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38화 (138/223)

※ 138화

새로 도착한 섬은 소박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끄러운 돌길과 눈이 즐거운 언덕(백리서와 헤타가 직접 와서 공사했다고 했다) 잘 가꿔진 정원과 밤이면 자동으로 켜지는 발광석까지. 그건 외딴 무인도라기보다는 대부호의 섬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섬에 딱 하나 있는 건물은 대저택이었다. 하얗고 화사한 아름다운 건물이 번쩍이며 데아를 맞이했다.

“뭐야, 이 르네상스시대에나 유행했을 것 같은 성은,”

“저택이에요.”

“성이잖아. 저게 어딜 봐서 집이야?”

심지어 안에는 시종들도 있었다. 얼씨구? 전원 3세대로 이루어져 있는 인어들은 호들갑을 떨며 데아를 맞이했다.

―태초 님의 방은 5층입니다.

“…엘레베이터 있어?”

―네?

“그치, 있을 리가 없겠지.”

데아는 헉헉거리며 5층까지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맞이한 건 누가 봐도 고위 귀족의 방 같은 으리으리한 빈티지 고딕풍 인테리어였다.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지향했던 데아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방이기도 했다.

“이거 누가, 하… 누가, 인테리어를.”

―네?

“아냐. 아니다. 분명 피파글랜이겠지.”

너의 취향을 존중해 주마. 데아는 그날 눈물을 머금고 나오는 야식과 각종 시중을 받고는 잠에 들었다. 꼴에 음식은 너무 맛있고 침대는 너무 편해서 조금 행복해졌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의 아침, 데아는 자신의 신전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물을 뱉었다.

“신, 뭐?”

―제, 제왕이 싫으시면 신이라도 하라고…….

“뭐?”

데아는 창을 열고 도망치려다가 이위로에게 저지당했다.

“아, 왜, 왜 가! 장례식도 조용하게 했잖아! 꽃도 던졌잖아! 신전이 싫어? 모습은 봤고? 엄청 고급스러워!”

“아니, 왜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한테 신이라고 해? 내 항마력을 시험하고 싶었어?”

―샤샤, 사람 아니고 인어…….

“에이, 다들 알지. 그 신이 그 신이 아닌 거. 그냥 상징 같은 거야. 피파글랜 언니한테 편지 왔는데, 볼래? ‘남쪽 섬으로 휴양을 떠난 사해의 신에게’.”

“악, 아악! 악!”

데아는 이를 따지기 위해 곧장 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국 맞은편, 암석 언덕 위에 우뚝 세워져 있는 웅장하고 거대한 하얀 신전과 제단에 값이 되는 재화를 올려놓고 축복을 비는 인어들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치듯 돌아왔다.

“피파글랜은 뭐가 문제야? 왜 1세대 인어는 정상이 한 명도 없어?”

“엥. 데아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태초가 일궈 놓은 망한 권속 농사.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역대급 흉작. 싹부터 글러버린 1세대 콩나물들.

데아는 쿵쿵거리며 저택을 활보하다가 이내 드높은 지붕에 올라 바닷속으로 다이빙했다.

첨벙!

한 번의 움직임에 변화한 하얀 꼬리가 햇살을 받고 반짝였다. 공기 방울이 부르르르 수직 상승을 하고, 파란 창공에 고개를 묻는다.

“원하지도 않는 자리에서 내려오렴, 트리야.”

문득 가장 최근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부서지는 동굴을 넘어 트리야에게 활을 겨누었을 때가 데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약점 파훼, 마지막 순간 트리야의 역린을 확인한 데아는 눈을 크게 떴다. 뜰 수밖에 없었다.

‘붉은 점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붉은 점은 자신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활을 당긴 자신의 손가락, 팔목, 어깨와 몸, 그 전신으로.

데아는 결국 항복하듯 웃었다. 맙소사, 트리야를 겨누었던 활 끝을 비틀 수밖에 없던 그의 역린. 그건 자신이었다.

◈          ◈          ◈

“여보세요?”

조금 어질러진 길드장실 안, 권도언은 전화를 받으며 느른하게 의자에 앉았다.

