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뭐가? 진실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하… 아닙니다.”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구할게. 가게 해 줘.”
데아는 걸음을 돌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곧바로 여파로 가서 권도언이랑 릴림을 몰래 만나고, 협력을 구해 놓을게. 그럼 훨씬 더 안전하잖아? 그치?”
“…….”
“우선 금고 쪽으로 간다? 나 길 아니까 알아서 찾아가도 되지?”
“주군.”
어두운 목소리. 피파글랜은 직접 나가는 문을 열었다.
“마지막 조건이 하나 있어요. 절대, 혼자는 못 보내요.”
사실상 수락이었다.
데아는 활짝 웃었다.
◈ ◈ ◈
[해룡의 반지]
투명한 바다를 떠다 조각한 것 같은 앏은 반지.
―착용자가 치명상을 입었을 경우, 해룡의 수염 하나가 툭 썰려 떨어지며, 해룡은 착용자의 위치와 상태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해룡은 또 거기 있어?”
“네.”
요즘 해룡은 간부들과 함께 제국을 수호하거나, 태초의 고목을 가꾸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제국이 위로 떠오름과 동시에, 태초의 고목 또한 위로 떠오른 탓이었다.
대륙에서 멀찍이 떨어진 거대한 섬. 그곳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가 홀로 하늘을 이고 서있었다.
가장 많은 마력을 지닌 세계수의 구역은 오로지 태초와 해룡의 출입만 허용했다. 제국의 금고는 바로 그 옆에 존재했다. 태초와 해룡, 그리고 제왕 피파글랜만 출입이 가능한 금고를 따라 쭉 들어간 데아는 바로 해룡의 반지를 손에 낀 다음, 작은 상자를 들어올렸다.
“이게 여기 있네.”
“잘 찾으셨네요.”
달깍, 상자를 열자 변환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톱보다 더 작고 가벼운 마석은 사용자의 모습을 실제와 완전히 다르게 변환시키는 단 하나뿐인 보물이었다.
“마석을 이곳에 끼우시고 착용하세요.”
데아는 목에 달라붙는 검은색 목걸이에 투명한 변환석을 착용했다. 그러자 즉시 착용자의 모습이 변화했다. 시리도록 밝았던 머리 색은 차분하게 가라앉았으며, 인간답지 않던 투명한 눈동자도 색이 가득 들어찼다.
“괜찮아?”
“네. 오래된 물건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네요?”
키나 체형은 그대로였지만 인상 전체가 흐릿해졌고, 생김새도 바뀌어 자세히 봐도 같은 사람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저 조금 예쁘장한 20대 같았다.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진 사람. 멍하니 있으면 사기를 당해도 모를 것 같은 맹한 인상에 피파글랜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안심이 되어서요?”
이 정도면 칸나니아는 절대 못 알아차린다. 절대로.
“칸나니아가 이 보석을 알아보진 않겠지?”
“그 아인 변환석을 본 적도 없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래. 그럼 나갈까? 아, 그 전에.”
데아는 목걸이를 다시 풀었다. 그리고 금고를 뒤적거리며 쓸 만한 무기나 치료제를 인벤토리 안에 마구 쑤셔 넣고는 입을 싹 닦았다.
“진짜 갈까? 이제 같이 갈 사람만 정하면 되겠다.”
◈ ◈ ◈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칸나니아가 얼굴을 모르는 자.
2. 데아가 인어라는 걸 알지만
3. 적대적이진 않는 강한 자.
4. 인간 문물에 해박하며
5. 성대로 말을 하는 자.
‘나가지 말라는 뜻이구나.’
“일단 1세대 인어를 포함한 모든 인어가 아웃이네?”
“그렇죠.”
“인간도 되는 거지?”
“찾을 수 있다면요.”
“권도언밖에 없잖아.”
“장난해요, 주군?”
“아니, 누가 좋대? 나도 싫어.”
그렇게 창을 또 넘어 태초의 섬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엄청난 사자후가 데아의 귀를 관통했다.
“으아아악! 어어억!!”
“뭐, 뭐야.”
“어! 데아 언니 왔다! 언니!”
1주일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연가을을 감시했던 이위로가 잔뜩 질린 얼굴로 데아에게 도망쳐 왔다.
“저 인간이 이상해!”
“왜?”
“저 각성했어요!!”
피파글랜과 데아, 그리고 이위로가 흠칫 굳었다. 그중에서 연가을 혼자만 오열하며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려 소리치고 있었다. 지극한 가뭄에 굶주리던 농민이 수년 만에 처음으로 빗방울을 맞은 모습 같았다.
“나 각성했다고! 심지어 공격계! A급!! 세상에 감사합니다! 하느님, 부처님!”
연가을의 말에 잠시 굳어 있던 데아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오 이런, 피파글랜은 눈을 감았다.
“잠시만요, 주군…….”
“당첨.”
“주군.”
