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온 세상에는 다양한 우주와 다양한 세계가 있단다. 우리들의 제국은 그 일부일 뿐이지.”
“그, 그렇다면!”
“직접 확인하고 와도 좋아.”
태초는 완벽한 ‘창’을 열었다. 창을 열 수 있는 그의 힘을 물려받은 윌로, 피파글랜 그리고 칸나니아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완성형의 ‘창’이었다.
태초의 창은 데아의 세계에 나온 게이트와 달리 누구나 통행이 자유로웠으며, 보스 인어의 존재도 없었고, 무엇보다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았다. 여는 것도, 닫는 것도 모조리 태초의 의지였다.
태초는 오로지 낮에만, 모두가 볼 수 있는 제국의 맞은편, 가장 높은 언덕에 창을 열어 두었다. 인어들은 조심스럽게 창의 건너편을 살짝살짝 훔쳐보았다.
―그러니까 저 건너편에 우리는 모르는 세계의 인간들이 있다는 거죠?
―인간이 아닐 수도 있지!
대부분의 인어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태초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걸어 두었다.
인어가 넘어가는 것은 자유롭되, 건너편의 인간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은 조건을 걸어 제한한다. 인어에게 강한 적의를 품은 자, 맹독을 품은 자, 지나치게 공격성향이 심한 자, 범죄 이력이 있는 자 또한 제한한다.
“여, 여기가 어디오?”
첫 교류는 성공적이었다. 건너편의 인간들은 세계와 세계를 잇는 거대한 통로가 생겼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고, 새로운 세계와 문물에 매혹되어 이끌렸다. 그렇게 창에 고개를 디밀었다.
“우리와 거래를 하는 게 어떻소?”
인간들의 모양새는 다양했다. 바퀴가 달린 마차를 타고 넘어온 자, 중절모를 쓰거나, 긴 면포를 몸에 둘둘 감고 넘어온 자, 윤택이 흐르는 비단을 들고 온 자, 키가 작은 노인부터 작은 어린아이까지 다양했다.
“정말 신기합니다. 우리는 몇 인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군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맞죠?”
―우리 말을 못 듣는다고?
―정말 인간, 내 말이 정말 안 들려? 이것 참…….
“설마 지금 말을 걸고 있는 겁니까? 정말로?”
인간들은 2세대 이하의 인어와 대화하기 어려워했으며, 간혹 그들의 위압감이 위축되기도 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저 멀리서 옹기종기 모여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는 하급 인어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전부 악감정이 없다는 걸 알고는 이내 안심했지만.
“무슨 거래?”
“보아하니, 이곳의 인어들은 인간들의 물건에 큰 관심이 있어 보이는군요. 우리가 계속 진귀한 물건을 진상하겠습니다. 대신 이 창을 계속 유지시켜 주시오. 그것이면 됩니다.”
인간들은 창을 사랑스럽게 쳐다보곤 했다.
“이 창이 생기고, 건너편의 우리… 인간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소. 우리만 볼 수 있는 기이한 안내문이 생겼단 말이오. 그것뿐인 줄 아오?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소. 참고로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오. 나는 날개 없이 하늘을 날 수 있소! 이걸로 우리는 더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분명 이 통로 덕분이지.”
인간들은 인어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힘과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인간들에게 이능력이 생긴 이유를 바로 이 창 덕분이라고 바로 판단한 그들은 더욱더 교류에 열을 올렸다. 인간들은 인어들의 창 덕분에 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며 칭송했고, 고마워했다.
건너편의 왕족이 직접 찾아온 건 그때부터였다.
“필립 라 에드워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아… 네.”
바다 끝에 위치한 왕국의 왕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젊은 인간 남성은 태초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필립은 쫙 편 어깨와, 한껏 부풀린 머리 모양을 그리고 다채로운 깃털을 모자에 장식한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태초의 손을 맞잡았다.
“다음에 또 와도 괜찮겠습니까? 그때는 더 많은 것을 들고 오겠습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창을 넘어 태초를 찾아왔다. 그의 눈에는 신비로운 것을 보는 연구가의 호기심이, 그리고 아름다운 피조물을 목격한 예술가의 사랑이 꿀처럼 떨어졌다.
인어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태초에게 호감을 품은 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필립이 근처에 다가와도 태초는 은은한 미소만 지을 뿐, 굳이 나서서 내치지 않았기에 인어들의 호감 또한 배가 되었다.
“저 인간 남자, 우리 무리에 껴도 될 것 같지 않아?”
