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어떡해, 데아야……. 어떡해, 눈을, 눈을 안 뜨는데,”
“…길드장님은요?”
“저, 저기, 저기.”
저 멀리 권도언과 눈이 희번덕 돌아간 칸나니아가 맞붙고 있었다.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로 거센 힘이 파동을 그리며 충돌했다.
“언니, 지금 당장 이동 스크롤 찢어서 나가요.”
“그래야지, 이제 더는 지체할 수 없지, 그래야지…….”
하영주는 절반쯤 넋이 나간 채로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그리고 이동 스크롤을 찢으려는 찰나.
“너도 같이 나가. 지금 위험해.”
“나는…….”
“저 인어가 갑자기 튀어나왔어. 갑자기 튀어나와서 밖에 있던 가윗을 공격했어.”
하영주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저 거창으로,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집을 부수고… 그, 그대로 돌진했어……. 길드장님 아니었으면 나, 나까지 죽었을걸? 저 인어 진짜… 진짜 위험해, 데아야.”
이제까지 본 인어랑 달라. 많은 것이 달라…….
하영주가 데아의 팔을 꽉 붙들었다.
“너까지 다치면 안 돼……. 그럼 나는 정말로…….”
하영주의 눈에 가득 들어찬 절박함에 데아가 말을 잃은 순간이었다. 저 멀리, 공격의 흐름이 변했다. 그 순간, 해룡이 비명을 질렀다.
쩌억 입을 벌리고 돌진하는 건 다름 아닌―
“그래, 인정할 수 없어―!!”
데아를 향해 달려드는 칸나니아였다.
해룡은 칸나니아의 왼팔을 거칠게 물었다. 우드득, 살점과 뼈가 분리되는 소리가 들렸지만 칸나니아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해룡의 공격을 무시하고 데아를 향해 들이닥쳤다.
거친 암흑이 데아의 정수리 위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하영주가 지이익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중급 이동 스크롤. 단 몇 초 동안만 유효한 탈출구가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순간, 칸나니아는 목표물을 변경했다.
거창의 끝이 하영주를 향했다.
“안 돼―!”
곧장 데아가 칸나니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경배의 끝이 붕대를 감은 칸나니아의 복부를 또 한 차례 꿰뚫었다. 그러나 칸나니아는 아예 그 검을 잡고서는 계속해서 데아에게 돌진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장면에 하영주는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내가 증명할 수 있어. 혹여나 태초가 맞는다고 해도, 내가 뺏으면 돼. 그러면 돼!”
“저 미친!”
복부의 상처가 더 벌어지고, 푸른 피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믿을 수 없는 참상에 모두의 발이 굳어버렸다.
칸나니아의 목표물은 하영주였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함정이다. 예상했지만, 데아는 그를 막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영주의 이마를 조준한 거창의 끝이 빠르게 다가왔다.
“데아 씨!”
저 멀리서 굳은 권도언이 소리를 질렀다. 해룡은 온몸을 뻣뻣하게 굳혔고, 하영주는 가윗을 안고는 숨을 멈췄으며, 그들 틈에 함께 있던 데아는… 유일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던 데아는, 가장 최선의 행동을 취했다.
“가!!”
데아는 거칠게 하영주와 가윗을 밀었다. 데아에 의해 하얀 게이트 안으로 두 인영이 무력하게 밀려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푸학―!
“데아야―!!”
데아는 속절없이 고꾸라졌다. 복부에 거대한 거창이 들이박힌 상태였다. 뜨거운 붉은 피가 손바닥과 다리를 적시고 바닥을 메꿨다.
“안 돼, 데아야……!”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하영주가 발악하며 나서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하영주와 가윗이 사라지는 동시에 게이트가 점멸하듯 사라졌다.
“이데아!”
머리가 웅웅 울리고, 미친 듯이 두통이 치밀었다. 데아는 제 입 밖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창의 돌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예 작정을 한 듯, 물고기를 창살에 꿰듯이 데아를 꿰뚫은 거창은 직, 지직 끝없이 데아를 밀고 나갔다.
