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링의 목에서 푸른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아, 이런……. 흐으…….
―링!!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링을 본 유리가 허우적거렸지만 알레가 잡아 세웠다. 고장 난 듯 멈춰 선 것은 유리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인어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데아는 저 멀리 혁명군과 자신을 향해 겨냥한 어두운 총구를 보았다.
‘총구?’
여기에도 총이 있다고?
존재의 유무조차 알지 못했던 인어 제국의 총은 마력탄을 장전해서 발사하는 총으로, 겉보기로는 산탄총과 비슷했다.
“알레, 빨리 나머지를 데리고 나가!”
―늦었습니다.
“뭐?”
―맞아. 너희들은 늦었어.
데아와 혁명군들에게 총구를 들이민 사람은 덜덜 떠는 퍼블리였다.
데아는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퍼블리……?”
―퍼, 흐, 퍼블리……?
―네, 네가 변절자였다니……. 네, 네가 정말로. 변절자였다니!
퍼블리의 눈은 뿌옇게 퇴색되어 있었다. 링을 향해 분노를 쏟아 낸 파블리는 이내 총을 재장전했다. 공허하게 확장된 퍼블리의 동공이 바쁘게 상황을 훑었다.
이윽고, 퍼블리는 통신 소라에 대고 신호를 보냈다.
―벼, 변절자 무리를 잡았습니다. 네. 지금 나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벽이 터졌다.
동쪽 감옥의 일부가 처참하게 무너지며 수십, 수백 명에 달하는 간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아는 일순 숨을 멈췄다. 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다. 고요한 한기가 폐부를 매웠다.
저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혁명군을 구출할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데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식은땀이 났지만, 애써 침착한 척 입을 열었다.
“알고 있던 것치고는 늦네?”
데아는 경배를 휘둘렀다. 날카롭고 유연한 검이 사선으로 그어지고, 벽이 한 차례 더 무너졌다.
간부들이 비명을 질렀다. 두껍게 설계되어 있던 감옥의 외부 벽까지 전부 무너져 내렸다.
―으아, 으아악!! 벽이 무너진다!
―어서 피해!
“야, 빨리 뛰어!”
예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다. 정말로 시간이 촉박했다. 데아는 링을 부축했다.
―유리. 먼저 저들부터 내보내세요!
―뭐, 뭐라고? 알레, 하지만 알레는요!
―저도 뒤따라 갈 겁니다.
―하, 하지만…….
―빨리!
“링, 샤샤.”
구출과 전투로 혼란스러운 와중, 칸나니아의 목석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염된 물길을 뚫고, 칸나니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곧바로 총구를 데아에게 겨냥했다. 언제 총이 날라 올지 모르는 그 대치 상황에 데아의 동공이 수축되었다.
“칸나니아…….”
서늘한 얼음과도 같은 장도가 손아귀에 잡혔다. 그 검을 본 칸나니아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어두운 상급 간부복을 저승사자처럼 갖춰 입은 채 무뚝뚝한 얼굴로 입술에만 살짝 미소를 띠운 사신. 지금의 칸나니아를 설명할 가장 적합한 표현이었다.
“그렇게 나와 줘야지.”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지?
데아는 저 멀리 충격에 파들파들 떠는 퍼블리를 응시했다.
퍼블리는 링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 퍼블리는 링을 의심했다. 저와 링이 말도 안 되는 채무자 연극을 했을 때조차 그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고, 의심의 날을 세워 링의 뒤를 밟은 거다.
―대부분의 인원을 보냈습니다.
알레는 유리까지 뒷문 쪽으로 내보내고는 등을 돌렸다.
“너도 나가. 알레.”
―저는 마지막으로 나갈 겁니다.
“장난해? 창은 오래 못 열려. 네가 안 나가면……!”
―네, 네가 그동안 너무 수상했어. 링, 날 속일 수 있을 줄 알았, 알았지?
알레를 향한 데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퍼블리가 벼락처럼 비명 질렀다.
―네가 변절자였다니!
퍼블리는 이내 펑펑 울었다. 추악한 좌절감이 그의 미간을 뒤덮었다.
―어떻게 네가 제국을 배신할 수 있어!
―배신이라고?
