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2부】
“사해의 신을 죽일 수는 있습니까?”
태초는 죽지 않는다. 죽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러나 칸나니아는 거짓을 말했다.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 헌터의 인력으로는 매우 어려워. 그렇기에 내가 온 거 아닌가?”
“결국 같은 인어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나 연구 소장은 그 대답이 도리어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거 좋네요. 너무 쉽게 죽어버리면 이 포세이돈 탑도 끝나는 거잖아요? 그러면 각성자들도 더 유지되지 못하겠죠. 우리의 적은 아주, 아주 강력하되, 무력한 존재여야만 해요. 인간에게 반격은 하지 못할 만큼 안전하지만 아주 질겨야 하죠. 그래야 수십 년이고 길드가 건재하고, 우리가 원활하게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요.”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기쁘군. 하지만 거창한 착각을 하고 있는데…….”
칸나니아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간 우리가 전멸이다.”
탑 포세이돈이 개방된 지 1주일. 칸나니아는 자신의 가장 멍청하고 효율적인 조력자를 내려다보았다.
“뭐, 됐어. 소형과 중형 길드에게 포세이돈 공략의 우선권을 줘. 되도록 길드 여파는 피하도록.”
“네? 왜죠?”
여파에는 둔갑한 인어, 므아나와 움이 있다. 그러나 칸나니아는 구태여 그 사실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다. 저 자신이 이 사실을 말하면 언젠가 소문은 퍼지게 된다. 그러면 그 사실을 눈치 챈 므아나가 소문을 역추적해서 자신의 은신처를 알아낼 수도 있다. 이미 어느 정도 눈치 챈 것 같지만…….
‘굳이 확실한 덜미를 잡힐 일은 피하는 게 좋지.’
포세이돈이 세상에 알려진 직후, 므아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순 없었다.
“여례아가 가장 큰 협력 길드라고 하지 않았나? 적대 길드를 먼저 끌어들일 이유는 없지.”
“하지만 최대 투자자 영영 헌터가 그곳의 부길드장인데요.”
“핑계를 대서라도 우선권을 뒤로 미뤄.”
“…뭐, 일단 알겠습니다.”
연구 소장은 별 의심 없이 끄적끄적 뭘 적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례아 산하에 중소형 길드가 많이 있습니다. 포세이돈의 유명세를 더 떨치게 하기 위해선 역시…….”
“전멸.”
“역시군요. 그럼 가장 약하고 수가 적은 길드부터 차례차례 공략권을 위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좋다고 달려들 겁니다.”
연구 소장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 ◈ ◈
“아, 날씨 진짜 좋다…….”
파도가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고, 푸른 대앙이 한눈에 담기는 아름다운 해변가. 그곳에서 연가을은 호스를 튜브에 끼우고 있었다.
연가을은 여름마다 개장되는 해수욕장의 튜브 대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상체보다 큰 빵빵한 오리 튜브 두 개를 들어서 손님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탄산수를 쫍 마셨다.
“재밌겠다…….”
연가을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하나뿐인 언니는 연가을이 네 살 때 집을 나갔다. 요즘 TV에 종종 나오던데, 이름을 보니 성에 이름까지 싹 바꾼 모양이었다.
그러나 연가을은 그런 언니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언니가 해준 말을 기억하니까.
“가을아. 언니가 돈 많이 벌어서 올게. 좀만 기다려. 알겠지?”
그러나 그 이듬해, 연가을의 아버지는 도박 빚을 그대로 안겨 준 채 사라졌다. 남은 건 다섯 살 연가을과 그의 어머니 이명지 씨. 그리고 빚쟁이들이었다.
상속 포기를 알기엔 모두가 무지했던 때였다.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나가야 해. 가을아, 엄마 말 알아들을 수 있겠지?”
“어, 언니는?”
“지금 그게 중요하니? 가은이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잖아!”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주소를 옮겼다. 모녀는 마을에서 증발했다. 그렇기에 언니가 아직까지 자신과 엄마를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간신히 막아 내는 파라솔 아래, 연가을은 튜브 호스를 바꿔 끼웠다. 튜브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야 이거 봐. 미친, 인어 공략 이번에도 실패했다는데? 전멸이래.”
“또? 아직 2층이잖아, 그 안에서도 게이트가 엄청 많다며? 그런데 그렇게 성적이 지지부진해서 어떡해?”
“소형 길드가 공략 시도 했대.”
“왜 소형이 가? 1층처럼 대형 길드가 한번에 처리해 주면 안 돼?”
