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데아의 얼굴에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연가을이 본 건 ‘나를 감히 치고 간 하등한 인간 놈을 왜 친히 구제해 줘야 하지?’라는 의문이 담긴 고압적인 인어의 얼굴이었다.
“어, 어떻게 해야 구해, 용서해 주실 거예요? 죄송해요…….”
“뭘 잘못했는데?”
“미, 밀친 거랑, 눈 뜨지 말라고 했는데 뜬 거…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거……!
“저, 집, 집 가고 싶은데… 저 돈, 돈은 없는데 몸은 튼튼하거든요. 몸으로 때워서 갚으면 안 될까요? 그래도 무상 노동이지, 노예는 안 돼요.”
“뭐?”
“인어들은, 인간들 노예로 부린다고 하던데…….”
“누가 그래?”
“사람들이… 사람들이 다…….”
“허…….”
데아는 연가을이 갇힌 방파제 근처에 쭈그리고 앉았다. 연가을은 방파제 틈에서 제 힘만으로 버티느라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연, 연가을이요. 그런데 저 팔 아픈데 끌어올려 주시면… 흐으, 아 아니에요. 가만히 있을게요…….”
“인어들이 인간들을 노예로 부린다는 말이 유명해? 널리 퍼졌어?”
“네? 네…….”
“또 뭐가 있어, 식인 한다는 말도 돌아?”
“어……? 식인, 안 해요?”
“으음…….”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단순히 인간과 인어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생긴 골일 줄 알았는데, 이런 헛소문까지 퍼져 있다니. 이건 단순 적의를 넘어선 혐오의 시작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아무리 인간들이 인어를 잔인하고, 혹독하게 죽여도 모든 것이 정당화가 되는 것이다.
“하긴 늘 그랬지. 나도 그랬고.”
“네?”
“나는 이데아야.”
데아는 인간들 사이에 퍼진 인어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데아는 연가을의 얼굴 앞으로 훅 고개를 속여 속삭였다.
“샤샤 헌터도 맞고, 인어도 맞아. 오랜만에 여기에 나온 건데 바로 일에 휘말렸어. 아무한테도 안 들켰었는데…….”
“제, 제가 처음이에요?”
데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응. 이제까지 내 정체를 안 사람은 다 죽였거든.”
연가을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물론 장난이야.”
그러나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놀리는 맛이 있군.
“살려 주세요. 저, 저 정말로 입 무겁거든요. 친구들 비밀도 혼자만 알고, 고민 상담도 잘 들어 줘요. 저 비밀 잘 지키는 걸로 유명해요.”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말… 나도 그런 말을 믿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더라고?”
“절, 절 따라다니면 되잖아요. 네? 저를 감시하세요……!”
연가을의 눈에 절박하게 빛났다.
“아주 졸졸, 질긴 찰거머리처럼!”
‘얘는 입조심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아니, 물론… 귀찮으시다면 어쩔 수 없는데……. 그냥 절 보내 주셔도 되는데…….”
“오늘 일 있어?”
“네? 오늘이요? 헐, 헐! 지금 몇 시에요?”
“오전 아홉 시.”
“저 알바 가야 하는데! 오픈인데!”
“어… 알바 중요하지. 그치.”
인어도 상도덕은 있구나!
“요즘 시급은 몇이야?”
“…만, 삼천, 삼백, 오십 원이요”
13,350원?
“많이 올랐네? 괜찮다. 주 5일 네 시간씩만 일해도 달에 백만 원이 넘잖아.”
“그건 그렇죠. 그런데 요즘 흉흉해서 알바 자리 진짜 없어요. 취업보다 알바 구하기가 더 힘들거든요. 그래서 저 가야 하는데, 일 있으면 보내 주시는 거 맞죠……?”
사회생활용 미소가 자연스럽다는 것.
그건 연가을의 가장 큰 무기였다.
“아니. 빼.”
연가을의 미소가 그대로 축 처졌다.
데아는 한쪽 손으론 방파제 사이에 빠진 연가을의 손을 잡고, 다른 한쪽 손으론 허공을 그었다.
“어? 어? 저거 게이트? 게이트 아니에요? 저 어디로 가요? 네?”
하지만 데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렇게 연가을은 데아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혀 게이트 안으로 던져졌다.
◈ ◈ ◈
“뭐야. 전에 그 인간이네?”
게이트를 훌쩍 뛰어 넘길래 이제 정말 꼼짝없이 먹혀 죽는구나 싶었는데…….
웬걸, 안에는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 여기 어디에요?”
“내 섬.”
“아, 재벌이셨구나…….”
