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피파글랜은 데아가 칸나니아의 거창에 치명상을 입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
“주군, 저희가 일부러 여쭤보지 않는 것들이 있는 거 아시죠.”
갑자기 동굴을 붕괴시키며 나타난 태초를 본 모든 인어들은 귀환의 계기를 궁금해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데아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말은 넘어갈 수가 없군요.”
“어…….”
“하지만 또 말씀 안 하시겠죠. 프리아.”
―네!
“가서 헤타 불러와… 아니, 내가 직접 갈 테니까 일어나 있으라고 전해. 마지막 섬 위에서 칸나니아를 본 인어라면 뭐든 아는 게 있겠지.”
데아의 얼굴이 바삐 변했다.
“아냐, 아냐. 내가 말할게. 칸나니아가 날 공격했는데 내가 방어를 잘 못했어.”
“뭐, 시발?”
정겨운 비속어는 뒤에서 들렸다. 이위로가 과자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칸나니아 미친 거 아니야? 누가 누굴 공격해? 어? 어딜!”
“배, 복부 쪽…….”
“칸나니아의 주 무기는 거창이죠. 거리에 상관없이 폭발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꿰뚫는 게 그의 능력이에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파괴력이 크고, 야만적일 정도로 강력하죠. 암석도 분쇄시키는 걸 옆에서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지금은 괜찮으니까 다 된 거 아닐까?”
“왜 갑자기 달라지셨나 싶었더니…….”
피파글랜이 마른세수를 했다.
“므아나는 아나요?”
“…아니?”
기생 생물은 숙주의 몸이 위험하자 빠르게 재생을 시작했다. 약해진 몸에 빠르게 잠식하고, 남은 기억 조각까지 불러들여 데아의 형질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몸이 완전히 가라앉는 순간, 뇌에 머물던 기생 생물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 찰나를 노렸기에 가능한 절차였다.
“다른 동족에게만 조용하게 알리되, 인간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마세요. 뭐든. 주군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요. 이미 죽은 걸로 알고 있다니 잘 됐네요.”
“…….”
“이대로 죽은 걸로 두는 게 서로에게 낫지 않겠어요?”
피파글랜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
결국 데아는 수긍했다.
‘사실 내가 인어였어!’ 그렇게 진실을 밝혀 그들에게 배신감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계는 너무나도 달라졌고, 게이트도 더 열리지 않을 거니까 이대로 모른 척, 평생을 살아가는 게 나았다.
“잠깐, 그러면 그 많은 게이트는 누가 연 거였어?”
“내가!”
책을 읽던 이위로가 실실 웃으며 나섰다.
“순간 이동 스킬을 엄청 이용했지.”
“…그게 다 수작업이었다고?”
“그럼 달리 방법이 있어? 대단하지? 한 번에 열고 사정거리 조정해서 가장 강한 하급 인어를 보스로 지정. 그리고 확 터뜨리고 순간 이동으로 도망치면 끝이야.”
“너네도 진짜 대단하다.”
“히히…….”
반어법이었는데, 웃지 마라.
“리서 언…….”
데아는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말했다.
“릴림은?”
“이리나의 섬에 갔어요. 만날 사람이 있다나?”
“누구? 설마 길드장님?”
“그거야 모르죠. 오면 물어보세요.”
◈ ◈ ◈
그렇게 고요한 시간이 흘러갔다.
데아는 당장 갈 곳이 없어 어영부영 얹혀사는 듯이 왕궁에 머물렀다. 괴성을 지르며 손 한 번 잡기 위해 몰려드는 인어들이 있었기에 밖에 나가진 못했다.
―나 잊지 마. 알겠지?
“응? 무슨 소리야, 자잔?”
―그냥, 그렇다고…….
제국의 제왕이 귀환했다. 그러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백성들의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래도 데아는 철판을 깔고 밖에서 들리는 아우성을 모른 척했다. 머리 색이며 비늘 색이 너무 튀어서 숨길 수조차 없었다.
“말이 안 돼. 저기 바다에 가득 들어찬 어마어마한 인구들을 봐. 저기에 흰 비늘을 가진 인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당연하죠. 태초의 표식인걸요.”
“…….”
―태초 님이 보인다!!
―태초 님!!
데아는 후다닥 커튼을 쳤다.
“주군, 므아나가 돌아왔는데, 얼굴이라도 보시겠어요?”
“…음.”
백리서는 아주 가끔 돌아왔다. 소식을 듣자 하니 인간계로 나가 여파 길드의 공격대장으로 다시 활동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뻔뻔함에 꼬리로 파닥파닥 기립 박수를 치자 시중을 들기 위해 왔던 3세대 인어들이 웃음을 참았다.
“아니.”
피파글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에 나갔다.
