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따라가고 싶은데, 안 되겠죠?”
“저기 있는 인어보다 헤엄 빨라요?”
“야속해라.”
“데아야, 벌써 가?!”
“와, 길드장님은 그 아이템을 몇 개나 가지고 계신 거예요?”
하영주와 가윗은 권도언이 인어들을 전부 물리치자, 마침 팔찌를 공급받기 위해 온 데아가 그 사태를 목격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데아는 보란 듯이 찰랑이는 수중호흡 팔찌를 여러 개 팔에 끼웠다. 그런 데아에게 하영주가 물었다.
“그런데 공격대장님은 아직 못 찾았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권도언은 저도 모르게 데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데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티끌 없는 말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찾고 있어. 그래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살아 계실 거라고 믿어. 찾으면 바로 연락 줄게. 내가 준 통신 소라 가지고 있지?”
“응. 부탁해 데아야. 큰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그래도 나도 나 나름대로 열심히 찾을 테니까…….”
그냥 이동 스크롤을 찢고 밖으로 나가도 될 텐데,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죄책감으로 매어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데아는 그런 하영주와 가윗이 안쓰러우면서도 좋았다.
내가 사귄 유일한 진실. 데아는 쓰게 웃었다.
“저 해룡은 뭐야? 펫 이런 거야?”
“응. 비슷해. 길가다 봤어. 사람 찾는 걸 도와주겠대.”
“와, 정말 던전 안에는 별게 다 있구나.”
“그럼 다녀올게.”
“그래. 잘 가!”
“해룡. 가자.”
길 가던 펫이 고개를 돌렸다.
―저 인간 남자의 눈이 좀 이상한데, 괜찮은 건가?
“권도언 눈깔 돈 거 한두 번 아니야. 괜찮아.”
―으음…….
데아는 해룡과 도라안을 이끌고 집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해수면을 향해 입수했다.
노을 진 수면 아래, 푸른 포탈이 어른거렸다. 검은 지느러미가 부채처럼 펼쳐졌다.
“동굴아래 갇혀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
“포탈로 나오면 되는걸요, 뭐.”
“포탈로는 다 출입이 불가능하니까 하는 말이지. 아님 말고.”
포탈을 넘고, 해룡을 따라 제국 외각을 천천히 돌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높게 세워지는 뭔가가 보였다. 처형대였다.
“이번에 트리야가 단단히 화가 났을 것 같아. 그냥 느낌이 그래.”
“일리 있죠.”
“영면식? 아무튼, 그 공개 처형식에 링과 알레가 처음으로 올라갈 것 같거든.”
“그럴까요?”
“그런데 분위기가… 원래 이래?”
사방에 포진된 경직된 백성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분위기는 늘 이러죠. 뭐.”
“아니 이 돌 같은 분위기 말고, 예상했던 거랑 조금 다른데.”
이어 보이는 건 유리 기둥 안에 세워진 단두대…와 비슷한 기구와 녹슨 칼날이었다. 줄을 당겨 위 아래로 썩둑 목을 자르는 형식 같았다.
“잔인해.”
“부정하진 않을게요.”
그때, 도라안은 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싫은 장소에 억지로 끌려 나온 백성들의 참담한 감정 뒤로, 옅은 흥분이 도사리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왔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백성들의 수가 많았다. 짙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자들도 있었다. 멀리서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철저한 은신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다. 발광석이 천천히 주변을 밝히고, 백성들이 지정된 자리에 모두 앉았다. 1공대 간부복을 입은 누군가가 단상위에 섰다.
―위대하신 제왕님을 향해 열창!
그리고 백성들이 다 같이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요한 환호 가운데, 한결같은 트리야가 드높은 제단 위에 등장했다. 백성들은 정확히 박수를 세 번 치고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사형수들을 호명하겠다! 우선 에프제인!
지친 기색의 삐쩍 마른 인어가 간수들에게 끌려 올라왔다.
