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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25화 (125/223)

※ 125화

“리서… 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

“어, 나? 당연히 널 찾아 왔지. 어쩌다가 소란스러운 구역까지 흘러왔지만… 역시 있었구나.”

“아니, 이 물속에 어떻게 있어요?”

“아, 그건.”

백리서는 평소처럼 웃으며 손목을 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두 개의 팔찌가 찰캉찰캉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러나 데아는 마주 웃지 못했다. 대신 그의 어깨 너머, 푹 후드를 쓰고 서성이는 낯선 그림자를 보았다. 그들의 후드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 또한.

“이거 권도언이 만든 수중 호흡 팔찌잖아. 그 쓸데없는 연구실을 왜 만들었나 싶었는데, 가끔 이렇게 쓸모 있는 일도 하더라고. 덕분에 이렇게 와서―”

“언니.”

데아는 백리서의 손을 맞잡았다. 눈이 휘었다. 무척이나 다행이라는 듯이.

“그나저나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 언니가 죽은 줄만 알아서…….”

“뭘. 그런데… 그 모습은 뭐야? 새로운 스킬? 신기한 스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 상상 이상이다.”

데아는 환하게 웃었다. 백리서는 마지막 기억 속의 모습과 변함이 없었다.

“어색하지 않아요?”

“아니 전혀.”

백리서의 손가락이 검은 지느러미를 스쳤다.

“예뻐.”

“그쵸.”

“응. 대단해. 나중에 돌아가면 꼭 다 말해 줘야 해?”

“아, 당연하죠. 돌아갈 수야 있다면요. 그런데 언니, 이 안에서 얼마나 있었어요?”

데아는 모든 것의 거짓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 물속예요.”

“나? 꽤나 오래 됐을걸.”

“오래요? 며칠?”

“그렇지. 길을 못 찾아서 큰일이 날 뻔했다니까. 살아 있는 게 기적이야.”

“위에서 길드장님이랑 가윗이랑 영주 언니랑 한참 찾았는데 언니가 안 보여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백리서는 그 말에서 무언가를 간파한 모양이었다. 팔찌가 있을 게 분명한 그들이 물속으로 들어와 자신을 찾지 못한 이유.

“그건 그렇네요. 백리서는 팔찌에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데아는 권도언의 음성을 상기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의 수색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미 깔끔하게 지워진 채였다. 갑작스러운 웃음에도 백리서는 조용했다. 데아는 한동안 웃다가 백리서의 어깨를 잡고 끅, 흐윽, 숨을 뱉었다. 그대로 꽈아악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그 팔찌는 최대 두 시간짜리라던데…….”

웃음기 하나 없는 서늘한 음성이 백리서의 뇌리를 뚫었다. 고요한 음성 아래 묻힌 건 거대한 분노였다.

“길드장님이 말하는 걸 깜빡했나 봐요?”

“…….”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어깨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물이 잔잔하게 스치는 허공, 데아는 영원히 듣고 싶지 않았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가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이 ‘역시’라면, 과연 당신은 믿을까?

그러나 백리서는 가만히 데아를 응시했다. 그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무너진 건 데아였다.

변명이라도 해봐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리고 데아는 보고 말았다. 백리서의 인간 같지 않았던 눈동자 안에 넘실거리는 오래된 고대의 괴물을.

“…….”

릴리므아나의 애칭, 그건…….

“…릴림.”

백리서는 입꼬리만 올려 비소했다. 데아는 가까운 과거, 피파글랜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내 마석, 어떻게 했어요?”

피파글랜은 꽤나 정확한 힌트를 던졌다. 당신의 마석은 누군가가 훔쳐 가루를 내었어요. 그리고 주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마석을 다 섭취했어요.

데아는 마석을 먹으라 종용하던 상태 창을 기억해 냈다. 태초의 본질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어떻게든 인어의 마석을 먹는 과정이 필요한 거겠지. 그렇다면 추론할 수 있는 건 하나다. 내 마석은, 태초의 복귀를 원하는 인어가 직접 가루를 내어 나에게 먹였다. 그리고 백리서는 공략이 끝난 날이면 늘 나에게 디저트를 가져다 주었다.

―뭐야, 뭔데에? 뭐야? 벌써 저 스킬이 풀린다고? 데아야, 이데아, 너. 벌써 마석을 스무 알이나 처먹었니?

스무 알, 두 번째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섭취한 마석이 벌써 스무 알. 데아는 백리서의 멱살을 쥐었다.

“사실 하나도 안 놀라워요.”

