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윌로! 당장 창을 열어!”
므아나가 소리를 질렀다. 윌로가 ‘나 왜 기절했어?!’ 소리치며 허겁지겁 창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아냐, 그걸로는 늦을 거다. 그 사실을 태초와 움. 단 두 인어만이 눈치챘다.
태초가 움을 우연처럼 쳐다보았다. 가장 긴 수초가 지나갔다. 움의 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또렷해졌다. 그가 미래를 보았다.
태초는 체념하며 웃었다. 아, 아아.
“발사!!”
탕! 타앙!!
목적지는 가장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릴림. 태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병기가 작동된 상황, 릴리므아나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태초는 그를 밀쳤다. 동시에 등 뒤에서 거대한 통증이 닥쳐왔다.
아니, 통증이던가? 이건 그저 감각일 뿐이다. 신경이 하나둘 사그라들고 있다.
“주군!!”
“안 돼!”
날카롭게 가공된 돌을 막 쏘아 대는 병기, 단숨에 꿰뚫린 태초. 저들은 인어의 약점을 알아냈다. 아, 그래선 안 되지. 여길 어떻게든 매장시켜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아, 아아, 안 돼, 안 돼…….
패닉에 빠진 경배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태초는 릴림의 등에 업혔다. 푸른 피에 범벅이 된 등에 뺌을 기대며 슬며시 비웃었다. 움, 너는 미래에서 뭘 봤니?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윌로가 창을 거의 다 만들었으니까…….”
“아니. 가.”
“네?”
그 순간, 모든 이의 눈을 멀게 할 창이 생성되었다. 이제까지 열었던 창 중에 가장 큰 통로, 아득하리만큼 아름다운 원형. 아마 이제 기약 없을 기다림을 상징할…….
휘이이이이―!!
광풍이 일었다. 짭조름한 바다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해풍이 머리카락을 강하게 스쳤다. 태초가 저지르는 마지막 무력, 광풍과 무형의 힘에 밀린 하급 인어부터 차근차근 창 밖으로 밀려 사라졌다.
태초의 눈이 밝게 빛났다. 타오르는 새벽이 그곳에 있었다. 므아나는 잠시 그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신경이 심장과 뇌를 훑고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윌로가 태초의 팔을 잡았지만 바로 떨어져 나갔다. 므아나 또한 태초의 팔을, 허리를, 마지막으로 비늘을 잡고 덜덜 떨었다. 그들을 떼어 낸 건 움이었다.
“미쳤어?! 놔, 움!!”
“움.”
“…….”
움의 표정이 지나치게 서늘했다. 태초는 입가의 피를 닦아 낼 생각도 않고 물었다.
“뭘 봤어?”
“…하. 나는 왜 하필 이때…….”
그 모든 일은 아주 짧은 몇 초 안에 일어났다. 움은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윌로를 기절시키고 므아나를 어거지로 끌어냈다. 므아나의 손끝에, 태초의 바스라지기 시작한 비늘 몇 개가 뜯어져 나갔다.
“검은 머리…….”
움은 눈을 꽉 감았다.
“짧은 단발.”
그렇군. 그걸로도 태초는 만족했다. 나는 아무래도 아주 죽지는 않는 모양이지.
안 돼, 주군! 주군! 악을 지르는 릴리므아나를 뒤로하고, 광풍이 마침표처럼 그들을 밀어냈다.
이윽고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창이 닫혔다. 펑! 퍼엉! 이 순간에도 쏟아지는 폭음이 태초의 등을 뚫었다. 이미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한 인간들이 환희에 젖어 병기를 발동시켰다.
“크, 크하하, 인어 하나라도 남았어!! 죽여!!”
“늦기 전에 죽여!”
태초의 한쪽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멍청한 것들.”
결국 이렇게 되었다. 내가 그 애의 말을 듣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까?
태초는 약지밖에 남지 않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하늘이 원형을 그리며 흘러넘치고, 산산이 흩어졌던 해일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인간들은 동시에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 그럴 리가, 병기는, 잘 작동되고 있는데…….”
“마, 말도 안 돼! 왜!!”
비를 가장한 재해. 병기마저 능가한 마지막 권능. 단 한 번도 쓴 적 없던 최후의 능력.
태초는 쏟아지는 폭우 가운데에서 눈을 감았다. 파도가 밑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더 늦게 전에 도축해!!”
저 멀리서 인간들이 흉악한 도끼를 질질 끌고 왔다.
“머리, 머리라도 보관해! 아무나 빨리!”
“빨리, 올려!”
뚝, 고통은 없었다. 태초는 무너지는 파도 속에서 오열하는 잔상을 보았다. 내가 너에게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 환상임을 알고 있음에도 잡을 수밖에 없는 꿈결이 느릿하게 손짓했다.
바다는 생명을 삼키고 천연덕스럽게 입가를 닦아 내는 귀족처럼 고상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다시 아가리를 벌렸다. 태초는 차디찬 포식자를 들이마시며 파도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파도로부터 시작된 존재, 결국 그것으로 귀결되는 존재. 수많은 삶의 마침표. 나 또한 그들에게 흘러가 위장에 웅크린 해류가 될 것이다.
태초는 죽음을 확신하며 눈을 감았다. 한 나라를 집어삼킨 바다가 입을 벌린다, 태초의 정수리에 이빨을 대고 입을 다물었다.
◈ ◈ ◈
그 순간, 모든 인어들은 태초의 죽음을 느꼈다.
“어?”
“왜, 피파?”
“아냐. 아무것도…….”
보석을 다듬던 도라안도, 홀로 언덕을 오르던 헤타도, 창을 넘은 이들과 기다리던 이들까지도. 흠칫, 무형의 단절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른 건 트리야였다.
