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네?”
“아무것도 아냐.”
배협은 지친 얼굴로 털썩 검은 가죽 소파 위에 몸을 기댔다. 희미하게 짜장면 냄새가 났다.
“계약 사항 잘 확인하고 읽어 봐라. 나중에 빼달라고 해도 우리는 잘 안 빼주니까. 확인했으면 냅다 서명하고.”
“제 각성 등급은 안 물어봐요?”
“뻔하지. F지? 아무리 잘 쳐줘도 E고.”
“…F예요.”
“여긴 다 그런 등급밖에 안 들어와. 사인 다 했나?”
“뭐야. 누구 왔어요?”
“그래. 신입이다.”
체계조차 잡혀 있지 않은 소형 길드.
벽지는 뜯어져 있고, 커튼에는 먼지가 풀풀 풍기는 낡은 방 안에서 남자 한 명이 튀어나왔다. 탈색모에 피어싱을 착용한 인상이 더러운 남자였다.
“신입이 또?”
“…….”
“얘도 그거 되겠네요? 파리 목숨?”
자신을 양철민이라 소개한 남자는 데아를 위아래로 죽 훑고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한대 맞으면 죽을 것 같은데 무슨 헌터야. 헌터는. 내가 충고 하나 해줄까? 지금 더 계약서 찢고 밖으로 나가. 척 보니까 힘도 못 쓰는 마법계 같은데,”
명심하자. 설한지의 콘셉트는 착한 힐러다.
데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마법 아니고… 힐러인데?”
“뭐? 심지어 또 힐러야? 너도 그럼 쓸모없이 버스나 타겠네? 죽는 건 다 탱딜러가 죽고, 어?”
“양철민. 기숙사로 들어가.”
“길드장님, 제가 틀린 말 했어요?”
‘기숙사? 좁아 보이는데 기숙사까지 있다니. 그래도 나름 잘 골랐군.’
양철민이 끝까지 건들거리며 방 안으로 사라지자, 배협이 마른세수를 했다.
“설한지……. 한지 헌터라고 부르지. 그… 미리 말해 두는 건데, 우리는 포세이돈에 공략 참가하는 길드다. 2층 공략권 내려왔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네? 그냥 공략한다는 거 아니에요?”
“맞는데… 혹시 포세이돈 2층에 있는 게이트가 하나가 아닌 건 아나?”
포세이돈의 2층에는 한 개의 게이트만 있지 않았다. 수십 개가 넘는 게이트가 있고, 그 던전들을 전부 클리어 해야만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현재는 절반쯤 클리어가 된 상태였고.
“네. 당연히 알죠.”
“기본은 있어서 다행이군.”
여기서 데아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뭔데 기본 타령이야……. 물론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 설한지는 욕을 뱉지는 않았다.
“한지 헌터님. 그러면 포세이돈 안에서 전멸한 소형 길드의 수는 아시나?”
“음 그건 아직…….”
“어제 부로 70개가 넘는 길드가 포세이돈에 도전했고, 그중에서 33개의 길드가 해체됐다. 사유는 전멸.”
배협의 눈이 낮게 빛났다.
“각오 단단히 해야 해. 어차피 다 돈 때문에 들어온 거잖아? 쓰레기 F급이 어딜 갈 수 있겠어. 이런 시궁창에서라도 일해야지.”
“…….”
“현실을 알려 줄까. 우리 같은 D, E, F급은 같은 던전공략에 참여해도 제대로 된 보상도 못 얻어. 공략 팀 안에 C급 이상이 한 명이라도 끼어 있다? 그러면 모든 공적은 그 C급에게 돌아가는 거야. 항의해도 소용없어. 던전 안에서 죽지 않은 걸로도 다행히 여기며 그 C급이 선심을 베푸듯 나눠 주는 아이템과 마석에 만족해야 하지. 그것들을 헌터 마켓에 팔아 연명해야 하고. 이해했나?”
“…….”
“그런 주제에 수는 많아서 어떻게든 박 터지게 공략권을 따야 해. 거대 길드 산하인 우리들은 그래도 좀 상황이 나은 편이다. 어떻게든 공략권이 나오긴 하니까. 하지만 다른 헌터들은 다르지. 물밑 전쟁이라는 말, 들어 봤나? 헌터의 일부는 던전에서 죽지만 일부는 같은 헌터에게 죽어. 이동 스크롤, 미끼 스크롤, 버프 스크롤, 그것들뿐만 아니라 마석을 얻기 위해 인간이 인어가 아닌 인간을 죽여. 믿어지나?”
주위가 고요해졌다.
“헌터들 잘생기고 예쁘고, 다 멋지게 잘사는 것 같지? 그건 높으신 S급, A급 얘기야. 우리들과는 달라. 괜히 겁먹고 바로 도망가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여파, 여례아, 023같은 그런 번쩍번쩍한 라인에 낄 수 있다고. 딱 보니까 갓 헌터가 된 것 같은데 괜히 들뜨지 말라고. 알아들었나?”