‘첫 번째가 링이나 알레가 아니네?’
―이 자는 위대하신 제왕의 비석의 관리자다! 감히 제왕의 비석을 지키지 못한 죄, 사형을 선고한다! 이상!
에프제인은 곧장 간수들에게 또 끌려갔다. 그리고 단번에 처형당했다. 파학―! 푸른 피가 튀고, 시체가 떠올랐다. 데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광경을 봤음에도 표정 변화가 없는 백성들이 가장 소름끼쳤다.
“비석 관리자? 설마 저번에 내가 부순 그거?”
“아하. 주군이 부순 거였죠? 어쩐지. 소문이 자자하더라니.”
“내가 부쉈는데 왜 저 인어가 사형을 받아?”
“무능은 죄니까요.”
도라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이상하긴 하네요. 관리인한테는 한 번은 너그럽게 봐줄 법도 한데 이번에는 싫었나…….”
“무슨……!”
그리고 이어 다른 인어들이 나왔다. 그때, 데아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데아는 확신했다.
“어?”
금발이다.
◈ ◈ ◈
“이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피파글랜은 후드를 넘기며 작게 웃었다. 그림자에 몸을 숨긴 침입자가 그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피파글랜.”
“잘 지냈어?”
“지낸 것 같아?”
“음, 아니.”
‘영면식’이라 일컫는 허울 좋은 공개 처형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높다랗게 설치된 처형대의 아래는 그늘진 사각지대였고, 모두의 이목을 피하기 좋은 장소였다.
“가만 보면 쓸데없는 짓을 참 잘해, 피파글랜이.”
피파글랜은 상대의 하체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인간 다리다.
“윌로의 장난질에 같이 동참하기도 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선물도 보내고 말이야.”
그는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살기가 넘실거렸다. 피파글랜은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선물?”
“오르골. 노래가 나오는 검은 상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그런 것을 보낸 적이 없는데…….”
“뭐? 하지만 분명 네 편지가…….”
“내가 보낸 건 꽃 하나였지. 혹시 다른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
피파글랜은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는 그건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짜증스럽게 벽을 발로 찼다. 그것만으로도 후두둑, 금이 갔다.
“어어, 간부들이 이쪽을 돌아보게 하지 마.”
“고작 이거가지고.”
콰앙!
그때 또 누군가 처형당했다. 그림자 안에서 상대의 노란 눈이 번뜩였다.
“그래서, 상황은?”
“무사히 움의 거처 안으로 대부분의 혁명군들이 안착했어. 첩자 하나하고, 알레 빼고. 지금쯤 저 위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마 마지막 순서가 아닐까 싶은데. 그때를 맞춰 곧바로 난입할 생각이야. 몰랐겠지만, 지금 이 장소 안에는 움과 나의 권속들이 매우, 매우 많이 포진해 있거든. 혁명군도 치료가 필요한 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온 상황이야. 목표는 둘. 사형수의 구출과 트리야의 암살.”
“나도 못한 걸, 너네가?”
“너도 있잖아?”
“…….”
“트리야에게 끝을 줄 기회를 두고 보기만 할 네가 아니잖아? 넌 분명 우리들과 함께 나서서 트리야에게 공격을 할 텐데……. 내 예상이 틀렸나?”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뭐든지 안다고 생각하는 그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네. 피파.”
“틀렸어?”
“아니. 맞았어.”
어둠 속에 가려진 그가 사납게 미소했다.
“잘 보면 생각보다 성격이 급해.”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참, 너는 ‘영면식’을 처음 보겠구나. 계속 인간계에 있었으니까. 그렇지? 넌 잘 모르겠지만 정말 오랫동안 영면식이 진행될 거야. 꼬박 반나절은 걸릴 걸. 때가 오려면 좀 멀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쉬어 놓…….”
“여기서 다들 뭐 해?”
얼굴을 가린 이위로가 피파글랜의 옆으로 찰싹 다가왔다. 상대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 여실했다.
