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태초는 인자하게 웃었다.
하지만 트리야. 이건 애초에 창을 연 내 잘못이란다. 태초는 속삭였다.
“그리고 높은 위치에 있는 왕족은 그에 따른 책임이 있지. 원래 힘과 권력에는 의무 또한 따르는 법이니.”
“…….”
“미안해?”
트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를 못 하겠어요.”
“공평하게 모두를 사랑한다는 뜻이란다.”
“그래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모두를 사랑하면 아껴 줘야지 누가 희생을 하죠?”
“…….”
“그럼 하나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곧 죽어도 가야겠다면 하나만 약속해 줘요.”
트리야의 눈이 물기를 품고 일렁였다.
“살아 돌아온다고. 꼭, 반드시,”
“약속할게.”
“정말로…….”
트리야는 미약하게 떨리는 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잠시 바닥을 훑어보던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절대 안 돼요. 못 비켜 주겠어요. 너무 불길해요. 못 돌아올 것 같아요.”
태초의 표정이 어둑해졌다.
“차라리 나를 밟고 가요. 절대 안 돼요. 나 버리지 마요. 절대로…….”
그러나 찰나의 순간, 트리야는 번쩍 빛나는 무언가의 섬광을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는 타다다―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떴다.
“트리야!”
“…어?”
창도, 인어들도 아무도 없었다. 오직 놀란 얼굴의 칸나니아만 뛰어오고 있었다.
“왜, 왜, 여기에 혼자…….”
“주군은?”
분명 아침이었는데,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했다. 맥박이 널뛰고, 식은땀이 났다.
“칸나니아, 주군은?”
“…….”
“주군이 나를……?”
주군이 나를 친 거야? 정말 나를 기절키시고, 건너갔어?
칸나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트리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그러나 이내 트리야는 칸나니아에게 매달렸다. 칸나니아는 헐떡이는 제 우상을 말없이 응시했다.
“칸나니아, 나를 위해서 창을 열어 줘. 넌 열 수 있잖아.”
트리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창을 향해 손짓했다.
“주군이 사라진 곳, 그 세계. 그곳에 창을 열어 줘!”
이번에는 정말 불길하단 말이야. 예감이 좋지 않단 말이야…….
칸나니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거부감에 두통이 일었다. 열어 주기 싫다. 어긋난 신임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하지만 결국 고집을 접은 건 칸나니아였다.
“…알겠, 습니다. 하지만, 해당 세계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창을 만든다고 해도, 그 세계일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선 만들어!”
“…네.”
휙! 칸나니아의 손가락이 허공을 훑고, 창이 입을 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더 큰 완벽한 창이 열리고, 광풍이 일었다.
“!!”
“!!”
칸나니아는 즉각적으로 부정했다.
“제가, 제가 연 게 아닙니다. 제 창은 이렇지 않은…….”
그때, 실종되었던 대부분의 인어들이 후두둑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엉망이 된 채로, 모두가 너덜너덜해진 채였지만 어쨌든 무사했다. 모두가 안전했다.
“…주군은?”
한 인어를 제외하고.
◈ ◈ ◈
인간이 거짓말을 했다.
분명히 철로 만들어진 사슬을 주렁주렁 매단 말을 타고 다니고, 무기라고는 검과 화살이 다인 시대라고 말했건만, 태초가 건너간 그 세계는 까만 매연을 내뿜는 증기 기관차와 전차. 그리고 산탄총의 폭음이 아스라이 존재하는 시대였다.
태초는 우아하게 바닥에 착지하고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잿빛으로 건축된 임시 건물, 저 멀리 뿜어내는 매연과 연기, 물기라고는 오염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비쩍 마르고 건조한 도시에 태초는 혀를 찼다.
“이러니까 그 애들이 당황했겠지.”
“어어, 이게 누구……. 어!”
“뭐, 뭐야?”