마력탄으로 인해 뒷목을 꿰뚫린 링의 무릎이 서서히 꺾였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지만 치명상은 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링의 입과 목에서 푸른 피가 아득하리만치 쏟아졌다.
―나는 처음부터, 혁명군이었어. 이 제국을 저버린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지!
“그만해. 지금 시간 없어!”
닫히는 뒷문의 너머, 저 멀리 피파글랜이 보였다. 피파글랜은 데아를 한 번 보고는 손을 훅 휘둘러 인어들을 한 번에 창 안쪽으로 쑤셔 넣었다. 이위로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활을 뽑아들었다.
창은 이제 한계였다. 그 낌새를 알아챈 유리가 순간 사방을 둘러보았다. 데아와 링, 알레와 피파글랜 그리고 자신의 뒤에 열 명이나 더 서있는 인어들.
유리는 뒤로 물러섰다.
―너희들 먼저 가!
―유리!
유리는 몸을 날려 인어들을 밀쳤다. 동시에 칸나니아가 데아의 옆, 링의 머리를 향해 총을 조준한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칸나니아의 총으로부터 빠르게 탄이 발사되었다.
“어딜.”
피파글랜이 손가락을 휘둘러 무언가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표적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던 마력탄이 링을 빗나가 벽을 뚫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피파글랜이 불러낸 창은 몇 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툭, 꺼져버렸다. 시전자 피파글랜 또한 동시에 빨려 들어갔다.
창이 닫혔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인어가 여덟이나 남아 있는 상태였다.
“뭐야, 저거 칸나니아 아니야? 둔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어류는 참 오랜만인데…….”
피파글랜이 사라진 그곳에서 이위로는 활을 당겼다. 빈정거리는 미소가 가득했다. 거센 힘이 활 위에 얹히고, 눈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빗발치듯 활이 쏘아졌다.
“윌로…….”
칸나니아의 미간으로 주름이 졌다. 강한 두 힘의 파동, 윌로의 팔위로 잔근육이 두드득, 솟았다.
그러나 그때, 데아는 그 둘 사이를 막아섰다. 답지 않게 얼굴이 심각했다.
“언니, 왜?”
“넌 여기 있지 말고 가. 가서, 다른 인어들을 다 데리고 와.”
“다른 인어들?”
“어. 1세대 인어 총 여덟 명이라며!”
트리야, 칸나니아, 도라안을 제외해도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이미 왕궁에 들어와 있는 므아나를 제외하고도 넷이었다. 이위로와, 피파글랜 그리고 아직 얼굴도 모르는 움과 또 다른 인어 하나.
“다 데려와야 이 제국을 갈아엎을 수 있지.”
아예 뿌리 채로 뽑아 탈탈 털어버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위로는 여기서 잡히면 안 됐다.
“내가 시간을 벌어 줄 때, 빨리 가!”
이위로는 인간계에서 크게 게이트를 불러낸 일 때문에 당분간은 게이트의 생성이 불가능했다. 잠시 데아를 뚫어져라 보던 이위로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위로는 근처에 남아 있던 모든 인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한 번에 많은 수를 이동시키면 몸에 무리가 간다고 들은 것 같았는데, 괜찮은 건가?
그러나 그 덕분에 남아 있는 인어는 이제 없었다.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 유리와, 알레 그리고 링과 데아, 자신뿐이었다.
그 순간, 섬광처럼 무언가가 터져 올랐다. 퍼블리가 쏘아 보낸 마력탄이었다. 그 마력탄의 향하는 곳은 유리의 눈 쪽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자신에게 닥쳐올 위기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
―유리!!
데아가 움직인 건 순식간이었다.
어깨에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아!”
―데아!!
마력탄은 데아의 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강렬하고도 끔찍한 통증에 데아가 몸을 웅크렸다. 어금니를 빠드득 씹고 고개를 돌렸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 당황한 퍼블리가 보였다.
그 순간 주변이 정적에 빠져들었다. 데아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왜 거기를 봐……?
그러나 데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이 쏠린 이들은 유리뿐이 아니었다. 칸나니아도, 퍼블리도, 링과 알레도, 모두 유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 기묘한 정적에 트리야라도 왔나 싶어서 데아가 고통을 참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데아의 얼굴 또한 창백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데아의 피만 뿌옇게 번져 있을 뿐이었다.