―글쎄요? 글쎄요!
―윌로 님이! 먼저 가서! 물어보세요!
“어휴, 알았다. 알았어.”
윌로가 하급 인어들을 대동하고 필립에게 다가갔다.
태초의 아군이라면 우리 모두의 아군. 필립은 윌로와 하급 인어에게 인간계에서 가져온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혀에 들어가자마자 꿈결처럼 부서지는 사탕이었다.
“인간, 또 언제 와? 다음에는 그것보다 더 맛있는 거 들고 올 거지?”
“뭐야, 뭐야! 왜 윌로만 줘! 나도 줘!”
“꺼져, 도라안!”
필립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빠르게 아이스크림을, 케이크를, 파이를 그리고 타르트를 공수해 왔다. 공물 아닌 공물 때문인지, 모든 인어들이 그를 환영했고, 좋아했다.
그러나 트리야는 아니었다.
“저 음습한 눈을 봐. 주제를 모르고 큰 꿈을 꾸는 멍청이들의 표정이 딱 저렇지.”
“오랜만에 의견이 맞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넌 왜 안 막지? 주군은 네 말은 들으실 텐데?”
“알고 계셔.”
“뭐?”
“알고 계신다고.”
저 인간 남자가 속 모를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딱 보면 몰라? 어느 순간부터 저 인간 남자가 아닌 다른 인간은 아예 넘어오질 않고 있잖아.
므아나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그 순간 트리야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예상이 정말로, 정말로 다 들어맞았다. 태초는 저 인간 남자의 더럽고 포악한 속을 다 알고 있음에도 지금 인어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모른 척하고 있고, 므아나, 이 새끼는 태초가 원하는 그림대로 순순히 따라 주고 있는 거였다.
“바보인가?”
“말조심해.”
“주군은 왜 그러시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어.”
모르기는, 퍽이나.
그 길로 트리야는 뚜벅뚜벅 걸어 태초를 찾아갔다. 제국을 굽어보는 순백의 왕궁. 그곳의 가장 위에 있는 태초의 방문을 쾅! 발로 밀어 열어 재끼자 태초가 환하게 그를 웃으며 맞이했다.
“트리야.”
그리고 그 미소를 보자마자, 정말 우습게도 트리야는 준비한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우두커니 서있던 트리야는 아냐, 아냐, 하며 뒷걸음질 쳐 문을 다시 닫고는 정확히 5분 뒤에 다시 벌컥 발로 밀어 열었다.
“인간 남자를 죽일 계획이신가요?”
“뭐?”
“저 단 간식들에 홀려 배를 드러내며 누워 있는 수많은 하급 인어와 상급 인어는 그렇다 쳐도, 저는 안 속아요. 무슨 계획이 있는 거죠?”
태초는 말없이 웃었다. 아 제기랄. 트리야는 탄식했다.
“필립은 건너편 세계의 왕자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황태자일 가능성이 아주 커.”
트리야의 탄식이 뚝 그쳤다.
“필립의 나라의 절반은 바다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나머지 반은 적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 곧 거대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겠군. 그에 필요한 건 바로 군대. 필립은 우리들에게 직접 지원을 요청할 거야.”
“네? 그럼,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런 건방진……!”
트리야는 발을 쾅쾅 구르며 다가왔다. 태초의 표정은 여전히 초연했다.
“건방지지. 주제를 모르기도 하고.”
트리야의 입이 또 닫혔다. 태초의 시선이 더없이 서늘했다.
“멍청하고, 멍청하고, 멍청하고…….”
트리야가 망각했던 사실. 태초는 인어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씨를 말리는 인어였다. 인어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했던 대륙 위의 인간들이 그랬고, 옛적, 자신에게 돌을 던졌던 인간의 마을이 그랬다.
은혜는 두 배로, 적의는 전복으로. 그게 태초의 신념이었으니까.
“…….”
“많이 걱정했니?”
태초가 트리야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키를 가진 가장 강한 인어가 맑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저 인간 남자가 왔을 때, 죽일 거예요?”
“오, 그건 아냐. 아직 쓸 곳이 있거든. 우선 나는 지원군을 보내 줄 생각이야.”
“네?”
“단 한 명.”
똑똑,
그때, 닫혀 있는 문에 누군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인어, 신체 나이를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인어, 예언자 움. 그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전 준비 다 됐어요, 주군.”
“출발하렴.”
“네.”