‘미친, 장난 아니게 아프다…….’
“하, 하하, 역시 그랬군. 너… 너는 태초가 아니었어. 내가 증명할 수 있다고 했잖……!”
칸나니아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 칸나니아의 몸의 절반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러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피가 울컥이며 나오는 소리 그리고 갑작스러운 화염에 둘러싸인 인어가 지르는 비명만이 거칠게 주변을 돌아다녔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칸나니아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권속이 주군에게 치명상을 입히면, 그 권속은 죗값을 받는다.
머릿속으로 차오른 단 하나의 생각. 그 생각이 스치는 그 순간, 이데아의 배를 꿰뚫었던 거창이 뽑혔다.
“컥, 커헉…….”
불타오른 인어, 칸나니아가 무언가를 토했다. 주먹 크기의 동글한 돌은 데구르르 둘러가 바다에 빠졌다. 저게 마석이던가. 그 주먹만 한 돌을 바라보던 데아는 머리가 새카매지는 기분을 느끼며 추락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칸나니아의 거창이 몰고 간 섬의 끝, 데아는 거부할 수 없는 고양감을 느꼈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났으면…….’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작은 소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늘이 갈라지고 벼락이 내리꽂혔다. 바다의 흐름이 거칠게 맴돌고, 숨찬 뇌우가 기세를 높여 부르짖었다.
저 멀리, 위험한 예고를 담은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데아가 마지막으로 본 건, 불을 끄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칸나니아와 부서진 집 밖으로 나오는 이리나 할머니. 그리고 미친 듯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다가 멈칫하는 해룡과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손을 뻗는 권도언이었다.
데아 또한 손을 뻗었다. 양 손의 손끝이 스치고, 그대로 멀어졌다.
검은 파도가 게걸스럽게 인영을 먹어 치웠다.
첨벙―!
순식간에 두 귀가 멀었다. 온몸을 잠식한 추위 속, 데아는 천천히 차오르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이건 나를 잡아먹는 파도인가, 모두를 껴안는 생명인가.
붉은 피가 바다에 흠뻑 번졌다. 이렇게나 출혈이 많은데 바다에 빠졌으니 지혈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게 끝이었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몸은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미친 듯이 비구름을 몰고 다니던 날씨는 햇빛조차 가려버렸다. 모든 것이 어두웠다. 저 멀리 간신히 불을 끈 칸나니아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자신에게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의 절반이 너덜너덜해지고 날아간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기세만큼은 흉흉했다.
칸나니아의 시선이 데아의 머리. 정확히는 뇌가 있는 쪽에 닿았다. 데아는 그가 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설마 그게 축복이라고 여기는 걸까.’
그러나 그 마지막의 마지막, 데아는 자신에게로 몰려드는 무수한 그림자들을 보았다. 하나 둘, 셋…….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소리가 머리를 간지럽혔다. 작고 음울한, 그러나 명랑한 음성들.
그건 크고 작은 하급 인어였다.
―바… 지… 켜―!
―…다… 셔라―!!
바글바글 모인 하급 인어들은 군대처럼 주군을 호위했다. 데아를 감싸며 칸나니아를 경계했다.
그때, 거대한 암석이 나타나 칸나니아와 데아 사이의 길을 차단했다. 데아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한 치 구분도 가지 않는 암흑 속, 건장한 인어가 물끄러미 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아는 그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헤타.
짧은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마지막 1세대 인어.
‘아, 이것 봐. 역시라니까.’
꿈속에서 비슷한 얼굴을 보았을 때는 설마설마했었지만 정말이었다. 저 사람도 인어였을지 누가 알았겠어. 꿈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헤타는 도와주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데아는 더 어두운 심해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급 인어들 또한 하나둘 데아를 따라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그리고 이윽고, 데아의 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부딪혔다.
