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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23화 (123/223)

※ 123화

침묵하던 권도언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데아 씨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네요.”

“그런가요?”

“…말도 안 돼…….”

도라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해룡은 그의 군주를 등으로 모시며 내려앉았다. 새파랗게 질린 도라안의 시선 안에 붉은 눈의 이데아가 비춰졌다. 약점 파훼 그리고 해룡. 도라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눌러 감쌌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떻게든 아니길 빌었는데. 모든 것이 내 착각이고 과민이기를 빌었는데.

정말로 도망칠 곳이 없어. 완벽하게 구성된 진실로부터 회피할 곳이 없어.

“아아아…….”

칸나니아는 틀렸다. 트리야는 멸망할 것이다.

도라안은 자신이 트리야의 편에 붙었던 이유를 곱씹어 보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도라안은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으므로 인간계를 멸망시키는 므아나에게 갈 수 없었고, 권력을 지나치게 좋아했기에 소탈한 삶을 사는 중립파에도 갈 수 없었다.

온 세상의 귀중한 것이 모두 자신의 것이기를 바랐고, 트리야는 그런 그의 수집욕을 채워 줄 수 있는 권력자였다. 그뿐이었다.

“내 약점을 보고 있어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도라안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흠뻑 비를 맞은 얼굴이 흐렸다. 도라안은 권도언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훌쩍 땅으로 내려오는 데아를 보며 앓듯이 웃었다.

“여기를 보고 있어요?”

데아는 붉은 점이 잔뜩 모인 곳을 가리키는 도라안의 손끝을 보았다. 왼쪽 아가미 위. 팔을 들어야만 보이는 곳.

“가까이 와봐요. 제발 부탁이에요. 다 포기할 테니까…….”

주군을 확인하고 기꺼이 패배 선언을 하는 권속. 그건 본성이었다.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그들만의 규율이기도 했다.

“잠깐, 손만 잡아 줘요…….”

도라안은 절뚝이며 걸었다. 그 누구보다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나아갔다. 결국 도중에 한 번 철퍽! 넘어졌고, 질퍽하게 젖은 땅을 무릎으로 기었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인간 남자와 아슬하게 서있는 그의 주군을 향해.

데아의 표정이 굳은 건 순식간이었다. 기생 생물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오래된 비디오가 상영되듯, 풍랑 같은 기억이 스며들어 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어린 도라안. 또 그의 능력에 당했다며 엉엉 우는 윌로.

―흥, 당한 인어가 둔한 거지!

도라안이 코웃음 쳤다.

그래. 그랬다. 도라안과 윌로는 허구한 날 매일 싸웠다. 신체 능력이 거의 없는 도라안에 비해 민첩한 몸과 그 어떤 활도 팽팽하게 당기는 근력을 가진 윌로는 도라안에게 있어 질투의 대상이었으므로. 윌로는 그 사실을 잘 알았고, 대놓고 비웃던 인어였다.

때문에 도라안은 종종 자신의 능력을 저주했다. 차라리 완벽한 정신계였다면 움처럼 미래를 엿보거나 상대의 심리를 살살 건드려 우수한 계략가가 되었을 텐데, 왜 자신의 능력은 바보 같고 애매한 정신 침투계라 접촉해서 내면을 꿰뚫는 게 다냐면서 자조했다.

그러나 당시의 태초는 알고 있었다. 도라안은 둔갑한 상대의 진짜 모습을 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인어였고, 동시에 상대의 모든 내면에 침투해 곧바로 속부터 무너뜨리는 유능한 첩자였다.

자신이 가진 능력의 진짜 쓰임새를 알게 된 도라안은 그때부터 종종 윌로에게 복수를 했다. 일부러 넘어져 그의 몸에 몸통박치기를 한 다음, 순식간에 열린 윌로의 본질에 침투해 칼춤을 춰댔다. 이유모를 두통으로 엎어진 윌로가 엉엉 울 때쯤이면 도라안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자리를 떴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이제 태초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능력을 쓰기 전의 도라안의 표정을 말이다.

“피해요!”

