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네 이름은 칸나니아야. 글자로는… 이렇게 쓰지.
칸나니아. 여섯 번째로 태어난 1세대 인어. 그는 인생의 첫 번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은 괴물이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칸나니아는 태초의 본질을 단번에 간파했다.
―감사…합니다.
―뭘.
그의 등 뒤로 네 명의 인어가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부화 직전, 밖의 소식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기에 그들의 이름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릴리므아나, 움, 피파글랜 그리고 도라안. 그러나 자신이 찾던 하나의 인어는 없었다.
―트리야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도라안은 휙 등을 돌려 달아났다. 트리야는? 나한테 슬픔과 비참함을 알려 준 그 인어는 어디 있어?
트리야가 알을 차례차례 깨부술 때, 유일하게 그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한 칸나니아는 세상 밖으로 눈을 뜨고도 그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너 정말 멍청하구나.
나중에 그를 발견한 트리야는 보란 듯이 비웃었다.
―죽을 뻔해 놓고 나를 동정하려 들어? 이건 뭐 멍청한 건지, 주제를 모르는 건지.
―왜? 그러면 안 됩니까?
―아니. 돼.
트리야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웃었다.
―어디 한 번 나를 동정해 봐.
그러나 칸나니아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트리야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차례차례 그에게 도전한 도라안이 볼썽사납게 떨어지고, 칸나니아 또한 트리야에게 대련 신청을 했지만 졌다.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코피를 뚝뚝 흘리던 칸나니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너를 이길 수 있나 없나. 없다면 얼마나 힘의 차이가 날까. 칸나니아는 그것이 궁금했다. 과연 내가 계속 너를 동정해도 될지, 그게 참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그날, 트리야는 칸나니아를 아주 혹독하게 두들겨 팼다.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칸나니아를 손봐 주었다. 하나의 고깃덩어리처럼 퉁퉁 분 칸나니아를 본 피파글랜이 놀라 태초를 부르기 전 까지 대련은 계속되었다.
태초는 트리야를 흘끗 보고는 칸나니아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다.
―원하던 답은 얻었니?
소름끼치도록 자신의 권속을 잘 아는 태초. 칸나니아는 이 순간이 몹시도 불편해졌다.
―…네.
―그건 다행이군.
그리고 태초는 밤늦게까지 칸나니아의 곁에 머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트리야와 여행을 떠나며 느끼고 본 그 모든 세상이 그의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칸나니아는 그 순간, 몹시 두려운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감히 트리야를 동정하던 자신은 그를 숭배하게 되리라. 지금도 그에게 찬란한 세상을 보여 준 태초에게 시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스르륵, 문이 열리고 트리야가 들어왔다. 칸나니아가 움찔 떨었다.
―왜 여기 있죠?
―먼저 방에 돌아가 있으렴.
―나랑 같이 가요.
트리야는 태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나한테 겁 없이 도전했다가 대가를 치룬 머저리는 여기 두고.
―트리야.
그리고 태초는 침묵했다. 침묵을 견디던 트리야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칸나니아를 섬뜩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트리야가 떠난 후, 칸나니아의 얼굴을 본 태초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원한다면 트리야가 너에게 접근하지 않도록 막아 줄 수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태초의 투명한 눈동자가 시리도록 하얗게 빛났다.
―아무래도 너에게는 그 반대의 말을 해야겠구나. 트리야가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그날 밤, 산들바람처럼 웃는 태초를 보며 칸나니아는 역모를 꿈꿨다.
트리야가 당신에게 저 정도의 신뢰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시간일 것이다. 그에게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고, 수천 년간 함께한 대가로 당신은 트리야의 신뢰를 받아 갔다. 그렇다면 나도, 트리야에게 가장 높은 곳을 가져다주면 똑같은 신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인어는 위험한 생각을 품었다. 잿빛 눈에서 피비린내가 스쳐 지나갔다. 권속의 본능은 주군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그건 완벽하지 않다. 지금 당장 불경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그것을 증명했다.
권속과 주군 사이의 연결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트리야의 신뢰의 방향을 태초에서 나에게로 이끌 수만 있다면, 위태롭고 강한 그 인어가 진심을 다해 나를 신임하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데.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태초가 죽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아서 쓸려 나가 주었다. 기쁨을 느껴야 자명한데 권속이랍시고 눈물이 나오는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가만히 태초의 시체 조각을 움켜잡던 트리야가 벌떡 일어선 것이다.
―잘 들어. 다시 돌아온 태초는 태초가 아니다.
―뭐? 미쳤어, 트리야!
―아니, 돌아오지 않아. 영원히 죽었어. 이다음 대의 왕위는 내가 잇는다.
―므, 므아나 언니, 트리야가 미쳤나 봐.
―태초는 돌아와!
칸나니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 점차 험악해지는 주변을 훑고, 치밀하게 아군과 적군을 분리했다.