백리서는 정신 병동에서 처음 세상에 나온 데아에게 휴대폰을 사주고, 노트북을 사주고, 같이 쇼핑을 가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원하는 음식을 사주었고, 고민을 들어주었고, 진심어린 조언과 훈련을 동행해 준 사람이었다. 그것에 속아 그를 좋은 사람이라 철석같이 믿었고, 더욱 신임했다. 어쩔 수 없었다. 데아에게 백리서는 새로운 세계의 따스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백리서만큼 사려 깊지 못했으므로.

“정말로.”

그는 연구실에 자신을 처넣은 권도언과 달리,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다른 사람과 달리, 그 누구보다 빨리 괜찮다고 말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다정하게 자신의 기분을 살피던 사람이었다. 날아오는 계란을 대신 맞아 주던 사람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천사같던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해도 데아는 그가 선하고 거짓 없는 사람이라 굳건하게 믿었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걸 예상 못했어요?”

스카웃 제의를 먼저 한 것도 백리서, 데아가 듣고 있던 오르골의 뚜껑을 닫아버린 것도 백리서, ‘샤샤’라는 헌터명을 지어 주고, 달리는 차 안에서, 잃어버린 가족이 있다며 쓰게 웃던 것도 백리서.

“내 기분이 이렇게 나락을 칠거라는 걸, 예상 못했냐고. 묻고 있잖아요.”

당신이 내가 배신감에 잡아먹힐 미래도 설마 예상하지 못했냐며 물었다. 백리서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멱살을 쥔 데아의 손을 떼어 냈고, 한쪽 팔에 걸려 있던 두 개의 팔찌를 떼어내 바닥에 버렸다.

완벽히 자유로워진 두 하얀 손이 데아의 양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 순간 위압감이 밀려들어왔다.

“못했을 리가.”

자잔의 말에 따르면, 두 번째 1세대 인어는 잔혹한 집행관이었다. 직접 인어의 처형을 도맡은 푸른 피의 사신. 태초에게 반발하는 자의 꼬리를 잔인하게 들어내어 자신의 충심을 증명했던 미치광이.

그때, 그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

데아의 몸이 돌려져 벽에 등을 부딪쳤다. 그 순간 작은 규모의 땅이 빠르게 튀어나와 데아를 감쌌다.

“뭐 하는 거야!”

백리서의 능력은 모래가 아니었다. 릴리므아나의 능력은 대지. 데아는 자신을 숨긴 땅을 쿵쿵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간신히 밖을 확인할 수 있을 작은 틈만 있을 뿐이었다.

‘백리서가 갑자기 나를 숨겼어. 왜지?’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입자를 찾기 위해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데아는 주먹질을 멈췄다. 틈 사이로는 백리서의 뒷모습만 보였다. 누군가 왔어.

―이 근처를 봉쇄하라!

―살려 줘! 나가게 해줘!!

―영면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써억―! 누군가의 목이 또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차갑고도 무거운 소리를 배경 삼아,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영면식은 계속되고, 백성들은 강제로 앉아 있다. 곧 거대한 싸움이 일어나리라는 걸 모두가 예감했음에도 아무도 대피하지 못했다.

―보아라! 변절자가 침입했다!

―제국을 배신한 변절자가 죗값을 치루는 장면을 보아라!

모든 이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데아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둔 땅을 매만졌다. 설마 나는 안전해진 건가? 주먹이 쥐어졌다.

―제왕님이 오셨다!

―위대하신 제왕님이 변절자를 처단할 것이다!!

어? 데아는 그제야 어른거리는 녹색 잔상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내려앉는 점화. 백 년의 시간을 돌고 돌아 마주한 두 전쟁의 주역.

무미건조한 표정의 트리야가 위에서 백리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백리서는 가볍게 비소했다.

“주제를 모르는 어류가 왔네?”

“샤샤는?”

“샤샤?”

“아, 그렇지. 꽤나 미련한 이름을 지어 줬더군.”

트리야가 조소하듯 웃었다.

“나에게 밀린 게 꽤나 분했던 모양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둘이 아슬아슬하게 대치하고 있는 이 장면을, 데아는 본 적이 있었다는 거다.

의식체로 존재했던 먼 과거의 파편, 벼랑을 부수고, 바다와 육지를 뒤바꾸었던 전쟁이 그대로 머릿속에 상영되었다.

지워졌던 기억 하나가 다시 되살아났다. 기생 생물이 가늘게 떨었다. 숨이 턱 막혔다. 목을 긁었다. 호흡이 부족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며 눈이 뜨거워졌다. 머리가, 머리가 아팠다.

“흐으으…….”