‘헌터고, 인어고, 재벌이고… 신분이 많으시네요…….’라고 힘없이 중얼거린 연가을이 비척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늘에 떠있는 따사로운 해,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파도의 색. 물이 아닌 조각된 보석에 가까운 바다의 모습에 연가을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제가 헌터가 아니라서요. 던전 안에는 영상으로 보기만 했지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는데, 원래 이렇게 예뻐요? 와… 진짜 너무 아름답다.”
“데아 언니가 너 끌고 왔어?”
“하, 깜짝이야!”
눈앞의 풍경에 감탄하던 연가을은 근처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연가을은 입을 크게 벌렸다.
“어? 어? 이위로 헌터 아니에요? 그! 헐! 인간으로 속이고 잠입한 인어!”
“뭐야, 날 알아보네? 아직도 나 유명해?”
“당연하죠! 아직도 팬클럽 있는 거 알아요? 사방팔방에서 욕을 다 집어먹고 있지만!”
“하, 잊히지 않는 삶이란 괴로운 거구나.”
이위로가 과장되게 눈물을 닦는 사늉을 했다.
“그런데 윌로, 자잔은 어디 있어?”
“아 자잔은…….”
장난을 치던 이위로는 곧 데아의 물음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에 어딘가 미심쩍은 느낌이 든 데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잔 어디 있냐고. 같이 돌아간 거 아니었어?”
“안 그래도 말 하려고 여기 서있던 거야. 자잔은…….”
“자잔은?”
“그게…….”
이위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납치당했어……!”
“뭐?”
◈ ◈ ◈
사건의 요약은 이랬다.
어둑한 밤, 해일이 모두의 이목을 앗아간 순간을 타 이위로는 자잔을 데리고 언덕의 뒤로 향했다.
“잠수해서 더 뒤쪽으로 가자.”
―응.
게이트의 빛은 밝기 때문에, 밤이라면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야 했다.
그렇게 헤엄치고 걸어가길 수분, 적당한 골목 뒤를 찾아냈다.
―먼저 들어가.
“알았어.”
이위로가 창 안으로 다리를 딱 디딘 순간이었다. 둔탁한 악력이 느껴지더니, 이내 강제로 누군가 끌려가는 소리, 옷깃이 스치고 바닥을 질질 끄는 소음이 들려왔다.
―이, 이 새끼들 뭐야!
본능이 이위로에게 경고했다. 소리 지르지 마.
그대로 게이트를 없앤 이위로는 벽에 턱 등을 기댔다. 자잔이 보이질 않았다.
‘그들을 쫓아가야 해.’
높은 민첩과 은신은 이위로의 특기였다. 조용히 살금살금 마력을 쫒아가길 몇 걸음. 이위로는 검은 자동차를 마주했다.
‘어?’
그 차 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뭐, 무슨, 어?
거대한 장정들에게 끌려 자동차 속으로 끌려가던 자잔 또한 눈을 크게 떴다. 차 안에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칸나니아였다.
“오랜만이군, 자잔.”
칸나니아가 섬뜩하게 웃었다.
“기절시켜.”
―이, 무슨……!
퍼억!
자잔의 몸이 축 처졌다. 아가미가 있을 부분을 손으로 꽉 누르고 손목을 꺾어 먼저 제압한 것이, 꼭 인어의 약점과 자잔이 가진 능력을 전부 간파하고 일을 벌인 듯 했다.
‘나까지 잡히면 노답이다.’
이 상황을 이데아에게 전해 줄 사람이 하나라도 필요했다. 더군다나 이위로는 칸나니아를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와, 망했네…….’
주변을 수색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차량은 그대로 쾅! 문을 닫고는 길을 떠났다.
◈ ◈ ◈
홀로 남은 이위로는 숨을 몰아쉬며 태초의 섬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지금 상황이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닥치고 있자 주의의 연가을을 제외한 둘 사이에 서늘한 기류가 맴돌았다.
“하아… 돌아버리겠네. 왕궁에 다녀올게. 윌로, 너는 저 사람 아무 곳에도 못 가게 감시해. 곧 올게.”
“잠시만요!”
데아가 우뚝, 걸음을 멈추자 연가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다다 말했다.
“저 엄마한테만 어디 간다고 말하고 와도 될까요?! 제발!”
“어?”
“제발! 여행 다녀온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할 테니까 제발요. 제발. 저희 엄마 저 24시간 안에 안 들어오면 실종 신고 하세요!”
인어를 무서워하는 것치고는 꽤나 당돌한 언행이었다.
멋대로 던전 안에 내던져진 주제에 부모님이 걱정하니까 말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하다니……. 타당한 이유다.
“윌로, 다녀와.”
“네. 알았어요. 야, 인간 일어서. 가자.”
