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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26화 (126/223)

※ 126화

사건의 시발점, 트리야는 그때부터 데아를 알고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밖에 답이 나오질 않았다.

트리야는 태초를 지키고자 했다.

그를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고, 결국은 죽게 한 그 위험한 자리에서 끌어내려 안전하게 보존하고자 했다.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 데아는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트리야의 머리에 여전히 꽂혀 있는 하얀 산호 장식을 고쳐 매어 주었다.

트리야가 데아에게 그토록 잔인하고 다정했던 이유.

단순했다. 그는 정말로 내가 안전하고 평온하기를 바랐으니까. 능청스럽게 아부를 떠는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파티나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나를 위험하게 하는 제국이 죽고, 모두가 멸망하면 다시 둘만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단순했다. 트리야는 누구의 주군도 아닌 태초, 그 어떤 의무도 가지도 있지 않은 태초, 먼 옛날, 자신과 함께 한가롭게 여행이나 다녔던 그때 그 시절의 태초를 다시 한번 더 지키고자 했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누구는 내가 태초의 자격이 되는지 시험이나 하고 자빠졌는데…….”

그 누구보다 태초를 인정하지 않을 것 같던 트리야는 그 어떤 거부 없이 데아를 태초로 인지했다. 그리고 기회라 여겼다. 인간계에 있다면, 영원히 안전할 수 있겠지.

그래서 데아는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가 안착한 곳은 광활한 도박판 위.

“그래서 날 구했어? 강원도에서?”

트리야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잭팟.

분명 처음은 우연이었을 거다. 태초의 뇌를 추적하고 추적하다가 온 곳이 바로 강원도의 별장이었겠지. 물건을 찾으러 왔다던 칼리안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목격했겠지. 칼리안에게서 도망치고 있던 데아를.

그 순간, 트리야는 분노했다. 태초가 ‘주군의 의무’를 지키려 하다가 어떤 몰골로 죽었는지 뻔히 아는 것들이 감히 그를 다시 잡아끌고 오려고 하고 있다니. 바다는 태초의 가장 많은 힘을 물려받은 인어의 감정에 공명했다. 그렇게 해일이 몰려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앙 속에서, 태초는 자신의 주군을 구해 냈다. 저 멀리 사라지는 칼리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정신을 잃은 상처투성이의 15세 이데아의 팔을 잡았다. 미처 다 자라지도 못한 작고 연약한 체구를 품에 안고 홀로 파도를 거슬렀다.

“…….”

해일이 사라진 직후, 데아를 바위 위로 올려 둔 트리야는 동이 터 오는 고요한 해수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까지. 트리야는 눈을 감았다. 이것까지는 몰라도 되지.

“어쩐지. 이상한 점이 많더라니.”

태초를 그 누구보다 증오하는 듯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군사 집단의 인사는 ‘태초를 위하여’ 어떻게든 왕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제국을 천천히 멸망으로 이끄는 폭군. 본인도 그걸 알고 있고, 심지어 의도했다는 게 최고의 웃음거리다.

데아는 작게 웃었다. 트리야는 미성숙한 어린아이다. 본인의 마음대로 되지 않자 생떼를 쓰는 아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결말을 위해 거짓 없이 가치관을 내보였던 단 하나의 권속이었다.

오직 네가 생각하는 나를 위해 살육을 저지른 독재자. 그러니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제왕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데아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간부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데아를 향해 창을 들이댔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다가가질 못했다.

“연구실에서 날 구해 준 것도 너야?”

여기은에게 납치당한 한 달. 약을 맞고 망연하게 누워 있던 그 순간에 들이닥치던 파도 소리와 발소리를 기억한다. 동시에 으깨지던 벽과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던 물 또한.

“…….”

트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아는 소리 없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 그랬구나. 조용히 몸을 일으킨 데아가 등을 돌렸다. 백리서가 뚫어져라 데아를 보고 있었다.

“이제 할 말은 다 끝난 거지?”