“괜찮다… 괜찮다라.”

―큰일을 겪은 직후니까 말일세. 물론 자네 길드는 이 난국에도 잘 활약하고 있지만…….

“안 괜찮으면 뭐, 어쩌겠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죽일 것들은 죽여야 하고.

권도언은 세 달 전, 이리나의 섬 위에서 백리서를 만났다. 정확히는, 제왕의 두 번째 가신 릴리므아나를. 이미 예측에 예측을 넘어 서로 확신까지 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불필요한 언쟁은 생략했었다.

“백리서, 너 연기 정말 잘하는구나?”

나를 이렇게 싫어하는데, 난 전혀 몰랐었네…….

본연의 백리서는 예상보다 훨씬 섬뜩했고, 날것의 사나움을 품고 있었다.

“데아 씨는 어떻게 됐어?”

네가 왜 인간 행세를 했는지, 어떻게 포위망을 다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목적이 뭐였는지, 목적은 이루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 그런 것들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권도언은 차분하게 우선 순위를 골랐다. 모든 의문은 불필요했다.

“알아서 뭐 하게.”

“크게 다친 걸 봤으니까. 상태는 어때?”

“…뭐?”

“설마 몰랐어?”

권도언은 사뭇 진지하게 당시의 상황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몸집이 큰 인어가 어떻게 거창을 들었는지, 이데아가 하영주를 감싸다가 어떻게 다쳤는지.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일은 생생했다.

웅덩이가 고일 정도로 떨어진 피 때문에 꽤나 참혹했던 실상을 묘사하자 백리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건 몰랐는데…….”

그 중얼거림에서 권도언은 기묘한 확신을 얻었다. 이데아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권도언은 이 모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몰랐구나? 이데아 씨가 말을 안 해줬어?”

권도언의 뺨에 볼우물이 패였다. 이데아는 확실하게 살아 있고, 모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를 몹시 벅차오르게 했다.

“넌 왜 왔어. 아직 인간 행세를 해야 하나?”

“하, 진짜… 왜 편지에 그런 말을 써서…….”

편지? 권도언이 중얼거리든 말든 백리서는 터벅터벅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너, 이쪽에 관심 많지?”

“이쪽?”

“바다에 사는 종족들. 인어들 말이야.”

“오…….”

흘러넘치도록 관심이 많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권도언은 일부러 다른 대답을 했다.

“그걸로는 부족한데…….”

“그래? 그러면 협상은 결렬이야.”

“들어는 보지.”

“그렇게 나와야지.”

백리서의 용건은 간단했다. 여파의 공격대장 헌터 릴림의 역할을 계속 이어 가는 것.

“자의로 하는 거 맞아? 마음에 안 들어 보이는데.”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권도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토악질이 나오도록 궁금한 인어들, 그 정상에 서있는 이데아에 대해 더 알기 위해선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래서, 이데아는?”

◈          ◈          ◈

‘이데아는?’

그것에 대한 해답은 최근에야 받을 수 있었다. MBL 연구 소장과 전화를 끊은 권도언은 곧바로 노망 난 노친네라며 신랄하게 욕을 뱉었다. 그 직후. 달칵, 문이 열리고 백리서가 들어왔다.

“영영 헌터한테 물어봤어.”

“답은?”

“의외였긴 했는데, 상황을 설명해 주니까 바로 알겠다고 하더라.”

“그래 보였지. 인어에 대한 적대감이 더 깊어진 것 같으니까. 그런데, 넌 아무 생각도 안 들어?”

하영주는 가끔 꿈을 꾸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원인 단 하나였다. 인어.

“너도 인어잖아.”

“그게 뭐?”

백리서는 특유의 무감각한 얼굴로 웃었다.

“상관있어?”

하영주가 분노하는 인어와 나는 다른 인어라는 뜻의 ‘상관있어?’가 아닌, 약하디약한 인간에 불과한 하영주가 분노하는 것이 감히 나에게 닿을 수나 있겠냐는 뜻의 ‘상관있어?’임을 바로 알아챈 권도언이 감탄했다.

“아, 미치겠네……. 그래서, 이데아 씨는?”

