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두 번 다시 이런 심부름 안 해!
“와! 튜브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이위로가 만든 창을 훌쩍 뛰어넘은 자잔은 튜브를 백사장 위로 퍽 던졌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놀고 있던 인간들의 해변과 달리 한적한 이곳은 데아가 지난 5년 동안 살았던 섬이자 인어들의 랜드마크 ‘태초의 섬’이었다.
“아니, 근데 2세대 놈. 너는 분명 튜브 가지고 안 논 다며. 그래서 나랑 데아 언니만 놀려고 5만 원만 준건데 갑자기 왜 끼어들어? 네가 보기에도 재밌어 보이기는 했나 봐?”
―그, 그냥, 그냥 맘이 바뀌었어. 왜! 그리고 3 더하기 3은 6아니야? 튜브 두 개에도 5만 원은 부족했었거든?
“자잔. 마실 건 안 사왔어?”
―너가 사와!
인어들의 랜드마크였지만 오늘 태초의 섬에는 데아와 이위로, 그리고 자잔밖에 없었다.
5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데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오리 튜브 하나를 잡고는 허리에 끼웠다. 백발이 바람에 얕게 흔들렸다.
“나 예전에 헌터일 때도 바닷가에는 놀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어서 튜브를 타고 재밌게 놀고 싶었어. 그런데 이미 얼굴이 다 알려져서 인간계에 용품을 사러갈 수조차 없네…….”
그 말에 마음이 찡해진 자잔이 스스로 인간계 심부름꾼을 자처한 지 5년. 자잔은 과거의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질식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그때 한 번인 줄 알았지. 겨울 썰매, 스키 용품 대여에, 가을 옷이랑 고구마 택배를 받아오게 시키고, 봄이면 딸기를 키우자고 하도 난리를 피워서 모종에 화분에 삽에 영양제까지 받아온 게 벌써 5년째야! 너 처음에 말한 것도 이거 노리고 한 거지?
“무슨 말? 자잔. 너 튜브 허리에 끼고 이리 와봐. 내가 재밌게 해줄게.”
―또 말을 돌리려고…….
자잔은 눈을 부라리면서도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잔이 가까이 다가오자 데아는 손가락을 휙, 휘둘렀다.
―어, 어?
“뭐야! 나도 낄래!”
파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잔잔했던 파도가 크게 일렁이더니 강력하고도 강한 파도타기가 완성되었다. 위 아래로, 그리고 좌우로 거침없이 요동치는 시원한 파도의 흐름이 대단했다. 해파리처럼 둥실둥실 몸을 맡기게 된 자잔의 기분이 금방 풀렸다.
―샤샤, 더 해줘!
“데아 언니 조금만 더!
“더 가까이 와봐.”
파도가 후욱! 크게 일어났다가 꺼졌다. 이위로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시원한 바람에 쾌적한 휴양, 그러나 데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자잔. 이번이 마지막이야.”
―어? 뭐가?
“인간계로 너 심부름 보내는 거. 이제 그냥 아예 다른 인어 시켜서 다 사두려고. 진작 그렇게 할 걸 왜 이제까지 번거롭게 왔다 갔다 했는지 몰라.”
―그래? 상관없는데. 한 번만 더 다녀오면 안 될까? 바로 옆에 음료 파는 곳이 있는데 맛있어 보여서.
데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러면 튜브 대여 반납하면서 다녀와. 하지만 조심해. 이상하게 느낌이 별로야.”
“언니 시중에 파는 블루 레몬에이드 음료 먹고 싶다며. 그래서 자꾸 왔다 갔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안 돼. 너희들 인간계 소식 들었어?”
자잔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지만 이위로는 합, 입을 다물었다.
“탑 형식의 게이트가 나타났어. 피파글랜도, 윌로도, 나도 연 창이 아니야.”
―그렇다면……!
“칸나니아의 짓이지. 과정이 예측되지는 않지만 목적은 아무래도 제국의 몰살인 모양이지. 귀엽다 귀여워. 그런 깜찍한 수를 다 쓰고.”
데아는 튜브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직접 제국에서는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인간들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뒤에 숨어 이득만 볼 생각인 거야. 뻔하지.”
“언니는 그걸 언제 다 들었대. 피파글랜 언니랑 므아나 언니는 언니한테 이 사실을 전달할까 말까 아직까지 고민 중이던데.”
“나한테 눈과 귀가 그것만 있는 줄 알아?”
저 멀리 하급 인어 떼가 뿌우우― 울었다. 이위로가 알 만하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그것참, 빠르네.”
5년의 시간이 지났다.
한국에서는 강산이 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0년이라고 했지만, 이위로가 보기엔 5년 안에도 충분했다. 처음 태초의 기억을 흡수하고 잠시 혼란스러워 했던 이데아가 확실히 변했으므로.
이데아는 여전히 말이 조금 험하고, 가볍고. 장난기가 많았지만 동시에 성숙했으며, 가끔 오래된 생물의 눈을 할 줄 알았다. 가끔 앞뒤 상관없는 말을 툭 뱉어서 주변을 당황시켰지만, 그게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생각이 아주 깊고 깊은 어린아이 같았다.
툭, 부모님의 값진 귀중품을 쳐 파도 속에 사라지게 놔두고는 ‘이런. 정말 가버렸네.’하는 악의 없는 어린아이.
그래. 그건 확실히 이 전대의 태초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말대로라면 우리가 공격받을 게 뻔한데.”
―사실 밖에 나가서 인간들이 잠깐 하는 말을 들었어.
자잔은 튜브 속으로 쑥 모습을 감췄다.
―인어들을 아주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대로야. 언니, 지금 정정하려고 해봤자 인간들은 우리 말을 듣지도 않을걸. 이 상황에서 설마 직접 나가서 해명하려는 건 아닐 테고.”