그러곤 검을 고쳐 잡으며 개구지게 웃는다. 데아는 대답 없이 휙 옆을 지나쳤다.

“데아야, 너는 어떤 게 더 좋아?”

싸움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남는 건 다시 타오르는 일뿐인데, 왜.

“뭐가요.”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봐. 하나, 여기서 트리야를 내가 죽이고 사형수들을 구출해서 새로운 왕위에 오른다. 둘, 여기서 트리야를 데아, 네가 죽이고 사형수들을 구출해서 왕위에 오른다.”

“셋. 둘 다 내 앞에서 영원히 꺼진다.”

“꺼지라니.”

이미 늦었다며 웃던 백리서는 네 번째 문항을 읊었다.

“이건 어때. 넷. 사형수들과 여기 있는 모든 목격자들을 죽이고 훌쩍 떠나버린다.”

“뭐?”

“어떤 게 좋아? 하지만 너는 저 인어들이 죽으면 슬퍼할 거잖아.”

“지금, 지금 장난해요?”

데아는 문득 떠오르는 억울함에 이를 갈았다.

“언니는 뭐 나한테 잘한 줄 알아? 아주 진짜…….”

“움의 독단은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어. 미안해.”

“그게 무슨…….”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내가 여기서 용서를 빌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수습을 할 거야. 네 화가 그나마 풀릴 법한 수습을 말이야.”

“…….”

“…그렇기에 나는 네가 바라는 선택만 실행에 옮길 거고. 트리야의 목을 틀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 순간, 그림자가 켜켜이 다가오는 착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두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데,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잖아요.”

미안해요, 속여서.

백리서는 결국 앓듯 웃었다. 마지막 말은 한숨과 닮아 있어서, 데아는 차라리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제왕님!

―제왕님이 여기 계신다!!

―므아나 님! 이리로 오십시오!

간부들은 트리야를, 그리고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인어들은 므아나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백리서는 데아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 제외한 모든 것에 감정이 결여된 인어, 완벽한 연기자.

“주군은 뭘 원해요?”

연기자가 우울을 연기했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라는 권속의 행태가 참으로 기가 막혔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양새가 어이없었다.

가만히 있던 나를 슬슬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더니 갑자기 혼자 제왕으로 즉위하란다. 아, 진짜 싫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지 못한 요소가 하나 있었다. 데아가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데아는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고, 도피하고 싶었다. 그런 충동을 깨닫는 순간, 데아는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지금 가서…….”

이게 네가 바란 내 모습이라면 해주지.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너에게 명령을 내릴 것이다. 가장 가학적인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충동의 방향은 자신이었다.

“사형수들을 살려 내!”

태초가 내린 거친 명령, 릴리므아나는 우아하고도 능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백리서는 한 걸음 내딛자마자 완벽한 인어로 변화했다. 어두운 물속이 갑자기 환해졌다.

트리야가 심해라면 므아나는 빛줄기였다. 가장 배타적인 태초의 권속 릴리므아나. 높은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게 추종자가 끊이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비늘이, 베일처럼 몸을 감싸고 늘어지는 지느러미가 퍽 아름답긴 했으니까.

“다녀올게요.”

“…….”

백리서는 그대로 등을 돌린 데아의 어깨를 두드릴까 잠시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지금 바로 지휘한다. 피파글랜의 권속들부터 위에 나가 있어!”

―예, 예!

“진영을 짜서 구출을 시행한다. 우선적으로 여겨야 할 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인어들이 곧바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싸우는 폭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한데 그건 안 돼.”

백리서와 데아가 한번에 고개를 돌렸다. 트리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유구한 규칙은 깨지면 안 되거든.”

트리야는 밑동만 남은 나무와도 같은 눈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간부들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남은 처형수를 한번에 꺼내 와라.”

“!!”

“내부에서 머리에 창을 박고 시체만 밖에 널도록.”

―알겠습니다!

그에 백리서도 맞서듯 소리쳤다.