“으아아아악! 아악!!”
내장까지 뱉어 낼 기세로 윽, 끄윽, 구역질을 하던 트리야는 게이트 밖으로 나온 인어들을 형형한 눈으로 훑었다.
“므아나. 그거, 뭐야?”
하얀 비늘을 잡고 덜덜 떨고 있는 므아나의 얼굴을 단번에 주먹으로 때린 트리야는 발악을 하며 소리 질렀다.
“그거 뭐냐고!!”
주먹 다툼은 난투전이 되었다.
“주군은? 태초는? 태초는 어디 갔어?”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피파글랜을 제외한 모두가 언덕의 뒤쪽, 작은 해변가에 모였다. 저 멀리 하급 인어가 낑낑거리며 울고 있었다.
“뭐, 뭐라는 거야…….”
윌로가 울먹였다.
“나, 나만 안 들려? 지금 하급 인어가 뭐라고 하는 거야……?”
이제 정말 끝이다. 태초는 가버렸다. 다시 돌아올 가능성조차 남겨 주지 않고.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왜…….”
나를 속였지? 왜 내 말을 안 들었지? 왜…….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했잖아. 버리지 않는다고 맹세했잖아…….”
아마 당신은 기억하지 못할 아주 예전의 약속. 그걸 지금까지 되새김하고 있는 건 나뿐이었지.
“진정해. 태, 태초는 알겠지만, 안 죽고 다시 돌아와.”
“보장이 있나? 기약이 있어?”
보다 못한 도라안이 중재에 나섰지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태초가 기생 생물이라는 사실은 소수의 몇 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죽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상 그 기생 생물이 훼손된다면, 영원히 썩어 흩어져 버리면 모두가 끝인 거였다.
모두가 바라보는 중앙, 트리야는 홀로 흐느꼈다.
약속을 지킨다고 했잖아. 미안하다고 했잖아. 모두를 공평히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게 당신의 사랑인가요? 오직 죄책감만을 안겨 주는 이게?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요?”
트리야는 므아나의 손으로부터 하얀 비늘을 뺏었다. 그리고 그것을 으스러뜨리듯 움켜쥐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모든 인어가 죽어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
“언제나 안전하질 못하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들어 올린 녹색 눈은 예전과 완전히 다른 이의 것이다. 분노의 대상을 찾아 돌아다니던 시선이 목표를 찾았다.
인어들을 훑는 눈동자. 폭풍전야.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당신은 죽음으로서 나를 버렸다. 그러나 감정은 찰나의 허상과도 같아서, 트리야는 분노와 동시에 벌써 그리워졌다.
당신은 왜 나를 배신해야 했을까. 이렇게도 허무하게 날 떠났어야 했을까.
그래, 당신은 죽지 않는다. 당신은 곧 다시 돌아오겠지. 그러나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트리야는 원인을 찾아냈다.
이 모든 건 바로 당신의 의무 때문이다. 태초의 의무, 주군의 의무, 제왕의 의무. 우리의 모든 비극은 바로 나와 저 일곱의 권속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아픔은 당신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자 창조한 이 제국과 권속들로부터 파생되었다.
깊이 고개를 숙인 트리야의 입꼬리가 죽 올라갔다. “…역시 나밖에 없죠?” 너무나도 작은 속삭임은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트리야는 속으로 끊임없이 뇌까렸다.
내가 제왕이 될게요. 당신을 또 그 지옥 같은 자리로 올리려는 거짓된 것들의 목을 부러뜨리고, 짓밟아 없앨게요. 그렇게 당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릴게요. 당신은 빌어먹게도 너무 착하니까, 내가 악역을 자처할게요.
“트리야, 지금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런 나와 함께 안전해져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트리야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들어. 다시 돌아온 태초는 태초가 아니다.”
선전 포고의 시작이었다.
◈ ◈ ◈
“지금 상황 뭐야……?”
“야, 너희들의 권속 목숨을 아낀다면 여기에는 못 들어오게 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헤타가 우울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정말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공허한 마음에 구멍이 뚫렸다.
저편에서는 트리야와 므아나가 서로 목숨을 걸고 땅을 뒤집으며 싸우고 있었고, 이쪽에서는 이쪽 나름대로 죽고 싶은 인어들만 한가득 모여 있었다.
“잠깐, 피파글랜 누님… 어디 가셨죠?”
그런데 피파글랜이 이 자리에 없다.
“뭐야, 설마 주군이… 한 것도 모르는 거야?”
“헤타, 아마 이리나의 섬 안에 있을 거야. 빨리 가서 알려. 주군의 마지막 흔적이라도 봐야 해. 아무래도 곧 머지않아 파손되거나 트리야가 가져가 버릴 것 같단 말이야.”
“네, 네.”
헤타는 서둘러 이리나의 섬으로 향했다. 그러나 어둑하게 커튼이 쳐져 있는 집 밖으로 나온 이리나는 헤타를 보더니 인상을 살짝 구겼다.
“어쩐 일이시죠?”
“그, 피파글랜 누님이 여기 있습니까? 급한 일이라서, 데려가야 하는데…….”
그러나 이리나는 심드렁하게 한숨을 푹 쉬었다.
“예전에도 윌로 님이 와서 장난을 쳤었어요. 별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괜히 인간과 피파글랜 님이 같이 붙어있는 게 보기 싫어서 불러 대셨죠.”
“아니, 이번에는 정말 그런 장난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님이 안에 있다면, 제발…….”
“없어요.”
어둑한 밤, 등불만 든 이리아의 뺨이 불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있다면 말해 줬을 텐데, 아쉽게도 없어요. 이미 떠났는데… 길이 엇갈린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