“폐, 폐하를 불러오시게! 어서! 방금 여기 계시지 않으셨나!”
그때, 인간 무리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저 멀리서 비틀린 미소를 지은 필립 또한 다가왔다. 필립은 태초의 맨발을 보더니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와, 이게 누구신가. 위대하신 신을 뵙습니다.”
“신?”
“우리는 다 그렇게 부릅니다. 미천한 인간들에게 위대한 능력을 선사해 준 신. 위대하신 근원이라고도 부르죠.”
“꽤나 오글거리는 호칭이야. 작명 솜씨가 형편없군.”
“…하하.”
“그래도.”
태초의 눈이 흐르는 냇물처럼 빛났다. 그 모습을 본 인간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달아났다.
쏴아아아아아―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건, 들릴 리가 없는 파도의 걸음 소리였다.
“영악함 하나 만큼은 칭찬할 만하군.”
필립이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날씨가 흐려지고, 주변의 습도가 확 올라갔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무슨 일이냐!”
“과연 영악했어. 그러나, 국경의 절반 이상이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에서 감히 나에게 선전 포고를 할 정도라면…….”
콰과과과과― 건물이 으스러지는 소리, 무력하게 생명이 쓸려 나가는 소리. 그에 필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단죄의 순간이 오고 있었다. 기울어진 판결을 내는 심판자가 저울을 기울였다.
“이것보다는 더 영악했어야지.”
저 멀리, 창공을 뒤덮고 허공을 찢는 해일이 몰려들고 있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굳은 인간들이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태초는 추한 몰골로 도주하는 필립의 뒤를 밟았다. 해일이 완전히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다른 이들의 위치를 알아내야 해.
“자기?”
태초가 애타게 불렀지만 바다의 경배는 두어 번 더 불리고 나서야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뭐야, 여긴 어디야? 또 여행이야? 경치가 영 별로인데, 여행 온 거 아니면 깨우지 말라고 했잖아.
“여행 아냐, 심각해. 혹시 릴림의 마력이 느껴져? 아니면 다른 기척이라도 봤다던가…….”
―흥, 몰라!
그 후로 바다의 경배는 드르렁, 쿠우우― 코를 골며 자버렸다.
가장 큰 주 무기가 비협조적인 상황. 이건 예상 밖인데……. 태초는 경배의 사용을 포기하며 가만히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위에서는 해일이, 밑에서는 파도가. 마치 거대한 구렁이처럼 스며들어 사람을 익사시키는 파도가 사방에서 차올랐다. 해수, 식수, 오염수 할 것 없이 태초의 의지에 따라 널뛰었다.
“으아아악!”
“으악! 으아아!! 괴물이다!!”
태초를 향해 무기를 들이미는 인간들의 얼굴에 하수구에서 튀어나온 물이 달라붙었고, 그대로 기도를 막았다.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 폐를 괴사시키고, 내장을 터뜨렸다.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시체가 복도에 줄 지어 걸렸다.
“인어들은?”
“흐아악! 으아, 흐아아악!!”
뭣 하나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 주는 자가 없었다. 각종 총기류가 그들의 안주머니에서 튀어나왔지만 총알은 태초를 뚫지 못했다. 공기 중에 존재하는 모든 수분, 늘어난 습도. 태초는 그것들을 손 하나로 조절하며 생명을 갈취했다.
파국의 중앙에서 뚜벅이며 걸어 나오는 살인귀, 그 무엇보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괴물의 모습에 인간들은 피를 토하며 도주했다.
그리고 그때, 약속한 듯이 건너편의 문이 열렸다. 익숙하게 훅 끼쳐 오는 마력 또한.
‘저곳이다.’
함정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태초는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갔다. 한낱 인간이 함정을 꾀해 봤자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수천 년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했다. 해일은 이미 모든 이의 정수리 위를 넘실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늦었다. 이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릴리…….”
아득하게 보이는 금발에, 태초가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죽어라―!!”