◈ ◈ ◈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한 달, 두 달. 그리고 세 달. 왕국의 재건도 거의 완료되었을 때, 엄청난 소식이 들려왔다.
“뭐?”
“모르고 계셨어요?”
데엥― 뎅―
“즉위하셔야죠.”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데아는 패닉에 빠졌다.
“아, 시간이 됐네요. 위로 올라가시겠어요?”
저 멀리 백성들이 왕궁의 단상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즉위식. 곧 발표될 새로운 제왕을 맞이하기 위해 오는 그들의 얼굴에 희망이 일렁였다.
물론, 데아는 거기에 초를 쳤다.
“아, 잠깐. 나 즉위할 생각 없어.”
“네?”
데아는 하얗고 미끄러운 천을 들고 오는 이위로와 피파글랜을 피해 방 구석구석 도망쳤다. 저 멀리 헤타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아니, 데아 언니가 아니면 누가 제왕이 된다고!”
드높은 단상 위에는 준비된 태양의 옥좌가 있었다. 수만 년을 산 거대한 조개가 품었던 진주를 그대로 깎아 조각한 옥좌. 눈부시고 매끄러운 옥좌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도 데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이건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이다. 데아는 태양의 옥좌를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미안해.”
“헐. 그럼 더한 걸 기대해야 할 텐데?”
“뭐?”
“아무튼. 왜, 싫다는 이유나 들어보자.”
“난 자격이 덜 됐어.”
이위로가 귀를 팠다.
“내가 헛것을 듣네.”
“아니, 잘 들었어.”
“맙소사. 언니, 그게 무슨…….”
“나는 이제 남들을 위해 더 나서진 않을 거거든. 내가 제국을 아끼는 것과 별개로, 예전처럼 희생하지 않을 거야.”
예전처럼. 이전 대의 태초처럼.
“희생 못 하겠단 인어가 배를 그렇게 뚫려?”
“…….”
“아… 왜 트리야가 이해 가려고 하지. 갑자기 화나네.”
“아니… 진짜라니까.”
이위로는 입을 불만스럽게 다물었다.
“알잖아. 나 그냥 여기에 집 얻고 살려고 혁명에 동참한 거.”
“…….”
“대단한 투사 정신도, 희생정신도 난 없었어. 트리야를 도주나 시키고 말이지. 저어기 있는 인어들이 사실 알면 난리날걸?”
“주군.”
“자유롭게 살려고. 알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제왕의 자격이 없어. 한량의 자질이면 모를까. 저기 저 백성으로 있는 인어들은… 그러니까, 준비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을 군주로 맞기에 너무 힘든 시기를 보냈어. 알지?”
“…….”
“성군의 자질은 따로 있는 것 같더라고. 그러니”
피파글랜이 불안한 눈으로 데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타인에게 왕위를 위임할게.”
“설마.”
“네가 해, 피파글랜.”
폭탄선언이 던져졌다. 이위로는 입을 커다랗게 떠억 벌렸으며, 헤타는 슬쩍 문을 열고 나가려다 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폭탄선언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피파글랜은 안경을 추스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굳었다.
[모든 것은 태초의 뜻대로 할 것.]
움, 설마 이래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당황스럽긴 한데… 나나 므아나 언니보다는 피파글랜 언니가 그나마 낫지, 그나마?”
“윌로.”
이위로는 잠시 주저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흰색 벨벳을 데아에게 옮겨 주었다. 그게 전하는 바가 뭔지 알 것 같아 데아는 웃었다.
“트리야는 사라졌고, 릴림은 우수한 명장이지만 인간을 증오하며, 모두에게 잔혹하지. 윌로는 아직 경험이 적어, 적임자는 너밖에 없어. 피파글랜.”
“움은요?”
“움? 지금 여파 길드에서 예언자 흉내를 내며 나를 감쪽같이 속인, 그 움?”
데아의 눈이 불꽃처럼 튀었다.
“걔는 내가 제왕으로 임명하면 싫다고 여기까지 미친 듯이 뛰어올걸? 그리고 그 예언으로 앞으로 내가 가려던 여행지에 다 훼방을 놓으면서 명령을 거두도록 하겠지. 그 권속들은 제발 우리 주군 좀 말려 달라며 나한테 달라붙을 미래가 훤해! 예언 능력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
청산유수처럼 나오는 데아의 말에 피파글랜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 주군은 작정을 했다. 피파글랜은 이마를 짚었다.
“헤타는요?”
“진심이야?”
데아와 헤타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헤타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해도 돼. 헤타는 다 좋은데…….”
데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너는 주군이 눈앞에서 납치당하는데 보고만… 보고만 있을 수…….”