“네.”
배협의 충고가 끝나고, 데아는 슬쩍 그곳을 빠져나와 짐을 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고, 곧 포세이돈에 잠입할 수는 있겠다. 순조로운 계획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안녕…….”
그때 누가 따라 들어왔다. 수줍게 데아를 바라보는 헌터의 뺨에는 보조개가 있었다.
“나는 세연이야…….”
그리고 정적.
짐 정리를 마친 데아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세연은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갔다.
“여기 2인 1실이거든……. 나랑 룸메이트인데…….”
그리고 또 정적.
용기 내어 새로운 길드원에게 말을 건 세연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시끄러웠다면 미안해. 여긴 다 남자들밖에 없어서, 반가워서 그랬어…….”
“반가워.”
그때 데아가 말을 걸었다. 그에 세연의 기가 확 살아났다.
“응. 반가워!”
“길드장님이 하는 말씀 너무 귀 기울여 듣지 마. 척 보니까 알겠더만. 괜히 생각 없이 말 험하게 하는 사람. 걱정해서 더 뭐라고 하는 사람 같은데 저렇게 말하면 누가 걱정한다고 알아들어? 저래놓고 공략 가면 분명 길드원부터 챙길 사람 같긴 한데, 어투는 F 주고 싶다.”
“어, 어어. 맞아…….”
“그리고 낮은 헌터들의 바닥 싸움이야 원래 흔하니까.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살아남으면 다행이지 뭐. 그렇지? 힘내자.”
“으, 으응…….”
‘왜 내가 신입에게 다독임을 받는 거지?’
세연은 다시 느릿느릿하게 나와 데아를 응시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층진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 큰 눈에 옅은 쌍꺼풀. 순하고 예쁘장한 외모 아래 감춰진 건 상대방을 찌를 준비가 되어있는 칼날이었다.
아… F급 힐러라고 해서 마냥 어리숙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때 번쩍, ‘설한지’가 고개를 들었다. 세연은 후다닥 시선을 돌렸다.
“세연아. 너는…….”
“응?”
“포세이돈에 가본 적 있어?”
세연은 턱을 긁적였다.
“응. 두 번.”
“두 번씩이나?”
“우리가 여례아 산하 길드잖아. 종종 공략권이 내려와. 같이 들어간 공략 팀 중에서 아직까지 죽은 사람은 못 봤는데… 운이 좋은 거겠지?”
“그건 다행이네. 전멸 소식이 워낙 많이 들려서 걱정했는데 아주 그런 경우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야.”
“내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 길드장님은 포세이돈 안에서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봤대.”
데아는 그 말의 이상함을 바로 감지했다.
“같은 길드인데 각자 다른 게이트에 들어가?”
“으응……. 나도 이유는 몰라. 포세이돈 안에 들어가면 우선 대기실이 나오거든?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헌터가 엄청 많아……. 그리고 그냥 위에서 정해 주는 대로 팀을 짜서 순서대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공략하는 거야. 클리어하면 밖으로 나오고, 못 나오는 사람들은 알아서 죽었구나 여기면 되고…….”
“왜 나누는 거야?”
“나야 모르지……? 길드장님은 그게 대해 항의도 몇 번 하시던데, 거부하면 던전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들어가…….”
분명히 뭔가가 있다.
“다음 공략일은 언제인지 알아?”
“다음 주다.”
대답은 데아의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배협이 팔짱을 끼고 데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F급을 맨몸으로 들어가게 할 순 없지. 따라와라.”
데아는 배협을 따라갔다. 그가 향한 곳은 안쪽 창고였다.
“세연이한테 뭐 많이 물어봐도 원하는 대답은 안 나올 거다.”
“제가 뭘 물어봤는데요?”
“포세이돈에 대해 물어본 거 아닌가?”
“맞아요.”
“…….”
배협은 잠시 데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훌훌 털고는 금고를 찾아내 열었다.
“이 안에서 원하는 아이템을 골라 봐라. 두 개까지 착용 가능하니까 그렇게 알고.”
금고 안에서 와르륵 튀어나온 건 낮은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힐러이니 마력 증가 아이템 같은 걸 끼면 좋을 거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속도도 올리면 좋을 테고.”
이미 데아의 마력량과 속도는 한계만큼 차있었지만 군말 없이 아이템을 착용했다.
“그런데 그 반지랑 목걸이는 뭐지?”
배협의 눈이 해룡의 반지와, 변환석을 보고 날카롭게 빛났다. 데아는 미리 준비했던 말을 술술 꺼냈다.
“패션 반지랑 패션 목걸이요. 요즘 유행하는 거예요.”
“…이것들이?”