피파글랜이 망연자실하거나 말거나 데아는 가볍게 팔랑팔랑 뛰어가 가슴을 쥐어뜯는 연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각성했다고? 정말 축하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정말 가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각성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심지어 등급도 높아……! 흐어어, 엄마, 내가 코트 사줄게, 흐어어…….”
“대단하다, A급이라니. 칼에 맞아도 죽진 않겠다. 그치.”
“그렇겠…… 네?”
B급부터 상위 헌터에 속했다. A급이라면 적어도 전체의 4% 미만.
데아는 연가을 옆에 철퍼덕 앉았다.
“왜 각성했는지 내가 알려 줄까?”
“이유가, 있어요?”
“당연하지. 네가 있는 이곳이 ‘태초의 섬’이라서 그래.”
계획의 초석을 까는 참모처럼 데아는 속삭였다.
“태초의…….”
태초의 섬. 연가을의 미소가 싹 걷혔다.
“저기 나무 보여?”
데아의 손가락을 따라 뒤를 돌아본 연가을의 시선에 까마득하게 먼 거리에 자리한, 아득할 만큼 거대한 나무가 작게 보였다.
“저게 태초의 고목이야. 크지? 인간계로 흘러들어간 모든 마력은 전부 저곳에서 시작 돼. 모든 것의 근원이지.”
“들어 본 적 있어요. 태초, 태초……. 그런데 저, 저는 저기 안 갔는데요.”
“하지만 보이는 곳에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가까이 있는 거야.”
옆에서 이위로가 ‘그렇겠죠. 헤엄쳐서 3일이 걸리는 거리지만 상대적으로 가깝긴 해요.’라고 첨언했다가 데아에게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제가 각성한 게, 장소 때문이라고요?”
“응.”
“여기가 태초의 섬이고요?”
“응.”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아니. 맞아.”
“아니에요.”
“맞아.”
“피파 언니, 데아 언니 좀 영악해진 것 같지 않아?”
“원래 그랬단다.”
연가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 하지만 이해가 잘 안 가요. 여기가 태초의 섬이고, 저어어기 있는 나무가 태초의 나무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저 왜 멀쩡해요? 태초는 미친 신 아니에요? 인간이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산채로 뜯어 먹는다는 신인데!”
연가을의 말에 피파글랜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인어들이 다 그 신의 광신도라면서요? 식인을 권장하고 살육을 지향하는 그 미친 사해의 신이 태초 아니에요? 그럼 여기도 엄청 위험한 거잖아요! 아니. 잠깐만…….”
잠시 말을 멈춘 연가을은 피파글랜과 이위로, 그리고 데아를 샥샥 훑어보았다.
그 후, 불안하게 떨리던 눈이 곧바로 휘어지며, 연가을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알겠다. 저 지금 놀리는 거죠. 아! 진짜 요즘 누가 이런 거에 속아요? 아까는 여기가 ‘내 섬’이라면서요? 에이~ 농담도 그럴듯하게 쳐야지.”
“…….”
“어어? 저 다 기억하니까 지금 시치미 떼도 안 속을 거예요. 분명 제가 처음에 여기가 어디냐고 했는데 내 섬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태초의 섬이라니…….”
“…….”
“진짜 재미 하나도…….”
연가을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없…어…….”
뒤이어 눈썹이 쳐지고, 턱에 호두가 생겼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이 제발 아니라고 말하라며 데아를 독촉했다.
“…….”
“…진…짜, 재미없는데에…….”
연가을이 흘끗 이위로를 쳐다봤다. 고새 붙어 있었다고 나름 친해진 기색이 풀풀 났다.
그가 필사적으로 데아를 눈짓했다. 그러나 이위로는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연가을의 얼굴에 쿠르릉 벼락이 쳤다.
그다음 타자는 피파글랜이었다.
비록 초면이었지만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 믿음직했다. 연가을이 다시 충혈된 눈으로 눈짓하자 피파글랜은 잠시 눈썹을 씰룩거리더니 환하게 웃었다. 백열등이 100개 정도 켜진 듯한 미소였다.
그러나 연가을은 좌절했다. 저건 비웃음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패닉에 한발을 담구는 연가을을 붙든 건 데아였다.
“네가 볼 때 내가 미친 것처럼 보여?”
이렇게 확인 사살을 한다고?
“…네? 네?”
“나 태초 맞아. 그런데 내가 미친 것 같냐고.”
“…….”
“정신 차려. 정신 차리세요.”
딱, 손가락을 부딪치는 소리에 연가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나치게 푸른 하늘 아래, 서서히 분홍색 노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대한 색이 저들끼리 뒤엉키는 광활한 세계 아래, 스스로가 신이라는 인어가 투명한 시선을 맞춰 왔다.
“내가 식인을 하고, 살육을 즐길 것 같아?”