“당장 간부를 공격하고 길을 뚫는다!”

―내부를 공격하라!!

―간부를 죽이고 인질을 꺼내!

“꽤나 큰일이지?”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트리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잡히는 건 길쭉한 창이었다. 바다의 경배를 닮은, 그러나 분명 다른 트리야 전용의 무기.

“아주 큰 패배를 하겠어. 이번이 두 번째군. 애석하겠어, 므아나.”

직접 전투에 참전해 너희들을 저지할거라는 예고를 한 트리야는 그대로 창을 겨누었다.

“나는 지면 안 돼. 난 제왕의 자리를 태초에게 내어 주지 않을 의무가 있거든.”

그렇게 다시 싸움이 맞붙었다. 거대한 물의 흐름이 비틀리고, 뭉쳐서 산산이 흩어졌다.

“샤샤를 지켜!”

백리서는 데아의 뒤에 서있던 두 인영에게 명령하고는 사라졌다. 샤샤, 데아가 아닌 샤샤라고 불렀다.

‘왜?’

괜히 입맛이 썼다.

―그… 저…….

그때, 뒤에서 우물쭈물거리며 데아에게 다가오는 두 모습이 묘하게 익숙했다.

“…다샤?”

―아이씨…….

예전에 자잔과 함께 맞서 싸웠던 다샤와 올리아가 낭패한 기색으로 고개를 떨궜다.

―우선, 지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눼에……. 둘은 곧바로 쭈글거렸다. 죽도록 싸웠던 대상이 알고 보니 태초라니, 딱 숨고 싶은 심정이긴 하겠지.

“…그런데 저거 뭐야?”

―네?

데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아스라이 멀어지는 작은 형체가 보였다. 어둠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잿빛 인영,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칸나니아가 무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섬으로 통하는 포탈을 넘고 있었다.

‘지금 뭐…….’

칸나니아의 손에 든 거창의 빛이 심상치 않았다. 붉은 빛이 넘실거리는 불길한 빛, 칸나니아의 표정은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도라안이 어떻게든 그를 만류하며 따라가는 게 보였다.

‘이위로랑 피파글랜은 어디에 가고?’

그 생각하자마자 저 아래서 이위로가 튀어나와 칸나니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애초에 무기의 위력이 달랐다. 결국 몇 번 맞부딪치던 이위로가 밑으로 추락했다.

“이위로!”

그때, 칸나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소름끼치게 웃은 칸나니아가 포탈을 넘었다. 일전에 도라안 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군대 또한 줄줄이 넘는 게 보이자 머리에 피가 올랐다.

이건 함정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저건 나를 유인하기 위한 덫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지 않으면 섬 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 줄 모르기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권도언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권도언은 어떻게 되든 잘 살 것 같으니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영주와 가윗은?

A급 공격수와 A급 힐러일 뿐인 그 둘은?

“리서 언니! 백리서!!”

저 위에서 아슬아슬한 근접전을 지속하는 백리서에게 소리쳤다.

“칸나니아가 섬 위로 올라갔어요! 거기에 영주 언니랑 가윗이 있는데!”

“그들이 중요한가요?”

그 순간, 뭔가가 뚝, 하고 끊겼다. 갑자기 조용해진 데아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다샤와 올리아만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지.”

데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곳이었지.”

그리고 경배를 휘둘러 올리아와 다샤를 공격했다.

―흐아악!

―태, 태초님!

데아는 미친 듯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검을 피하다가 나동그라진 그들을 뒤로하고 거대한 제국의 결계를 넘었다.

―어서 가지!

해룡이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했다. 데아는 해룡의 등 뒤로 올라탔다. 뺨을 아프도록 때리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며 포탈을 통과했다. 아득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가윗이랑 영주 언니는 지켜야 해. 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았을 인간 세월 중, 유일하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들. 거짓이 아닌 존재들.

무수한 거짓 속에서 유일하게 진짜로 어울렸던 관계들.

데아는 반드시 그 시간들을 지켜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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