“당연하지. 그나저나 윌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데아는 가끔 이위로를 추궁할 때 그렇게 부르곤 했다.
“지난 며칠간 밤마다 밖에 나갔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응.”
“탑 게이트 포세이돈이 분명 우리 세계하고 이어져 있는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 몰라서 찾고 다닌 거고?”
“…….”
“그런데 못 찼았다는 거지?”
자잔이 옆에서 혀를 찼다.
“곧 찾을 거야. 분명 칸나니아의 권속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거든? 5년 전부터 야금야금 그 권속들이 사라지고 있잖아. 하지만 수가 많으니까 이 세계가 아~무리 넓고 바다도 많고 산도 많고 대륙도 많다고 해도,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데아는 눈을 감았다 떴다. 푹 눌러쓴 밀짚모자 아래, 하얀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바다와 가까운 곳에는 없는 것 같아.”
태초는 인어이고, 마력이며, 동시에 바다였다.
아직 천천히 힘이 돌아오고 있는 시기라 100%의 힘을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데아는 명실장부 유일한 태초다. 그런 데아의 마력과 힘이 맞닿아 있는 바다 근처에서 그런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면 데아가 모를 수 없었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거나, 바다가 아닌 호수나 늪지대에 있거나. 둘 다거나.”
―그래서 어떡하려고?
“어떡하긴?”
아직 적도 숨을 죽이고 있는 시기였다. 데아가 해야 할 대처는 오직 하나.
“일단 놀고 생각할래.”
적이 목덜미를 드러내는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해 두는 것뿐이었다.
◈ ◈ ◈
“어어. 안녕하세요!”
연가을은 고개를 들였다. 오후에 왔던 그 잘생긴 남자가 튜브를 반납하려고 왔다. 이번에도 여전히 말없이 튜브를 탁 내려놓은 남자는 고개를 뒤로 쭉 빼서 주변 매장을 두리번거렸다.
“보증금 6만 원 여기 있습니다.”
남자는 초록색 지폐를 쏙 챙기고는 자리를 옮겼다.
튜브 반납하러 오는 손님도 없고, 할 것이 없기도 해 연가을은 멍하니 그를 지켜봤다. 튜브를 반납한 그가 향한 곳은 외국인에게 불친절하고 바가지가 심하기로 유명한 한 노상 과일음료점이었다.
“불안한데…….”
“어, 누나. 교대 시간이에요! 제가 정리할게요. 퇴근하세요.”
“아, 지금 일곱 시 아니야?”
“일곱 시 반이에요. 그냥 퇴근하세요. 어차피 사람들 반납은 아홉 시쯤 되어서야 하러오니까.”
“그래. 그럼 나 퇴근할게!”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게 주인이 남자에게 손가락 다섯 개를 쫘악 펼쳐 보이고 있었다. 음료 한 잔에 5천 원이란 뜻이었다.
참고로 저 음료의 정상가는 2천5백 원이다.
하지만 그것도 모르는 순진한 남자는 그저 품을 뒤적거려서 1만5천 원을 넘겨주고 있었다.
“그… 저, 이거 한 잔에 2천5백 원이거든요.”
―뭐?
“이, 이… 남의 장사 방해할 일 있어?!”
연가을은 그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쏙 끼어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파악한 자잔이 가게 주인을 향해 인상을 확 찌푸리자 가게 주인이 윽, 입을 닫았다.
“아, 알았어. 안 팔아. 안 팔아! 안 팔 거니까 나가!”
그러나 자잔의 손에 꼬옥 쥐어진 세 잔의 음료를 뺏어가지는 못했다.
결국 무상으로 음료를 받은 자잔과 연가을이 휘익 밖으로 내던져졌다.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저기 다음부터는 가지 마세요. 바가지 씌우기로 유명하니까.”
―근데… 이 인간은 왜 끼어든 거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래도 도움을 준 인간에게는 예의를 지키라고 5년 동안 혹독하게 배웠으므로 자잔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쌩 등을 돌려 나아갔다.
“어…….”
‘…됐나? 그냥 마저 퇴근이나 하자. 오늘 한 사람을 구했다!’
연가을은 내심 뿌듯해하며 신발 속의 모래를 툭툭 털고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띠링, 문자가 왔다.
[연가을 씨.내일부터.안.나오셔도됩니다.뒷정리를. 하나도.안하고.가셨네요.이번주급까지만.드리겠읍니다.수고하셧읍니다.]
“뭐?”
튜브 대여점 사장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CCTV를 달아 알바생들을 지켜보는 게 취미인 사장 놈이 방금 자신을 해고한 것이다. 아니, 저녁 알바가 해주겠다고 해서 간 건데 왜……!
화가 나서 전화를 걸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턱! 누군가 연가을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 뭐……!”
덩치가 큰, 모르는 남자였다.
“아까 저 남자. 아는 사이?”
“네?”
저 남자에게 번호를 따려는 사람들의 수작질이거나, 연예계 스카우터의 농간이거나, 사이비 전도거나…….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누구세요? 왜 그렇게 다가오세요?”
“아는 사이?”
“거기서 멈추세요. 다가오지 마세요.”
“아는 사이?”
사람에게는 촉이 있다. 특히 철저한 밑바닥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탑재되는 예민한 촉이, 지금 연가을의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돌아갔다.
‘아, 불길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모자를 벗어. 얼굴 보여. 그리고 이름. 저 남자. 아는 사이?”
“뭐?”
오후 여덟 시, 여름.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바다의 짠 내가 후각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 음료를 냅다 바닥에 버린 공룡 캐릭터 수영복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연가을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뭐 해, 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