5년 전에 인어에 의해 사망한 헌터 샤샤. 끝은 좋지 않았지만 동정표를 우르르 받고, 명예만 살아남은 전설. 여전히 신화로 불리는 최강의 S급 헌터. 유일무이한 특수 능력 보유자. 지금까지도 대체 불가 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어들의 신, 태초.
연가을은 멍하니 제 눈앞의 인어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해수면에서 하급 인어들이 첨벙첨벙 저들끼리 뛰어 놀았다. 수많은 언론들이 묘사한 던전 안은 이리도 평화로웠다.
“…당신이 식인 하고, 살육을 해왔다면…….”
그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이러고 대화할 수 없었겠죠……?”
그냥 연가을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인정할게요.”
솨아아아아― 파도가 한 번 더 밀려왔다.
“당신, 안 미쳤어요.”
꽤나 괜찮은 대답이었다.
연가을의 대답에 사해의 신이 비로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름이 뭐야?”
“연, 연가을이요.”
“가을아, 나랑 같이 인간계에 갈래?”
“예, 예?”
“사라진 동료를 찾아야 하는데, 저기 있는 피파글랜이 자꾸 날 막아.”
그 말투는 마치 고자질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피파글랜이 내건 모든 조건에 충족하는 사람이 너 같아서 그런데, 나랑 같이 밖에 나가 줄래? 만약 그래 준다면 내가 너한테 여러 가지 선물을 줄게.”
“여러 가지를……? 그게 뭔데요?”
“네가 헌터로 살아갈 때 반드시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가장 대표적으로 안전.”
그건 좀 혹했다. 최근에도 인어에 의해 수두룩 사망한 헌터들의 기사를 봤었으므로.
“너에게 최소한의 안전을 줄게.”
데아는 가볍게 손바닥을 펼쳤다. 바람이 불며, 하얀 빛무리가 넘실거렸다.
“하급 인어들은 똑똑하지만, 그만큼 본능에 충실하지. 인간에게 상처를 받은 하급 인어라면 널 보자마자 공격할거야. 하지만 너는 내 마력을 일부 받았으니, 이제 넌 어느 정도 안전해졌어.”
“…어느 정도라면……?”
“네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내 하위 하급 인어는 널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야.”
아직 같이 나가자고 말도 안했는데 미리 선물부터 주는 신의 뻔뻔한 작태가 놀라웠다.
“걱정하지 마.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나는 내가 태초라고 밖에 알릴 생각도 없으니까. 아주 낮은 하급 헌터로 위장해서 숨어 있을 거야. 진짜 짧게 옆에 있다 가는 나뭇잎 정도로 생각해.”
“나뭇잎치고는 너무 버거운 존재인데요……?”
“어허, 쉿.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까? 그냥 의심 안 받게 친구인 척해. 아니지, 친구하자.”
“예……?”
“와아― 부럽다! 우리 주군하고 친구라니!”
“저도 아직 못 받아 본 영광을 초면의 인간이 누리다니. 이러다 질투 나겠어요, 주군.”
데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져버리겠다는 형형한 눈빛들에 결국 연가을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 출발하자.”
데아는 목걸이를 착용하고 허공에 손을 그어 창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데아의 모습에 어! 어! 소리치는 연가을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데아는 훌쩍 창을 넘었다.
◈ ◈ ◈
“여기가 제 집인데요…….”
연가을은 현관을 열었다. 벌써 시간은 밤이었다.
가로등마저 비춰지지 않는 경기도 끝, 조금만 가면 바다가 나온다는 어둑한 외곽의 골목길. 그 끝에 있는 5번지 반지하가 바로 연가을과 그의 엄마의 아늑한 집이었다.
“가을아!”
“엄마? 왜 병원에 안 계시고 여기 계세요?”
“괜찮은 것 같아서 퇴원했어. 그런데 여행은 잘 다녀왔니? 전에 온 친구랑 같이…….”
흰 머리가 슬쩍 비춰지는 중년 여성이 데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친구도 왔구나?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뭐라도 마실래?”
연가을의 엄마는 오른 다리를 질질 끌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아, 아니… 엄마…….”
“정말 감사해요. 제가 따를게요.”
“착하기도 하지. 친구는 이름이 뭐니?”
연가을의 밝은 면모는 그의 모친을 닮은 거였나.
그러나 헐거워진 매듭, 낡은 옷. 표정은 밝았지만 얼굴 전체에 드리운 그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데아는 그늘의 정체를 알았다. 이건 오랜 시간 동안 아파 온 사람들의 그림자였다.
“제 이름은…….”
다행히도 데아는 연가을의 어머니를 비롯해 기타 인간계의 사람들에게 알려 줄 이름이 있었다. 창을 넘기 전, 빠르게 지은 그 가명은 배신자 칸나니아에게 전하는 태초의 아름다운 메시지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지예요. 설한지.”
‘설마 내가 너한테 지겠냐’의 줄임말, ‘설한지’가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