모든 기억을 되찾고 얻은 부작용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인간 헌터 샤샤로 있을 때 겪은 모든 거짓말을 깨닫게 되면서, 주기적으로 말도 안 되는 배신감과 어이없음에 시달리는 것이다.
데아의 말을 들은 헤타가 침울해했다.
“사실인데 어쩌겠어.”
“난 찬성.”
이위로가 번쩍 손을 들었다. 피파글랜이 기겁했다.
“뭐?! 윌로, 제정신이니?”
“데아 언니는 그럼 나랑 여행 가는 거지? 아, 나는 이런 친구 같은 주군을 너무 원했어. 최고야.”
“아니…….”
“저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습니다.”
“헤타, 잠깐만…….”
“좋아. 그러면 결정된 거지?”
“네?”
데아가 손짓하자 대기 중이던 시종들이 우르르 뛰쳐나가 단상의 문을 열었다.
―피파글랜 님!
그때 소식을 들은 리리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새된 환호성을 한 번 지르더니 데아를 보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아, 기억 속에 있는 인어다. 피파글랜의 첫 번째 권속.
“안녕, 리리타.”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정말로…….
그때, 문이 열린 걸 본 백성들이 밖에서 우와아아아! 환호했다.
세계를 가득 메우는 함성 소리에 피파글랜이 정신을 놓은 틈을 타, 뒤에서 이위로와 헤타 그리고 데아가 빠르게 손짓으로 지시했다. 데아가 후루룩 흰 벨벳을 피파글랜의 어깨에 두르자 리리타와 시종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빨리, 빨리!”
―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단장에 시종들의 이마에 구슬땀이 또르륵 흘렀다.
―붉은 색이 좋을 까요, 푸른색이 좋을 까요?
“난 그런 거 잘 못 봐. 위로야. 가서 네가 봐줘.”
“무조건 파랑!!”
―장식은요?
“은색이지. 이런 색 조합은 국룰이야. 어기면 잡혀가.”
“누구 맘대로 잡혀가냐.”
“언니 제외.”
불과 몇 분 만에 머리에는 푸른 산호 장식이, 어깨에는 하얀 벨벳 천을 두르고 은색 장식까지 주렁주렁 매달게 된 피파글랜이 두둑, 주먹을 쥐었다.
“진심이신가요?”
“진정해, 여기까지 와서 저기 있는 백성들을 실망시킬 셈이야?”
“맞아 피파 언니. 진정해. 날 실망시키지 말라고. 지금 모습 최고니까.”
“커튼을 걷어 드리겠습니다.”
“…….”
‘움의 편지는 정말 이 모든 것을 예언한 것이었나…….’
그래도 결국 피파글랜은 고집을 꺾었다.
데아는 피파글랜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파글랜이 태초, 데아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를 제왕으로 세운 대가는 달게 받으셔야 할 거예요. 저도 마냥 선한 권속은 아니라서.”
밝은 태양이 뜬 하늘 아래, 가장 화사한 즉위를 위하여.
―와―!!
―피파글랜 님이시다!!
―태초 님도 옆에 계셔!!
―태초 님!!
―바다님!
피파글랜은 독재의 시대 안에서도 현명하게 중립을 가장하며 혁명군에 힘을 실어 준 1세대 왕족 인어였다. 인간들을 적대하지 않는 인어이자, 유일하게 핍박받았던 백성들을 위한 의원을 외곽에 지어 둔 인어였고, 리리타의 말에 의하면, 간부들의 포위망이 좁혀 왔을 때도 침착하게 죄 없는 작은 인어를 숨겨 주고 밖으로 빼돌린 인어이기도 했다.
“1세대 피파글랜을 새로운 제왕으로 임명하겠다!”
고릿적의 기억을 되살려 데아가 소리쳤다. 이렇게 하는 거 맞겠지? 옛날 내 즉위식에도 비슷한 멘트가 있던 것 같았는데. 물론 데아의 기억이 맞았다.
태초가 왕위에 올라서는 게 아닌, 누군가에게 왕위를 양도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놀라워했지만 그뿐, 그들은 곧 그들의 새로운 군주를 환영했다.
피파글랜을 더 잘 알고 있던 혁명군을 필두로 모든 이가 손을 들어올렸다.
―만세!
―만세! 만세―!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백리서가 움을 통해 ‘주군의 의지로 네가 제왕이 된 건 어쩔 수 없다만, 넌 나한테 무슨 명령할 생각하지 마.’라는 내용이 적힌 한 장의 전서를 날렸지만 대체로 양호했다.
◈ ◈ ◈
“아, 깜짝이야…….”
달빛이 가늘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새벽, 데아는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소스라쳤다.
그동안 피해 다녔던 불편한 공기. 백리서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안녕. 그런데 지금 내가 깨운 거예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