그리고 움은 출발했다. 그가 태초에게 전달받은 명령은 오직 하나. 필립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되, 잔혹하고 가차 없이 행동할 것. 단 한 명의 인어로도 나라가 멸망할 수 있다는 걸 가감 없이 보여 주어 아군에게도 두려움을 심을 것.
인어는 협력이나 지배의 대상이 아닌, 웅크린 재앙임을 깨닫게 할 것.
“…주군을 믿지 못했던 건 아니었어요.”
“알아. 넌 걱정했을 뿐이지. 늘 그랬듯이.”
“주군이 다른 인어들 신경 쓰느라 몸 버리는 거 한두 번 봐요?”
“많이 걱정했니?”
“…….”
트리야는 근처에 놓인 협탁에 가서 도륵도륵 검은 함에 담긴 오르골을 다시 돌렸다. 띵동띵―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만 자라는 거구나?”
“네. 이만 주무세요.”
“착하기도 하지. 내가 그거 없으면 잘 못 잔다는 것도 알고 배려해 주다니.”
트리야는 멈칫 굳었다가 꽈아악 태엽을 끝까지 돌렸다.
“그래도 오래 끌지 마세요. 저 인간 남자 눈매가 영 지저분하니까.”
쾅! 트리야가 나가고, 바다의 경배가 말을 걸었다.
―자기야, 사실 나도 저 초록 머리랑 같은 의견이야. 너무 위험해.
“자기야, 뭘 알아.”
―맙소사. 난 자기 안에 있는 능력인 거 몰라? 난 다 알아. 저 초록 머리한테 다 말한 거 아니잖아? 여차하면 다 죽일 작정이지? 한 번에 몰살시킬 작정이잖아.
“…….”
태초는 커튼을 걷었다. 밤의 달빛이 은은하게 창 아래로 스며들었다.
―물론 자기 입장에서는 가장 걱정을 덜 시키는 방법이겠지만…….
“그거면 됐어.”
언덕 위, 내일 찾아올 인간을 기다리며 뒹굴거리는 인어들이 한눈에 보였다. 태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거면 됐어.”
―흥, 가만 보면 내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아.
경배는 그게 퍽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새침해진 목소리가 졸음기를 머금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저 제국 구석에서 자고만 있는 수호룡한테나 상의하던가. 흥, 나는 나중에 여행갈 때나 깨워 줘. 나도 머리 쓰기 싫어. 좋은 구경이나 하고 싶다고.
띵똥디롱, 오르골이 멈췄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필립은 예상대로 몸을 사렸고, 더 영악하게 눈치를 굴렸다. 그가 인어를, 더 나아가 태초를 매우 흥미롭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앎에도 태초는 침묵했다. 태초가 침묵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필립 또한 입을 다물었다.
저 인어들의 제왕이 자신의 권속을 끔찍이 아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생각만 같아서는 저 보기에도 끔찍한 하급 인어 몇 마리를 연구용으로 받아 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진 않으니, 필립은 계획을 변경했다.
“오늘밤, 시간을 저에게 내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필립의 새로운 작전이라……. 알 법했다. 태초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락했고, 필립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결국 인어도 지성이 있는 생명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가 색(色)에 약하다는 건 이미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지성체는 멍청해지지. 너의 사고를 흐려지게 만들어 주마.’
◈ ◈ ◈
그날 밤, 필립은 해룡의 몸에 기대어 앉은 태초를 향해 그윽하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군요. 저에게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태초.”
“역시 군주의 이름답군요. 아름답습니다.”
필립은 태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때 또각, 저 멀리서 나뭇가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필립은 듣지 못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에게 퍽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
“아… 타인이 지어 주신 겁니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본받고 싶군요.”
“들어 볼래? 사실 이름 후보가 두 개였거든.”
태초는 비스듬히 자세를 고쳤다.
“트리야와 므아나가 각각 하나씩 이름을 지어 줬어. ‘태초’와 ‘샤샤’였지. 둘 다 고심해서 이름을 지었을 거야.”
“끼어들지 마. 므아나, 나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한참 전부터 주군을 태초라고 불렀어.”
결국 므아나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었다.
“아쉬움이 뚝뚝 넘쳐흐르는 얼굴로 날 바라보던 때가 아직도 생생해. 귀여웠는데.”
이번엔 자갈이 빠각,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 또한 듣지 못한 필립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왜 이 시간에 태초 님의 시간을 청했는지 아십니까?”
“…음.”
“당황스러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품…….”
따악―!
말을 채 잇지도 못한 채 필립이 머리에 돌을 맞고 풀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