“네. 왜요?”
배협의 눈이 크게 가라앉았다.
“패션 액세서리치고는…….”
“네?”
“아니, 아니다.”
데아는 창고의 출구를 밀어 열었다. 그때 아주 작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비밀이 많은 건 좋지 않은데…….”
◈ ◈ ◈
그렇게 1주일. 데아는 최대한 내부 훈련에 매진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보통 소형 길드의 훈련 방식은 어떻게 이어 가나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체계가 엉망인데?’
첫 길드가 여파라서 쓸데없이 눈이 높아진 건가? 원래 이런 상황 속에서 훈련하는 건가?
‘힐러 훈련 좀 시켜 주세요.’라는 데아의 말에 선심을 쓴다는 듯 배협이 꺼내 온 건 낡은 탭이었다.
“세워 놓고 영상 틀어서 봐.”
“……?”
“타자 칠 줄 모르나? 여기 위에, 돋보기 누르고. 옳지. 힐러… 초보… 훈련……. 아니, 그동안 외딴 섬에라도 들어가 있다 나왔어? 왜 이렇게 느려? 맞춤법도 엉망이네… 이리 줘봐. 내가 치지.”
5년 동안 한 번도 지적받은 적 없던 타자 실력을 이렇게 후빌 줄이야……. 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 됐다. 이제 첫 번째로 나오는 영상을 틀어. 시청해.”
“…….”
―안녕하세요. 힐러 여러분! 방금 각성하신 모~든 분들이 아마 제일 찾아보시지 않을까 하는 영상인데요! 힐러만의 꿀! 팁! 을 잔뜩잔뜩 담은 영상을 끝까지 봐주시면 감사하겠고요~ 구독과 좋아요. 꼭 부탁드립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게 다예요?”
“정의 길드의 길드원은 여섯 명이야. 너와 나까지 합쳐서. 힐러는 너 혼자고. 잘해 봐라.”
그리고 배협은 무책임하게 자리를 떠났다. 데아는 지금이라도 권도언의 팔촌 동생이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훈련… 잘 되어 가?”
“아니. 내가 일전에 배협 길드장보고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말 취소할게.”
“으응 그렇구나…….”
“넌 훈련 잘 되어 가? 너 마법계잖아.”
“나? 지금 주유소 알바 하러 가는데……?”
“…….”
열심히 훈련하지 않아도 의심을 받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섰다.
데아는 계획을 바꿔 다른 길드원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1. 세연. 숫기가 없는 성격에 마법계 E급 헌터.
2. 양철민. 봤다시피 싸가지를 말아먹음. 활과 비수를 다루는 D급. E, F급을 아래의 존재로 인식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음.
그리고 3. 길드장 배협.
방어계 탱커 D급. 실수로 휴대폰 액정을 깨도 한숨만 쉬고 넘어가는 둥, 나름 자기의 사람을 아끼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이 험하고 자기 자신을 좀 싫어함. 약간의 무기력증이 있음.
‘답이 없군.’
그 외에도 아주 적은 인원이 있었지만 데아는 여기까지만 파악하기로 했다.
◈ ◈ ◈
어영부영 1주일이 흘렀다. 포세이돈에 들어갈 날이 밝았다.
“다들 일어나! 준비는 다 했나?”
배협이 빵빵 클락션을 울렸다. 8인용 봉고 차에 나란히 탑승하자 덜그럭거리며 출발했다.
우우웅-
그때 데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파 길드에 머물며 제일 먼저 만든 휴대폰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위로와 연가을. 그리고 권도언.
‘누구지?’
[오늘 포세이돈 공략 가요? 여례아 산하 길드 공략 간다고 누가 말해 줘서 알았어요! 아 맞다, 그리고 저 여례아 붙었어요^-^ 그런데 여기 분위기 좀 이상하긴 해요. 그래도 잘했죵!]
연가을의 연락이었다.
[ㅋㅋ응 떨ㄷ린다.]
[태초 님 거짓말…….]
[방금보낸 문자ㄱㅣ록 지워. 한지라ㅗ 고 꼭 부르고.]
[지금 운동 중이에요?]
[무ㅓ?]
[앗 아니에요…….]
그리고 연가을은 종종 ‘파이팅’, ‘한지 님 응원할게요.’ 같은 문자를 보냈다.
“뭐야, 지금 완전 풀렸네? 던전에 가는데 웃어?”
아니나 다를까 양철민이 시비를 걸었다. 데아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구야?”
“응.”
“나도 아까 전에 엄마한테 연락 왔어.”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아니. 마석 꼭 많이 가져오라고.”
“…….”
“그래서 많이 가져가야 해…….”
데아는 말없이 세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우웅 휴대폰이 한 번 더 울렸다.
[오늘 가요?]
활자가 빙글빙글 웃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발신인은 당연하게도 권도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