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리서 언니,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목구멍에서부터 턱 막혀서 내뱉어지지 않았다. 말이 막힌 이유는 간단했다. 첫 번째로는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고, 두 번째는 그를 리서 언니라고 부르기 어색해서였다.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뭐였더라.’
데아는 그에게 사형수들을 빼오라고 명령을 했고, 백리서는 따랐다. 그리고 하영주가 위험하다는 말에 ‘그게 중요한가요?’라고 되묻던 백리서의 오만하고 인간답지 않은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왜… 왔어요.”
“다행히 남은 흉터는 없더라고요.”
그림자가 정적처럼 웃었다. 데아는 무심코 옷을 확인했다. 언제, 배를 확인한 거지?
“아까 세상모르고 잘 때 확인했어요.”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갑자기? 이 새벽에?”
“권도언한테 전해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
“주군에게 치명상을 입힌 칸나니아의 상태는 멀쩡하던가요?
“…….”
“뭐, 그럴 리가 없겠지마는……. 다음부터는 다치지 마세요. 칸나니아는 제가 직접 찾아내 처리할 테니까.”
“…….”
데아는 잠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불을 박찼다. 이 어색하고 답답한 기류를 깨고 싶었다.
“저한테 할 말 없어요?”
“하얀 머리카락도 잘 어울리네?”
“그거 말고…….”
데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이제 멀쩡한 거 확인했으니까 됐죠?”
물을 마시러 간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데아가 침대 밖으로 나와 세 걸음 걸었을 때, 백리서가 웃었다.
“너무 티 나는 거 아닌가…….”
우뚝, 발이 멈췄다.
“주군, 제가 싫어요?”
상체를 적시는 달빛, 데아는 금안의 인어를 돌아보았다.
“저를 안 보고 싶어요? 수천 년의 기억을 되찾고도 그 찰나의 거짓말 때문에?”
“…기억은 찾았지만 그게 내 기억이라고 인식된 건 아니야. 그냥 정보 읽는 것 같다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기억은 하나둘 당시의 생생한 감정과 함께 데아에게 입력되고 있었다. 그래서 데아는 요즘 미치기 직전이었다. 완전한 태초의 자아가 불쑥 튀어나가기만 하면 헌터였던 ‘이데아’의 원래 자아가 저걸 믿냐며 거세게 발길질을 해댔다.
데아는 그 두 개의 자아가 적당히 섞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헌터로, 인간으로 지내온 성격이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요? 그건 몰랐네.”
“…….”
“그래도, 같은 길드에서 만난 정이 있는데 제가 어색해요? 존대 써서 그런가? 실체 하나 알았다고 제가 끔찍해졌어요? 그동안 속은 것에 대해서 화가 나요?”
“…….”
“그런데 전 멀리 피해 다닐 생각 없는데. 용서라도 빌까요? 하지만 윌로하고는 잘 지내면서 왜 저만 차별해요. 정말 존대가 어색해서 그런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길드 안에서도 존대 쓸 걸 그랬나 봐.”
“…….”
“하지만, 언니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어서…….”
백리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이 달빛을 차단했다. 그림자가 졌다.
“데아야, 반말이 익숙해?”
“…….”
“주군이 정해요. 저는 뭐든 따를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백리서는 데아의 어깨와 손을 잡아 다시 침대로 이끌었다. 가까스로 떨어지는 체온이 서늘했다.
“자꾸 나 모른 척하지 마. 나 슬퍼.”
얼마 지나지 않아 백리서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환했던 달이 사라지고, 새벽이 수평선 너머 가라앉았다.
◈ ◈ ◈
파란 하늘이 더 새파래지고,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지는 어느 계절. 데아는 문득 침실에서 일어나 짐을 쌌다.
이 날도 어김없이 새벽이었다.
―어디 나가려고?
새로운 소수 정예 1공대 간부이자, 데아의 전담 호위로 임명되었던 자잔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데아는 쓸 만해 보이는 것을 이것저것 인벤토리 안에 넣고 등을 폈다.
“나가려고.”
―어디로?
“외딴 섬에 가서 우선 터전을 잡고… 좀 시간이 지날 때까지 살아야지. 각오는 됐지?”
―왜?
“그냥.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고 싶어서.”
데아는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대외적인 활동에는 영 성향에 안 맞나 봐.”
그러나 자잔의 얼굴은 영 펴지지 않았다.
―그대로 떠나려는 거지? 창을 넘어서.
“뭐? 아니야.”
―위험해.
“알아. 그래서 게이트는 만들지도 않을 거고, 밖으로도 안 나갈 거야. 그냥 제국을 나가서 또 다른 섬에 가려는 거야. 여기 남아서 돌아다니는 땅 많잖아. 심심해지면 가끔 위장하고 제국 안으로 놀러오지 뭐.”