므아나와 윌로 그리고 움은 곧장 태초를 찾으러 갈 가능성이 농후한 적군이고, 피파글랜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그러나 아마 적군에 가깝긴 하겠지. 헤타는 큰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하니까 아마 중립을 택할 가능성이 크고 도라안은… 여기서 승기를 잡은 편에게 달라붙을 것이다.
정리를 마친 칸나니아는 트리야의 옆에 섰다.
―트리야 말이 맞아. 적임자는 그뿐이다.
―칸나니아, 네가!
―그렇게 돌아온 태초가, 태초일 거라고 그 누가 증명하지? 이제까지 태초가 죽어 돌아온 걸 본 적이 있는 인어가 여기 있나?
정적이 휘몰아쳤다. 태초는 처음으로 죽었다. 당연히 돌아올 거라고 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직접 목격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모두가 확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
그때 트리야가 칸나니아를 돌아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트리야는 이내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자신에게 보여 준 최초의 미소. 비록 그게 비웃음일지라도 너무나도 기꺼워 칸나니아는 황홀해졌다.
―당신을, 나는 당신을.
그의 옆에 서있길 잘 했어. 그를 응원하길 잘 했어.
―평생 옆에서 보필할 수 있습니다. 충성을 바치게 해주십시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당신에게 충성을 바칠 유일한 신하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드높은 곳에 당신을 올릴 유일한 인어야. 나를 봐줘. 내가 당신을 마음 놓고 숭배할 수 있도록, 그 누구보다 고귀해져.
―그래도 됩…니까?
―마음대로 해.
먼 옛날, ‘어디 한 번 나를 동정해 봐’라고 비아냥거렸던 때와 같은 어조였다. 그럼에도 칸나니아는 드높은 곳을 비행하는 것 같았다. 꿈이 이루어졌다. 당신이 나를 신뢰하게 될 건 시간문제다. 내가 당신의 칼이 되어 승리를 안겨 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었던 때가 있었다.
칸나니아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사경을 해맸다. 왜, 왜, 샤샤가 왔지? 이렇게나 빨리 샤샤가 왔지? 때는 머지않았었는데!
트리야가 마음껏 횡포를 저지르는 제국아래, 칸나니아는 남몰래 때를 기다렸다. 트리야가 오롯이 자신을 신임할 때를, 내가 찬양하는 인어가 나를 인정해 줄 그때를.
그때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샤샤, 태초의 뇌를 삼킨 인간이 제국 안으로 들어왔다. 트리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칸나니아로부터 신임을 거둬 갔다. 신뢰는 고스란히 뺏겼다. 샤샤라는 작은 인간의 기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직접 손목을 자르던 칸나니아는 비참함에 비명을 질렀다.
태초의 기억도 없는 그 자를 과연 태초라고 볼 수 있는가? 태초의 조금도 닮지 않은 그 한낱 인간에게 다 뺏길 신임이 아니었다. 감히, 어떻게 감히…….
태초가 사망하고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던 약점 파훼와 바다의 검을 그대로 구현한 인간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태초의 일부를 거둬 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쉽게 그에게서 호의를 얻어 낼 수 있다니, 그럴 거였으면, 차라리, 차라리.
‘태초의 뇌를 내가 먹는 게 낫지 않나?’
비참함에 마비된 이성은 생각하는 법을 몰랐다.
칸나니아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냐!”
―칸나니아 님! 그게…지금 영면식 중에 침입자가……!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칸나니아가 쥔 거창에서 기이하고도 불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주인의 마력에 공명한 무기의 포효였다.
“남아 있는 모든 군대를 끌어내라. 지금 당장 위쪽으로 참전한다.”
―예?
“변절자들의 본거지가 그곳에 있다!”
샤샤가 창을 통해 넘어올 때, 같이 넘어온 인간들이 이리나 할멈의 섬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았던가? 그런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역시나 때를 기다렸을 뿐.
“지금 당장 간다!”
―예!
칸나니아는 아수라장이 된 제국 아래 대신, 위로 샤샤를 유인해 냈다. 지킬게 많은 곳에서는 누구나 연약해지지. 동쪽의 감옥 아래에서 친히 알려 준 가르침을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
◈ ◈ ◈
그리고 지금.
“이게 무슨…….”
곧장 칸나니아를 쫒아 포탈 위로 올라온 데아는 신음했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풍우 사이로 붉은 잔상이 거침없이 돌진했다. 최대한 빨리 올라온다고 올라왔는데 너무 늦어버린 모양이었다.
“데아야!”
데아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곳에는 붉은 피를 철철 흘리는 가윗과 그를 껴안은 하영주가 있었다.
“가윗…….”
가윗의 낯은 새파랬으며, 상처는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 속으로 울컥이며 피가 번졌다. 지독한 피비린내에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