◈ ◈ ◈
“자잔이 칸나니아에게 납치요? 칸나니아가 왜 그랬을까요? 다른 1세대나 제국 핵심 2세대도 아니고, 하필 자잔을. 트리야가 제왕으로 있을 때에도 둘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그건 또 흥미롭네요.”
“농담 아냐.”
“뭐… 네. 당연히 지원해 드려야죠.”
집무실에서 깃펜을 사각사각 움직이던 피파글랜이 싱긋 웃었다.
“빨리 움직이죠. 시체라도 가져와야 하니까요.”
“자잔 아직 안 죽었어.”
“확신하세요?”
“칸나니아를 한두 번 봐? 영향력이 없어도 자잔은 2세대야. 인간형에 가까운 인어는 좋은 실험 재료이자 인질이야. 과연 그냥 죽일까?”
“오호.”
탁, 피파글랜은 우아하게 일어서 문을 열었다. 대기 중이던 간부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림자들을 데려와.”
그림자들은 은신에 특화된 간부들의 속칭이었다.
피파글랜의 협조로 인간계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 인어 두 명이 선출되어 인간계로 자잔을 구하기 떠났다.
“저 둘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데아의 직감은 맞아 떨어졌다.
주군이 직접 나서는 건 절대로 안 된다는 피파글랜의 고집 때문에 애타게 소식만 기다린 지 1주일. 피폐한 모습의 인어들이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많았다.
첫째, 지식을 알고 있는 것과, 경험이 있는 것은 달랐다. 인어들은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걷다가 교통사고가 날 뻔했다며 울먹였다.
둘, 단서라곤 없었다. 그들은 유동 인구가 많은 한 역에서 3일 내내 죽치고 앉아 있다가 자리를 뺏으러 온 노숙자에게 내쫓겼다.
셋, 그들은 자잔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게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자잔은 데아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호감을 사려 노력하지 않았고, 남들 또한 자잔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적의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폐위된 트리야의 유일한 권속
과거 트리야 하위 1공대 간부 자잔.
아무리 내부 고발자라는 히든카드가 있어도 자잔이 노력하지 않으니 평은 자연스레 나빠졌다. 정신을 차려 보자 어느새 자잔은 ‘달콤한 즙을 빨았던 간부 주제에 태초의 최측근에 올라간 얌체’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구출대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참사가 벌어졌다. 최소한의 의무만 설렁설렁 하다가 복귀하는 일이 그 후로 두 번 더 벌어지자 데아는 결국 피파글랜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가지 않아야 할 이유 500개 대.”
“하나, 주군에게는 모든 인어의 존속이 달려 있습니다. 둘, 그 어느 신이 간부 하나를 구하기 위해 친히 움직이신 답니까? 셋, 인간계에 주군은 얼굴이 알려져 있습니다. 넷, 칸나니아가 목적으로 삼는 건 주군이죠. 다섯, 척 봐도 함정이죠. 여섯, 이유를 불문하고 위험한 곳에 주군을 또 내몰 수 없습니다. 일곱―”
“미치겠네.”
“더 말할까요? 일곱, 주군은 지금…….”
“망할. 그만해. 그만해.”
데아는 손을 털었다.
그러나 의지까지 턴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얼굴이 알려져 있는 건 변환석을 착용하면 돼. 그치? 그리고 칸나니아는 내 적수가 못되고.”
“네.”
“그리고 어느 신이 간부 하나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냐고? 그러는 너는 왜 신 말에 거역하는데?”
“요새 말솜씨가 느셨군요.”
“피파글랜. 나는 상대가 자잔이 아니라 너였어도 구하러 갔을 거야.”
두 눈동자가 마주했다.
“왜 당연한 말씀을 그렇게 무겁게…….”
“…….”
“감동을… 제가 여기서 받아야 했나요?”
데아는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아무튼, 나에게는 모든 인어의 존속이 달려 있다고 했지. 맞는 말이야.”
“그러면…….”
“그러니 그걸 끼고 갈게. 해룡의 반지. 내가 치명상을 입었을 때, 곧바로 해룡이 내 위치와 상태를 아는 거 있잖아. 해룡은 항상 제국 주변에 있을 테니까 바로 너에게 알리기에도 편할 거야. 괜찮지?”
“하아… 그건 ‘치명상을 입었을 때’ 알림을 주는 반지죠.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있는데 왜 인간계로 가십니까?”
“뇌만 무사하면 되잖아.”
뚝, 피파글랜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내가 도착했는데 죽었다면, 머리를 갈라 뇌를 빼내 가. 그걸로 태초는 안전해.”
그렇게 말하는 데아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 어떤 위화감도 눈치채지 못하는 말간 얼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파파글랜은 느리게 잡았던 손을 놓았다.
“주군.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