흐려지는 시야, 저 멀리 희미하게 손짓하는 누군가가 보였다. 잘 보니 그건 누군가가 아니라 그냥 흰 빛무리였다. 데아는 손을 뻗었다. 땅에 가로막혔다. 안 되는데,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벅벅벅, 이성을 잃고 벽을 긁었다.

쿠콰아아아아―!

콰과과과과―!

―흐아아악!!

“!!”

데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암벽이 많은 높은 지대, 암벽이 통째로 땅에서 뽑혀 나갔다. 거대한 굉음이 들리며, 천지가 개벽했다.

두두두두두!

거친 진동이 심해를 강타했다. 백성들은 앉아 있는 그대로 비명을 질렀고, 그들을 통제하던 간부들은 이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허겁지겁 꽁무니를 뺐다. 황폐한 세상의 유일한 점멸처럼, 트리야의 눈이 밝게 빛났다.

해류가 살아 있다는 듯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곧 기다란 창이 되어 손아귀에 잡혔다.

경배와 닮은 창, 데아는 문득 손을 쥐었다 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데아는 가만히 두 인어의 싸움을 방관했다. 저 멀리 거친 물살이 밀려들어왔다. 자신이 있는 쪽을 가려 주고 피해 주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백리서의 거친 언행이 다 들리고 보였다.

“…바보야?”

흰 빛무리가 놀리듯 데아를 현혹한다. 데아는 눈을 감았다.

“왜 돌아왔지? 너에겐 자격이 없다는 걸 모르나?”

트리야는 읊조렸다. 그는 가장 최소한의 동작으로 가장 큰 타격을 냈다. 트리야의 싸움에는 낭비가 없었고, 모든 행위에는 과도함이 거세되어 있었다.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는 물살, 태초의 능력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트리야는 숨을 쉬는 재해와도 같았다.

“그분의 자리를 채어 간 건 너야, 트리야!”

“그에겐 옥좌가 어울리지 않아.”

“네가 뭘 안다고!”

그러나 그 말은 트리야의 역린을 건든 모양이었다. 트리야의 목에 핏대가 섰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은 것을 했지.”

절대 크지 않은, 오로지 상대에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였지만, 데아는 다 들을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거대한 모험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데아는 곧장 경배를 휘둘렀으니까.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으니까.

“작은 나라의 구석에서부터 주군이 공격당할 때, 그의 존재조차 몰랐던 너보단!”

그건 기폭제였다. 와르르 그대로 터져 나온 구석, 백리서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트리야는 재빠른 침입자에게 허리를 내어 주었다.

푸학―!

푸른 피가 흩어졌다.

“……!”

파도가 일렁이는 장도. 그 누구보다 찬란한 발도를 마친 데아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트리야가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빠르게 피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존재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거칠게 부딪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데아는 마치 고열에 사경을 헤매는 사람 같았다. 이성과 무의식의 경계, 그사이를 헤매던 트리야의 머리 옆으로 장도가 퍽! 꽂혔다. 우드득 경배를 붙잡은 손이 비명을 질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잖아!”

작은 나라의 구석, 데아는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다. 강원도 해일을 말하고 있는 거다.

“너는, 너는…….”

수천 개로 흩어진 사건의 퍼즐 피스. 기어코 찾아낸 가장 중요한 중앙의 퍼즐이 손 안에 잡혔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요란한 경고음이 윙윙 울려 댔다.

문득 언젠가 보았던 기사의 댓글 중 하나가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15살 애가 바위잡고 해일에서 살아남음?ㅋㅋㅋ 말이 안 되는 거지.]

데아는 깨달았다. 이상하다 생각했지. 그때 왜 해일이 왔을까? 갑자기 강원도에 왜 예고 없이 해일이 들이닥쳤을까?

인어인 칼리안마저 속절없이 쓸려 나갔던 거대한 해일이었다. 어떻게 나는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 지긋지긋한 태초의 의무를 그만하고 싶다면, 이곳에 숨어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감옥에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 오로지 당신의 휴식을 위해 공간을 만들었다던 트리야의 표정이 뇌에 발자국을 냈다.

“넌, 넌…….”

어쩌면 너는…….

데아는 손을 떨궜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감겨들었다. 데아는 홀로 웃었다. 그래.

“넌…….”

모든 것을 추론했던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유일한 변수는 너였다. 트리야는 태초에게 배신당했다고 굳게 믿었지만, 결국 그를 용서했다. 트리야의 본질에는 태초가 깔려 있었으므로.

그렇기에 더욱 너는…….

“제국 전체를 죽이겠구나.”

네가 생각하는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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