“데아 언니 봤어? 저 위에 있는 거 알아? 해룡이랑 같이 있어!”
“그래 방금 봤어. 그런데 해룡 말고, 다른 이물질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
피파글랜은 이위로와 눈을 마주했다. 행동은 신속했고, 단호했다. 이위로는 곧바로 피파글랜의 손을 잡고 순간 이동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데아는 등 뒤에서 감아오는 양팔을 느꼈다.
“어?”
“으학!”
데아는 그대로 뒤로 끌려졌으며, 분명 아까 옆에 멀쩡하게 서있던 도라안은 나가떨어졌다. 데아는 섬광처럼 도라안을 후드려 패는 보랏빛 잔상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미친, 존나 반갑다. 이 음습한 새끼야!”
“아! 악! 아니, 왜! 허, 위, 윌로??”
“왜 데아 언니랑 같이 있어? 이런 으슥한 구석에? 폭군의 따까리 짓이 지겨웠나? 소리 지르려면 질러 봐, 어차피 비명 질러도 안 들려.”
이위로는 말 그대로 수산물을 때려잡듯이 도라안을 두들겼다. 그 속에서 데아는 평범하게 깨달았다.
‘아, 둘이 사이 여전히 안 좋나.’
“걱정했잖아요. 분명 연락을 받았는데 나오질 않고, 건물은 무너져서.”
피파글랜이 제 품에 갇힌 데아를 풀어 주며 우아하게 웃었다.
“하급 인어를 타고 온 유리와 트리야의 권속을 보기 전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아, 맞다. 미안. 갑자기 칸나니아가 습격해서. 둘은 잘 도착했어?”
“그럼요. 잘 확인했답니다. 물론 지금은 저기 인파에 숨어 있지만.”
“잘 도착했으면 됐어.”
“아, 항복, 항복, 항복!!”
저 멀리 도라안이 결국 양팔과 꼬리를 들어 올려 죽는 흉내를 냈다. 너무나도 쉬운 굴복에 정적이 깔렸다.
“내가 다 설명할게.”
그리고 상황을 간단히 전해들은 피파글랜과 이위로는 여전히 납득가지 않는 표정으로 도라안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자업자득인지라, 데아는 모른척했다.
“결국 주군이 돌아온 것 같으니까 살살 내뺀 거잖아?”
명쾌한 요약이다.
이전보다 주눅이 든 도라안과 포위하듯 그를 감싼 이위로, 나긋나긋하게 추궁하는 피파글랜과 그 모든 일련의 상황을 방관하는 해룡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런 구석의 아수라장에서 살짝 벗어난 데아는 다시 처형대로 고개를 돌렸다. 몇 번째일지 모를 사형수의 시체가 둥둥 떠올랐다. 데아의 시선을 확인한 피파글랜이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해드릴 말씀이 있는데…….”
“누가 왔어?”
데아의 눈은 굳건하게 한 곳을 향했다. 피파글랜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누가 온 것 같은데?”
“…누가요?”
“익숙한 사람.”
데아의 표정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피파글랜은 가만히 저울에 추를 매달았다. 어느 쪽이 더 유리할 것인가.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 무엇이 나를 더 괴롭게 하는가, 무엇이 더 주군을 이롭게 할 것인가. 결과는 나왔다.
피파글랜은 데아의 얼굴을 돌렸다. 검은 눈동자와 옅은 갈색 눈동자가 부딪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들리지 않았다. 내던져진 침묵, 데아는 불길한 예감을 따라 발을 옮겼다.
“말해 줘.”
사실 피파글랜은 모든 것을 말했다. 눈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의식으로.
“트리야와 맞부딪쳤던 유일한 인어가 있었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야 말았다. 피파글랜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다.
“수개월 동안 전쟁을 일으키고도 죽지 않은 인어였어요. 그는 더불어 트리야에게 막대한 치명상까지 입히고 후퇴했죠.”
“…….”
