헌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방금 한 말 못 들었나? 밖에도 괴물이 있다고!”
“그러면 여기서 다 죽기를 기다려요? 일단 찢어요! 어차피 괴물들 죽이지도 못하는데!”
양철민이 안절부절 못하다가 에이씨, 소리치며 부욱―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그 순간 하얀 게이트가 허공에 튀어나왔다.
하급 이동 스크롤이 기능을 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초.
서둘러 밖으로 넘어가려던 양철민은 넘어가지도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소득 없이 닫히려는데,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재앙의 시간 속, 자신만만한 얼굴이 뚜벅 걸음을 내딛었다.
“헛짓거리를.”
예상은 들어맞았다. 지원군이 빛무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
“어어!!”
배협과 양철민, 그리고 다른 헌터도 지원군의 등장에 비명을 내질렀다. 삿대질을 하며 기겁하며 뒤로 넘어갔다. 입이 턱까지 떨어졌다.
“뭐, 뭐야!! 저, 저거, 저……!”
“권도언 아니야?!”
“권도언이 왜 여기 있어!!”
세연도 입을 틀어막고 흥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세계 랭킹 1위. 5년 연속 랭킹전 1위에 빛나는 여파의 길드장 권도언. 그가 왔다.
‘아 다행이다. 능력 안 써도 되겠어.’
그다음 순간, 권도언은 허공에 손을 덧그렸다.
강한 돌풍이 모든 괴물들의 시야를 앗아갔다.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 오만한 얼굴 위로 비춰진 승리의 확신.
두 시선이 맞부딪쳤다. 데아는 남몰래 손짓했다.
‘머리.’
권도언이 씩 웃고는 한 걸음 내딛었다. 퍽! 퍼억!! 괴물들의 머리가 연달아 터지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낮은 등급의 헌터들을 모아다가 뭐 하나 싶었더니…….”
“가, 감사합니다. 권도언 길드장님. 감사합니다……!”
“궈, 권도언 길드장님 맞으세요? 정말로?”
“왜, 왜 이런 곳에……!”
양철민은 붉어진 얼굴로 권도언의 옷자락 하나라고 만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배협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다가 왜 여기에 그 여파의 길드장이 왔는지 의아해했다.
살아남은 다른 헌터들과 세연 또한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는 가운데, 권도언은 인벤토리에서 상급 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참으로 잘난 자태였다.
권도언은 무게를 잡으며 인자하게 웃었고, 믿음직하게 스크롤을 찢었다. 데아는 모르는 척 웃었다.
‘또 이미지 메이킹하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거 타고 탈출하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한지야! 나가자!”
권도언은 가만히 눈동자만 돌려 데아를 이끄는 세연을 지켜보았다.
“나가자. 너부터 나가.”
“응. 응. 알겠어.”
양철민을 선두로 헌터들이 우르르 나가고, 마지막으로 데아가 나가려는데, 늘상 차가운 표정만 짓고 있던 권도언이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손을 쫙 펼쳐서 불쑥 내밀었다.
“하이파이브.”
데아도 설핏 웃으며 마주 손을 펼쳤다. 짜악! 하이파이브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려고 했는데, 권도언이 턱, 데아의 손을 잡아버렸다.
“뭐 하세요. 저 늦게 나가면 의심받아요.”
“언제까지 F급 힐러로 지낼 거예요.”
권도언의 표정은 답지 않게 진지했다.
“데아 씨가 이번 던전에서 보여 준 치유력. 그건 F급의 것이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