그러나 자잔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태초는 공백만으로도 인어 전체의 위기를 가져온다. 만약, 제국 밖을 나갔다가, 그러다 이전 대 태초처럼 죽기라도 하면?
데아도 스스로의 목숨을 위중하게 여기지 않고 죽어버린 태초를 욕한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 벌써부터 걱정을 하는 자잔의 태도가 이해가 가긴 했는데…….
“정말이라니까.”
―네가 왔던 인간계에 다시 나갈 생각은 아니지?
“절대 아냐. 나갔는데 만약 내가 인어라는 걸 알아채면 어떡해? 그러면 바로 사냥이지. 물론 내가 순순히 잡혀 주진 않겠지만.
―…….
“자잔, 나도 그 정도의 생각은 있어. 더군다나 칸나니아는 아직 잡히지 않았잖아. 내 목숨, 나도 귀한 줄 알아. 하지만 그건 알아야 해. 나 칸나니아 이긴 적 있어. 나 너보다 강해.”
백리서가 알려 준 전술을 활용하여 그의 복부에 경배를 찔러 넣었다.
“너도 봤잖아.”
―알지. 봤지. 봤는데…….
“안심해. 와, 안전하게 있겠다고 맹세까지 할게. 흠… 뭐에 대고 하지?”
―…한다며.
“뭐?”
자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 나를 가장 강한 인어로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데아는 모자를 툭 떨어뜨렸다.
―나한테 번영을 약속해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가?
느릿하고 또렷한 말투. 데아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말을 못 했는데, 너 숙소가 아직 없더라?”
―어?
“더군다나 간부들 안에서 약간 따돌림도 당하지?”
―그, 그걸…….
자잔의 눈이 새침해졌다.
―따돌림은 아니야. 아직 덜 친해진 것뿐이니까. 서로 어색하다고. 내가 피해 다니는 것도 있어.
“뻔하지. 아무리 마지막에 내부 고발자니 뭐니 해도 트리야의 권속이랍시고 평생을 지냈는데. 어딜 가나 눈엣가시처럼 지내지 않겠어? 심지어 트리야랑 엄청 닮기도 했고.”
―…….
데아는 끙차, 신발을 하나씩 발뒤꿈치에 당겨 신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같이 가자. 내 집은 작고 아늑할 예정이라 너 하나 눕힐 장소조차 없겠지만, 원한다면 옆 섬에 거처 정도는 마련해 줄 수는 있으니까.”
―어… 정말?
“응. 가서 낚시나 해.”
자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데아는 순간 자잔이 우나 싶어 자세히 보자, 흥분을 가까스로 눌러 참은 자잔이 내적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트리야의 사형 선고에 남모르게 좌절하고, 실종 소식에 몰래 기뻐했던 자잔이다.
평생을 동경했던 주군은 사라졌고, 제국 천지에는 자신을 달갑지 않게 바라보는 인어만 수두룩하게 많았다. 그런 곳에 오래 버틸 줄 알았다면 오산이지.
“그런데, 나 한 번만 인간계 다녀와도 될까. 같이 가자.”
―어? 뭐? 안 돼!
“나 장례식 해야 해.”
―뭐? 누구의?
“내 가족.”
자신들의 가족들의 장례라도 치러 달라고 부탁했던, 꿈속에서 마주했던 6년 전 이데아가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강원도에만 아주 잠깐, 다녀올게. 다른 호위도 대동하고 갈 거니까 위험하지 않을 거야.”
―다른 호위? 누구?
“바로 나.”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이위로가 나타났다. 한낮이면 모를까 야심한 밤에 저러고 있으니, 솔직히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이동 기능을 탑재한 아주 우수한 인력 등장이오.”
―샤샤, 괜찮은 거 맞아?
“음, 사실 나랑 위로는 인간계에 얼굴이 다 팔려 있긴 해.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야, 자잔.”
이위로는 가방에서 옷들을 꺼내들었다. 데아가 자주 보았던 기성품이었다.
“거기 2세대 놈. 양말 신고, 저거 입어.”
자잔이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주변에서 뭐 사갈까?”
밤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이 지나치게 환했다. 밤이면 밤마다 돌아다니던 간부들이 없으니 비로소 자유를 되찾은 백성들의 표정이 지나치게 밝았다. 그동안 못 돌아다녔던 한을 푸는 듯, 악을 쓰고 밤거리를 다니는 모습이 활기찼다.
“아니,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어?”
유리, 알레, 링. 도움을 받았던 모든 혁명군 인어들.