권도언은 백리서를 만날 때마다 이 질문을 던졌다.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무시하고 넘어갈 거라 생각해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 권도언의 예상과 달랐다.

“떠났어.”

“…어?”

“그 이상의 것은 나도 몰라.”

“뭐야, 너희 이전 대 제왕이라며. 네가 무사한 걸 보니까 혁명 비스무리한 건 무사히 끝난 것 같고. 즉위 같은 거 안 했어?”

“이리나 할멈이 너한테 너무 많은 것을 말했단 말이지……. 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입이 가벼울까.”

“노인이셔. 입조심해.”

“인간들의 기준에 맞추려 하지 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백리서의 나이가 더 많겠지.

“즉위는 했어, 피파글랜이.”

“피파글랜이라면…….”

예전에 데아와 함께 섬에 찾아왔던 안경을 쓴 인어다. SS등급 게이트의 보스 인어로 등장했던.

“그럼 이데아 씨는 자유의 몸이네? 이곳에 와도…….”

“생각 접어.”

백리서는 정리를 마친 차트를 휙 던지고서는 문을 달칵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이미 권도언에게 정체가 탄로 나 숨길 것이 더 없어진 백리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펀치 머신처럼 굴었다. 예고도 없이 훅훅 인외의 기량을 뽐낸다는 점에 있어서 더더욱.

“살벌하네…….”

문이 닫혔다.

◈          ◈          ◈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영생을 산다고 하지.”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불사(不死)는 할 수 있어도 불로(不老)는 할 수 없으니까.”

“오… 그건 처음 들어봤는데,”

즉, 늙되 죽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늙어진 몸으로 어떻게든 거동을 옮기며 끊임없이 살아갈 뿐, 젊음을 유지할 수 없다는 ‘손님’의 말에 연구 소장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저 인어는… 3세대 인어로군?”

자리에서 일어선 ‘손님’은 실험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차가운 수술대 위, 회색 머리 인어가 앞으로 저에게 일어날 비극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디서 구했지?”

“아하… 3세대 인어라? 인어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인가 봐요.”

“나보다 잘 아는 자가 있을까?”

‘손님’은 깊게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전등 아래, 화상으로 불든 얼굴 절반이 보였다. 얇고 길게 그어진 눈, 패인 뺨, 흉측한 화상도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릴 순 없었다.

“우리는 저 인어를 양분으로 연구를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던전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으니, 인공적으로라도 뭘 해야 하니까요.”

“인공적으로?”

“네. 이대로 각성자들이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요. 아, 물론 이건 우리만 원하는 게 아니랍니다. 수많은 분들이 이 실험을 응원하고, 투자하십니다.”

이유는 단순했다. 투자.

앞으로의 던전과 헌터의 가능성에 투자한 무수한 권세가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각성자의 몰락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이곳에 투자한 금액이 얼마인데!’, ‘어서 만든 무기들을 팔아야 해.’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인어는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창’이 열리기를 바라나?”

인어의 게이트를 다시 열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연구원들. 주군을 배신한 인어는 그들의 귀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창?”

“이곳에서는 게이트라고 부른다지.”

연구 소장은 화상을 입은 ‘손님’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손님’이 손가락을 훅 긋자 하얀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게이트다!’

“마, 맙소사. 당신은 누구시죠? 인간, 인간이 아니군요, 당신?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성함을 알려 주세요!”

“칸나니아.”

‘손님’, 칸나니아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대신 나에 대한 건 전부 극비로 해야 해. 알겠나? 그러면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지.”

“불사에 대한 비법도 알려 주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한 거고.”

연구 소장이 흥분해 발을 동동 굴렸다.

“혹시, 지금… 힌트라도 주실 수 있나요?”

“간단해.”

칸나니아는 훅, 고개를 속였다. 창을 이용해 제국과 인간계를 몰래 넘나든 지 몇 달. 제국의 소식은 시시때때로 받고 있었다.

“인어 제국의 존재는 아나?”

“제국이라면, 설마 그 소문의……!”

“역시 아는군. 그렇다면 쉽지.”

칸나니아는 휙, 게이트를 닫았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곳의 신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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