태초는 눈앞에서 사라진 두 손가락을 보았다.
‘어……?’
감각이 거세당한 몸이 현실인지를 거부했다. 느릿하게 시선이 돌아가고, 거대한 무언가를 목도했다. 인간들이 ‘그것’의 뒤에 숨어 낄낄거리며 웃었다. 저게 뭐지?
“세상에나…….”
능력이 써지질 않았다. 동시에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머리 위에 느껴지던 모든 해일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것’ 때문에, 저기 인간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병기 때문에 모든 인어들이 무력하게 잡혔구나.
“그래, 알아보겠느냐?”
필립은 득의양양하게 병기를 두드렸다. 인간의 세 배에 달하는 그것. 그것의 사정거리 안에 발을 디디는 인어를 가장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끔찍한 병기.
펑! 퍼엉! 태초의 오른 손목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대로 어깨가 잡혀 고꾸라졌다. 눈앞에 정신을 잃은 동족들이 보였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 웃음이 나왔다.
―어, 뭐야?
이제야 상황파악을 한 경배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자, 자기야, 이게 무슨, 뭐야?
“웃어? 웃음이 나오나? 거만한 인어인 넌, 우리가 그동안 가만히 있던 줄 알겠지. 이 빌어먹을 어류가!!”
흰자가 보일 정도로 눈이 돌아간 필립이 거대한 도끼를 꺼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올렸다. 아득한 빛이 도끼날을 번쩍 비췄다.
“이 젠장맞을 어류! 모두 난도질당해서 죽어버려!!”
그리고 그 순간, 태초와 필립의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 좋은 청년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노인이 그곳에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나. 황태자였던 남자는 왕위에 올랐으며, 거대한 왕국을 파멸로 이끄는 추악한 폭군이 되어 있었다.
과연 필립은 능력이 좋았다. 그 많은 세월동안 자신의 몸을 굽히며, 몰래 연구를 하고, 이렇게 인어들을 무력화시킬 병기까지 개발해 내었으니까.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다. 저건 나도 연구를 좀 해보고 싶은데……. 뭐,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테지.
“죽어!!”
쨍그랑!! 모든 유리창이 으깨졌다. 번쩍! 하늘이 어두워지고 거친 비가 쏟아져 내렸다. 머리가 좋고 인내심이 좋은 필립. 그러나 그가 한 유일한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태초는 남아 있는 왼쪽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암흑으로 젖은 사위에서 태초의 눈만 파랗게 빛났다. 비에 젖은 도끼의 날이 역행을 시작했다.
“어, 어!”
앙상한 팔로 도끼를 들어 올린 가여운 필립. 네가 한 유일한 실수는 너무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네가 노인만 아니었어도, 조금만 더 강했더라도.
“어!”
“폐, 폐하!!”
“폐하!!”
내리쳐진 획 도로 올라간 도끼날은 그대로 연약한 노인의 두개골을 찍었다. 콰직―! 인간의 머리에서 난 것치고는 꽤나 끔찍한 소리가 건물 안에 고스란히 퍼져 나갔다.
한 나라의 황제의 죽음을 목격한 인간들이 괴랄한 비명을 질렀다.
죽음에는 차례가 있었다. 비에 젖은 모든 이의 목에서, 복부에서 무언가가 찌르고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인어들이 하나 둘 정신이 든 건 그때였다.
“주, 주군!!”
므아나가 태초에게로 달려왔다. 눈앞에 사해의 화살이 생겨났다. 경배가 크게 울었다.
―이, 이, 이거 써!
“지금 나 활 못 써…….”
한쪽 손목이 날아갔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처참한 몰골의 태초를 본 므아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병기가 한 번 더 움직였다. 끼이익,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철컥철컥, 누군가의 안전 장치가 해제되었다.
척추를 길게 훑는 건 확신에 가까운 직감. 태초는 가만히 자신의 잘린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재생이 아예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