붉은 피가.
“…….”
인어의 피는 푸르다. 그건 상식이었다. 그러나 인어들은 모두가 알았다. 인어의 피는 푸르지만, 인간의 피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피는…….
―데, 데아야…….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다들 검을 들어라.”
칸나니아가 서늘하게 명령했다. 간부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정면 승부의 전조였다. 칸나니아의 눈동자가 구실을 잡고 사납게 빛났다.
“저 변절자들을 생포해!”
그리고 데아 또한 달려들었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우두머리의 머리.
포탑처럼 우뚝 서서 간부들을 지휘하는 칸나니아의 목숨을 앗아야했다. 데아는 빠르게 파고들어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역시나 예상대로 칸나니아는 그대로 방어했지만 그건 의도대로였다.
데아는 그대로 해류를 조종했다. 기묘한 물결이 칸나니아의 전신을 감쌌다.
“!!”
칸나니아의 무기는 거창. 전형적인 돌진형 공격수였다. 강한 힘을 앞에 실어 폭발적인 파워를 내고, 모든 것을 으깨버린다. 그러나 돌진을 위해서라면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칸나니아가 돌진한 그 순간, 데아는 주변의 해류 흐름을 모조리 바꿔버렸다.
―아, 아니 흐름이……!
―이건 분명, 제왕님의 능력일 텐데……!
당황한 인어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에 칸나니아의 눈도 분노로 타올랐다.
“감히 그분의 영역을 침범하지 마라!!”
그러고 보니 그와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도라안과 처음 만났을 때였던가.
“트리야가 물을 조종해?”
“이 건방진 게!”
“나랑 비슷하네…….”
태초의 기억이 없는 데아였지만, 태초가 가장한 애정한 인어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1세대 인어, 트리야.
트리야는 태초가 가장 애정한 인어였기에 가장 가깝고, 강한 능력을 물려받았다. 그렇기에 둘째인 므아나보다 강한 것이었고, 그 힘으로 기어코 이 제국을 삼켜 제국을 멸망으로 천천히 이끌었다. 자신을 배신한 태초에 대한 분노로, 복수를 위해서.
‘하지만 정말일까?’
데아는 기이하게 마음을 긁고 간 어느 예감에 생각을 멈춰 세웠다.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서늘한 감각이었다.
‘정말로, 트리야가 나에게 복수를 하려고 해?’
예감은 고개를 저었다. 데아의 표정이 일순 구겨졌다. 그와 마주하던 칸나니아의 눈동자에 경악이 들어섰다.
‘아니. 트리야는 복수가 목적이 아니다.’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꼬여 가지고…….”
저 멀리 곤봉을 잡고 싸우는 알레와 유리가 보였다. 그들 사이에 뒷목을 잡고 쓰러져 숨만 헐떡이는 링도 보였다.
데아는 인정했다. 지금 당장 이길 수는 없었다. 이 싸움은 졌다. 자신을 포함한 남은 이들은 모두 잡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널 이겨야겠다.
찰나의 순간, 칸나니아는 굳었다. 데아는 스스로 멈춰 선 적의 목을 향해 검을 들었다. 데아의 검이 세로로 수직 낙하했다.
데아의 동공이 굳고, 푸른 피가 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데아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온기를 느꼈다.
그건 마치 춤을 청하듯이 내민 손과 같았다. 유려한 몸짓으로 데아의 손목을 잡아챈 누군가는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려 공격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났다.
“어?”
목을 베여 죽음에 처할 뻔했던 칸나니아는 피가 흐르는 목을 감싸 쥐며 후퇴했고, 데아는 자신의 허리를 잡은 누군가의 긴 손가락을 잡아챘다.
“…뭐 하는 짓이야?”
데아의 허리와 손목을 잡아챈 그 누군가는 긴 속눈썹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가냘픈 숨이 느껴졌다.
“이 어깨…….”
주변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누가 그랬을까?”
붉은 피가 계속 스며 나오는 데아의 어깨를 하얀 손이 감쌌다.
트리야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말해 줘.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