도라안의 목적은 데아가 아닌 권도언. 그는 일부러 데아에게 다가와 놓고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갑자기 밀쳐진 권도언과 손을 불쑥 뻗은 도라안 사이로 데아가 침입했다. 도라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길을 잃은 능력이 침입자를 향했다.

“데아 씨!”

“어!”

도라안의 손과 데아의 팔이 맞물리고, 거대한 암흑이 아가리를 벌려 도라안을 삼켰다.

◈          ◈          ◈

“…….”

데아의 내부, 본질 속에서 웅크렸던 도라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 혼자였다. 그리고 보았다.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거대한 눈동자를 말이다.

“아, 아아…….”

당신은…….

검은자위에 하얀 눈동자. 투명하리만큼 밝은 동공 안에는 온 세상의 색채가 모두 고여 있었다. 그 눈동자가 반으로 접혀 웃었다. 도라안은 공포에 떨었다. 산사태와 같은 하얀 머리카락이 도라안의 위로 쏟아졌다.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도라안을 구한 건 하얀 빛무리였다. 도라안은 변명하듯 속삭였다.

“주, 주군, 주군…….”

절벽 아래로 밀리지 않기 위해 빛을 잡았다. 암흑 속의 조난자는 숨을 헐떡이며 태초를 불렀다. 주군, 주군, 태초님……. 도라안은 창공을 뒤엎는 거대한 존재감 속에서 신음했다. 한없이 까마득해 태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높아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

“내, 내가…….”

도라안은 감히 손톱을 세우지도 못하고 울분 속에서 거칠게 소리 질렀다.

“내가!!”

길었던 백 년. 메아리치는 내면에서, 도라안은 헤엄치는 하얀 비늘의 물고기를 보며 소리 높여 좌절했다.

―거친 파도의 소리가 너의 악몽을 가려 줄 거야.

―그날만큼은 꿈 없이 휴식하길 바라. 너희들의 다정한 요람이 곁에 있으니.

윌로에게 심한 장난을 걸고 혼났던 작은 인어가 그곳에 있었다. 작은 인어는 차오르는 파도를 피해 커다란 하얀 비늘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를 굽어보는 모든 것의 절대자를 올려다보았다.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닮았거든…….

비로소 도라안은 태초를 마주했다. 꿈속에조차 볼 수 없었던 주군의 얼굴이 그린 듯이 휘어졌다. 숨 막히는 정적 속, 유일한 숨을 뱉으며 도라안은 얼굴을 구겼다.

“내가, 잘못한 거예요?”

아이가 떼를 쓰며 발을 굴렀다. 이가 빠드득 갈렸다.

“내가 잘못한 거냐고요―!!”

허공 속에서 웅웅거리며 메아리가 울렸다. 평소 같았으면 못이기는 척, 태초가 자신을 들어 올려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냐며 달랬을 터였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태초는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는 자신을 미미한 미소와 함께 애석하게 바라만 볼 뿐, 달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제야 도라안은 깨달았다. 정말로 태초가 죽었음을. 그동안 부정했던 존재는 정말로 훌쩍 떠나버렸음을.

그리고 다른 존재로 돌아왔음을.

“하하…….”

도라안은 가만히 차오르는 검은 파도를 보았다. 빛이 없어서 얼굴이 비치지도 않았다.

“이번의 주군은 좀 냉소적이네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다정한 재해를 앞에 두고 감히 투쟁할 수 없던 무력한 권속은 포기 선언을 했다.

도라안은 수긍하고 고개를 숙였다. 태초의 하얀 비늘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졌어요. 맞아요.”

절망감에 휩싸인 인어가 속삭였다. 얇은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죄송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 콧대 높은 도라안이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 동시에 태초의 손이 도라안의 전신을 덮었다.

◈          ◈          ◈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도라안은 폭풍우가 잦아 든 섬의 중앙에 대자로 뻗어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솨아아아아―

거칠게 불었던 폭풍우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사방이 쾌청했다. 깨끗한 파도와 눈부신 태양. 동화 같은 오두막집.

“허억!”

도라안은 벌떡 일어섰다.

“오, 깼어?”

“이제야 깨네요. 몸이 약한가?”