“…그는 영원한 명장이고, 완벽한 피사체예요. 당신이 창조한 두 번째 인어이자, 그 무엇보다 강인한 전사이기도 합니다.”
“…므아나?”
“그 이름으로 불린다면 서운해할지도 몰라요.”
피파글랜은 조용히 데아를 인도했다. 그 누구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뭐, 업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러면 무슨 이름으로 부르는데.”
“애칭이죠.”
“므아나의 애칭? 애칭이 있어?”
“네.”
데아는 헤엄침을 멈췄다. 저 멀리, 처형장에서 소리가 들린다. 뭔가 다리가 많은 것들이 다닥다닥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오직 주군만이 그를 애칭으로 부를 수 있었거든요.”
“애칭이 뭔데?”
“므아나는 완전한 그의 이름이 아닙니다.”
다닥다닥 기어 올라가는 연약한 생명체들, 그것들이 등에 인 것은 돌이었다. 단순한 돌이 아닌, 막대한 파동을 불러일으키는 폭발석.
“므아나의 진짜 이름은 ‘릴리므아나’.”
데아는 피파글랜을 돌아보았다. 썩둑, 또 누군가의 목이 잘리는 처참한 심해 안에서, 데아는 더한 심해를 목도했다. 눈을 떠도 피할 수 없는 꿈이었다.
“그의 애칭은…….”
피파글랜의 입술이 움직인다. 그리고 거대한 광음이 들렸다.
“어?”
“?!”
폭발의 근원지는 처형대의 아래, 비명을 내지르는 백성들이 아수라장을 만들어 냈다.
―뭐, 뭐야!
―피해!! 꺄아아악!!
그 순간, 데아는 흩날리는 작은 빛 무리를 보았다. 시리도록 하얘서 모른 척할 수 없는 빛 무리였다. 해룡이 빠르게 몸을 뒤틀었다.
―저것!!
데아는 홀린 듯이 피파글랜을 밀쳤고, 돌진하는 해룡의 뿔을 잡아 그 등에 탑승했다. ‘주군―!!’ 피파글랜이 빠르게 외쳤지만 데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스스로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강렬한 충동이 전신을 두들겼다. 그게 단지 본능인지, 피파글랜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고픈 욕구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릴리므아나의 애칭. 그건…….
―이런!
그러나 처형대가 가까워지자 해룡은 더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다. 거대한 막에 가로막혀 터엉! 튕겨진 해룡과 달리, 데아는 반동에 밀려 거침없이 내부까지 침입했다. 해룡은 위험하다며 데아의 꼬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데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빛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득한 시야 안에 보이는 건, 자신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피하는 수많은 백성들과,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익숙한 혁명군 인어들, 그리고 더 가까워지는 하얀 빛.
하얀 빛.
그것들이 손에 잡히려던 순간이었다. 해류가 일변하며 거침없이 가라앉았다. 데아는 거대한 철벽처럼 자신을 주시하는 한 쌍의 시선을 느꼈다. 거대한 인파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형대가 폭발했다!! 범인이야!!
―감히 영면식을 훼손한 변절자가 이곳에 침입하다니!
백성들은 해룡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데아의 얼굴은 똑똑히 모두가 목격했다.
저 아득한 상석, 옥좌에 고고하게 앉은 트리야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소란의 주동자로 몰린 데아를 향해 간부들의 검과 봉이 몰리던 순간이었다.
“데아야!”
휘익―!
데아는 자신을 이끄는 손길을 느꼈다. 거칠고, 익숙한 온기. 데아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손을 움켜잡으며 눈을 감았다.
“이리로.”
익숙한 음성. 데아는 눈을 떴다. 자신을 인적 드문 사각지대로 이끈 누군가는 숨을 헐떡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저 멀리 데아를 놓친 간부들이 우르르 사각지대를 스쳐 지나갔다. 데아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노란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아, 드디어 만났네. 위험할 뻔했잖아…….”
역광에 젖은 백리서가 데아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