“오랫동안 못 봤어. 마지막으로 인사는 하고 싶은데…….”
“아! 그 애들은… 지금 제국을 복원 마지막 단계에서 힘쓰고 있는데, 안 찾아가는 게 나을 거야.”
“왜?”
탑 위를 돌아 간 언덕, 그곳에는 새로운 제왕의 간부들이 모여 간단한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데아가 찾던 대부분의 인어가 다 그곳에서 마시고, 먹고, 즐기고 있었다.
“아, 놀래켜야겠다. 너희들 여기에 있을래?”
그러나 그 결심은 머지않아 깨지고 말았다.
―으아악 으악! 내가! 어떻게! 막!! 못 알아보고 그런 망말을!!
―태초 님, 보이기만 해봐. 으흐흐, 아주 뺨에 뽀뽀를 해버릴 거야.
―불경하다!
―네가 뭘 알아! 닥쳐, 링!
취한 채 소리치며 스트립쇼를 하는 유리와 보수 공사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석판으로 도미노를 쌓다가 와르르 무너지자 엎어져서 대성통곡을 하는 링.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그저 웃는 제이제이와 그들의 뒷수습을 담당하는 알레의 지친 뒷모습이 보였다. 데아는 딱 거기까지 보고 뒷걸음질 쳤다.
그래. 어떤 이별은, 만나지 않았을 때가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
―잘 인사했어?
“응. 나름대로?”
―샤샤, 정 아쉬우면 해마다 한 번씩은 제국에 들러.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한 번씩 축제를 연다니까.
“그거 좋네.”
그렇게 떠나려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더니 횃불과 발광석이 팟, 파앗― 켜졌다.
“이건 또 뭐야!”
이위로는 대비한 것처럼 선글라스를 착 착용했다. 너, 설마!
―말도 없이 제국을 나가시려는 무정한 주군께 알립니다.
피파글랜이 저 멀리 뿔소라를 들고 파도 위에 서있었다. 빛나는 마차와 온갖 물건이 들어 있는 수레와 함께였다. 이쯤 되자 데아는 모든 걸 포기하고 흐름에 몸을 맡겼다.
“와, 장난 아니다. 그치.”
―왕위를 떠넘기듯 저에게 주신 이유는 바로 이때를 위해서였나요? 뭐, 상관없습니다. 굳이, 굳이 자유로운 새처럼 살고자 하시는 주군의 의지를 존중합니다.
피파글랜이 우아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수레와 마차가 빠르게 데아의 앞에 달려왔다. 터엉! 마차의 문이 저 홀로 열리고 좌르륵 시종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하얀 윤기가 나는 마차의 문에는 왕국의 문양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인어의 꼬리와 활을 상징하는 은색 문양이었다.
―거주하실 섬과 저택은 이미 완공되었습니다.
“뭐? 언제부터 만들었던 거야?”
―항상 떠나고 싶어 전전긍긍했던 주군을 저희가 모를 줄 알았나요? 참고로 그 옆의 섬에는 저와 다른 동족들의 별장 또한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니까!”
―아름다운 섬이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내 말을 아예 안 듣고 있네.”
데아는 마차에 발을 올리며 문득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좀 멋있게, 아침이 되어 빈 태초의 방을 본 시종들이 ‘그분을 당장 찾아!’하고 소리치는, 그런 상황을 기대했는데……. 다 망해버렸다. 이게 뭐야. 하나도 안 멋있어.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웃는 데아를 멀리서 본 피파글랜이 지금 많이 웃어 두라는 듯 잔잔하게 미소했다.
“저에게 왕위를 넘긴 대가는 치르셔야 할 거예요.”
“…어?”
“주군, 명심하세요. 당신의 권속들은 곱게 넘어가는 성인이 아니라서요. 왕위를 거절했으니 더한 대가를 각오해야 할 거예요. 전에도 말했었죠?”
“위로야, 위로야. 쟤가 뭐래?”
“그런 게 있겠죠?”
뭐야, 불길해!
그러나 파도로부터 거대한 말이 만들어졌고, 마차는 출발했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딸꾹질을 하며 손을 흔드는 수많은 간부들이 보였다.
―안녕, 딸꾹……. 안, 녕―!
―가신다!
새로운 곳은 어떤 곳일까, 저택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럼 부지도 크려나? 아니, 나는 이리나 할머니처럼 좀 아기자기하고 예쁜 곳을 상상했는데 갑자기 이럴 수가 있나?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마차에 도로 앉았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풍경들이 꿈결처럼 다가왔다.
저 멀리 검고 푸른 새벽의 파도가 보이고, 그 위로 바람이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별 가루가 뿌려진 땅 아래의 하늘, 데아는 폐부를 가득 채우는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