“데아 누나! 그 인어 일어났대요?!”

도라안은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흔들며 정신없이 일어섰다.

“뭐, 뭐야, 여기 있던 간부들은?”

“화살 들고 날뛰던 놈들이라면 내가 돌려보냈어.”

데아는 빵을 죽 찢어 도라안의 입에 집어넣었다.

“내가 확인할 테니 이만 들어가라고 하니까 널 버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치던데.”

“…….”

“왜 그렇게 봐? 귀신 보는 것처럼.”

데아는 나머지 빵을 찢어 한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가만히 엎어져서 쉬고 있는 해룡이 있었다.

“입 벌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러면서도 해룡은 입을 쩌억 벌렸다. 우물우물 빵을 씹는 해룡과 도라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기절할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도라안은 데아의 걸음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얼마나… 지났죠?”

“…….”

가만히 침묵하던 데아는 빵을 또 죽 찢어 집어삼켰다.

“몰라. 한 30분?”

“아…….”

많이 지나진 않았구나. 그리고 또다시 도라안은 데아의 시선을 피했다. 데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라안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인어처럼 굴었다.

“갑자기 내 팔을 만지더니 픽 쓰러져서 뭔가 했는데.”

데아는 도라안을 질질 끌고 구석으로 갔다.

“내 본질을 엿봤어?”

“어, 네, 네? 어, 어떻게…….”

“뭘 봤어?”

“…….”

“태초?”

데아는 심드렁하게 도라안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남은 빵을 삼켰다.

“여기서는 티 내지 마. 나 여기서는 인간이야.”

도라안은 저 멀리 보수 공사를 진행하는 인간 셋을 보았다.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날뛰는 인간 둘에게 아직 인간이라 속이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저 인간 남자의 낌새는 꽤나 수상했지만…….

“아, 알겠어요.”

고분고분한 도라안의 대답에 순간 말을 잊은 데아가 입을 다물었다.

“너…….”

“뭐, 네?”

“…아냐. 아냐. 됐어.”

도라안은 서쪽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이제 가야 돼요. 오늘밤에는 영면식이 열려서요.”

“영면식? 그게 뭐야.”

“공개 처형식이요.”

“…지난번에 했잖아?”

“그건 파티라서 연 거고요. 원래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열려요. 중앙에 사는 백성들은 전부 참석해야 하고, 빠지면 태형. 원래 그래요. 트리야가 정해 놨어요.”

“걔는 도대체 왜 그래? 꿍꿍이가 뭐야?”

“제가 알아요?”

도라안은 픽 고개를 돌리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래서 기억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몰라. 있다 없다 해.”

“뭐야 그게…….”

도라안은 코를 긁적이더니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배신할 테니까 나 버리지 마요.”

“어?”

“아무리 봐도 각이 안 나오거든요. 트리야가 주군…….”

도라안은 눈을 꽉 감았다.

“주군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지금 상태로는 예측을 못하겠는데 아무튼. 어떤 권속이 주군을 이겨요? 주군이 떡하니 나오면 상황 종료지!”

“그런 거야?”

“당연하죠!”

“아닌 것 같던데?”

데아는 실실 웃었다.

“트리야는 이미 내가 태초인 걸 확신하거든.”

“어?”

이번에 얼빠진 건 도라안이었다. 곧 그는 부글부글 끓어올라 포효했다.

“아, 어쩐지!!”

그러곤 해변을 퍽퍽 짓밟으며 다니더니 이내 풀썩 앉아버렸다.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라는 들어먹지도 않을 헛짓거리를 왜 하나 싶었는데 역시 그 누구보다 먼서 확신하고 있었구만! 도대체 걔는 왜 그래요?”

“내가 물어본 말이잖아?”

“주군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직접 키웠잖아? 그 누구보다 오래 같이 있었고!”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떻게 알아?”

저 멀리 태양이 지고 있었다. 데아는 혼자 난리를 치는 도라안을 뒤로하고 조용히 권도언에게 다가갔다.

“갈게요.”

“…….”

권도언은 조용히 웃었다.

“따라가고 싶은데,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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