가라앉은 거대한 인어 제국에 대한 전설을 아는가? 트리야에게 왕위를 내어 준 므아나가 저주와 함께 퍼부은 그것. 태초가 없는 제국에는 태양조차 들 수 없다며 만들어 낸 거대한 동굴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아무도 부술 수 없다던 동굴. 데아는 그 위에 늘어지듯 누웠다.
이제 한계였다. 미친 듯이 졸음이 몰려들었다. 방금 전까지 타오르듯 아파오던 모든 고통과 통증이 희미해졌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고가 느릿하게 멈췄다.
그러나 그때, 흰 빛무리가 어른거렸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 빛 무리의 형체가 변했다. 아주 먼 옛날의 태초, 누군가의 실패작으로부터 시작된 인어의 역사. 그 시발점이자 종착지에 있는 영원이 데아에게 속삭였다.
―모든 것은 준비되었어. 이제 네가 하기에 달렸지.
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태초는 데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지. 변하느냐, 마느냐. 그러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단다.
선택지. 데아는 저도 모르게 제 손에 쥐어져 있는 크고, 맥동하는 마석 두 개를 발견했다.
불현듯 데아는 그 마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건 이전에 칸나니아가 흘린 그의 마석과 SS급 던전 속에서 나온 피파글랜의 마석이다.
―둘 다 먹어.
‘왜 자꾸 먹으라고 해?’
―태초는, 모든 것을 삼킴으로써 만들어지는 존재. 결국 바다를 삼켜 바다가 된 존재.
태초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작은 빛무리가 되어 마석 속에 섞여 들어갔다.
모든 것이 정지하는 거대한 심해 속, 거친 폭풍우가 이는 바다 아래는 이리도 평온했다.
―먹어. 먹도록 해. 삼키고, 태초가 되도록 해.
아주 작은 기생 생물. 작은 뇌의 일부가 명령했다.
―이대로 저걸 먹고, 죽어.
―자기야.
경배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돼. 모든 건 어렵지 않아…….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괜찮을 거야……. 데아를 달래는 목소리가 우울에 젖어 있었다.
데아는 작게 웃었다. 모든 것이 한 편의 희극 같았다. 지독하게 불행해서 비극과 구별이 가지 않는 희극. 그 우스꽝스러운 연극 속 불행을 도맡은 주연이 된 기분이다.
데아가 그 모든 마석을 먹어 치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단지 너희들에게 안전한 세상이길 바랄 뿐이야. 공존할 수 없다면, 없애버리면 될 일.”
그날, 대륙의 모든 인간이 죽었다. 인어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단 한 명의 인간을 제외하고.
태초의 의지에 따라 천지가 요동 치고, 거대한 제국이 솟아났다. 절반은 바다 위에, 절반은 수면 아래 잠겨 있는 거대한 대륙은 모든 인어들의 낙원이 되었다.
황무지가 된 인간들의 나라는 해일에 뒤덮였다. 모든 건축물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자 남은 건 비옥한 토지와, 넓은 황야뿐이었다. 대부분의 인어는 수면 아래 있는 제국 아래에서 터전을 꾸리고 살았지만, 인간의 다리에 익숙한 몇 인어는 땅 위를 노닐며 마음껏 뛰어다녔다.
―이건 뭐예요? 이상한 물건이 있어!
“뭐, 뭐야?”
어느 순간 땅 위에서 인간들의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도라안은 반짝거리고, 신기한 모양새를 가진 물건에 가장 많은 흥미를 가진 인어였다. 도라안을 시작으로 많은 인어들은 과거의 인종에 대해 궁금증을 품기 시작했다.
“원래 인어와 인간은 공존했다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종교 하나 때문에…….”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영생을 산다는 비틀린 인간들의 종교. 그것 하나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더 다양한 종족과 교류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안타까운 의견이 인어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진짜 머리까지 어류가 된 걸까……?”
트리야는 기억력이 짧은 머저리들의 헛소리라며 화를 냈지만, 수백 년 시간이 지나자 그런 의견은 다수가 되었고, 곧 여론이 되었다.
태초가 ‘창’을 연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