저 멀리서 돗자리를 깔고 앉은 휴양객들이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12명의 모든 헌터가 전멸한 안타까운 소식에, 네티즌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이거 아마 자업자득일 걸? 대형 길드가 한번에 싹 공략해 버리면 자기네들한테 떨어질 게 없으니까. 일부러 낮은 층에서는 소형 길드한테 우선권 달라고, 소형 길드들이 단합해서 난리 피웠을 거야.”
“와,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미친, 사해의 신인가 인어들의 왕인가 하는 그 인어가 침략하기 전에 15층까지 공략해서 막아 내야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연가을은 눈을 크게 떴다. 뉴스 속, 자신의 언니가 나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묶고는 안경을 쓴 젊은 여자. 자신과는 달리 인상도 날카롭고 키도 큰 그의 아래로 직책이 슉 지나갔다.
MBL 연구 소장 정소진.
MBL이라면 대한민국을 너머 세계에서 인정하는 거대 연구소였다. 인어들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연구한다던 거대 연구 시설. 그곳에 소속되기만 해도 엄청난 출세임이 당연한데 자신의 언니는 그곳의 탑, 연구 소장이었다.
‘돈 많이 벌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많이 버네…….’
하지만 연가을은 언니를 찾아가거나, 주변인들에게 구태여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잘나가는 언니에게 걸림돌이 될까 무섭기도 했고,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 혹시 언니가 모른 척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 두려웠다……. 속으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언니!’라는 말에 저기 있는 정소진 연구 소장이 ‘모르는 사람입니다. 끌어내세요.’ 할까 봐 두려웠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땐 정말 구제의 빌미도 없어 처참하게 무너질 것 같아서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각성자가 되면… 권도언이나 백리서, 여기은, 차현 헌터처럼 당당해지면 언니가 모른 척 안 하지 않을까…….”
똑똑.
그때 누군가 탁자 위를 두드렸다. 연가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튜브 대여해 드릴…….”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세히 보니 굳은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해변을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입을 가리고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와, 오늘 물 좋네.”
“미친, 야 존나 잘생겼어.”
말 한마디 없이 탁자를 두드려 자신을 깨운 손님은 키가 크고 이국적인 남자였는데, 물에 젖어 살짝 굽이지는 짧은 머리카락 아래 비치는 얼굴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잘생겼다는 말로 한정 지을 수 없는 미모, 주변의 푸른 해안 절경을 그대로 느와르 흑백 사진으로 만들어 버리는 분위기의 소유자, 외국인인 건지, 염색을 한 건지, 짙은 녹색 머리카락에 어둑한 녹색 눈동자를 가졌음에도 하나도 어색하거나 튀지 않았다.
“그… 튜브 대여해 드려요?”
그러나 연가을은 이내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가 말없이 손가락으로만 이거 저거 튜브를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아… 외국인이신가? 유 캔 스픽 잉글리쉬?”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연가을은 ‘엄마야…’하며 슬쩍 뒤를 빼고는 지정한 튜브를 가져왔다. 그리고 영어로 가격과 보증금, 반납 시간을 알려 주자 남자가 수영복 바지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냈다. 빳빳한 노란 지폐였다. 아 다행이다. 영어 할 줄 아는구나. 그런데…….
“몇 개 대여 해드려요?”
연가을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그에게 영어로 물었다. 남자는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척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들었다.
“세 개요?”
남자의 표정이 묘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해하는 것 같기도, 그럼에도 곧 놀 수 있단 희망에 괜히 기뻐하는 것도 같았다.
“세 개면 5만 원으론 부족한데…….”
각자 만 원에 보증금만 각 2만 원이니 총 9만 원이 있어야 했다. 연가을은 이 노란 지폐를 한 장 더 가져오라고 했고, 당황한 남자는 잠시 지폐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휙 돌려 바다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아, 아, 기다리라고요?”
끄덕끄덕.
그리고 남자는 쌩하니 해변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등 근육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수영복 귀엽네…….”
분위기 깡패 미남이 입고 있는 수영복은 귀여운 초록 공룡이 그려진 수영복이었다. 한창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던 만화 캐릭터이기도 했다.
“얼굴에 낚여서 수영복을 못 보다니.”
아까 그 남자 봤냐며, 수영복까지 귀엽지 않냐며 깔깔 웃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가득 들렸지만 무시했다.
남자가 돌아온 건 10분 후였다.
10만 원. 자랑스럽게 지폐를 가져온 남자가 빵빵한 오리 튜브 세 개를 팔에 끼고 후다닥 달려갔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저기 해안가 쪽 아닌데…….”
◈ ◈ ◈
자잔이 휙 창을 넘어 도착한 곳에는 두 명이 저들끼리 웃으며 놀고 있었다.
―샤샤!
짧은 머리카락을 반묶음으로 올려 묶은 이데아 또한 그곳에 있었다.
빛에 따라 색이 변하는 투명한 눈동자가 환하게 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