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데아의 눈동자가 바삐 돌아갔다.
므아나라면 추방당한 두 번째 인어다. 내가 얼굴을 알지 못하는 인어. 그가 여길 왔다고?
“그럴 확률이 높겠지. 아무래도 그토록 찾던 태초가 바로 제왕의 손으로 떨어졌다는데, 곧바로 여기로 오지 않고 가만히 있을 므아나가 아니니까…….”
“닥쳐. 그는 태초가 아니다. 태초는 죽었어!”
“아, 알았어, 거창 치워!”
“조심해, 도라안.”
숨이 가빠졌다. 억지로 눌러 참았다.
“제왕은 알고 계시나?”
“아니, 아직. 내가 말씀을 못 드렸어. 워낙 므아나의 마력은 인지하기가 어렵기도 하니까……. 누가 잠입의 귀재 아니랄까 봐. 어쩌지? 말씀드려? 하지만 이 연회에서 어떤 난리가 날 줄 알고!”
“조용히 해! 므아나가 이 근처로 온 건… 내가 직접 말씀드리겠다. 너는 샤샤를 찾아.”
“샤, 샤샤를?”
“찾아서 격리해. 절대 그 둘과 마주치게 두지 마!”
“알았어. 그런데 지금 샤샤가 어디 있는데?”
“지금 무책임하게 그것까지 떠넘기는 건가?”
“…….”
도라안은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쾅! 꼬리로 벽을 찼다.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자꾸 전부터 나를 무시하고 있는데… 아무리 내가 권속도 만들지 못하는, 세력 없는 인어라고 해도 그렇지, 왜 자꾸 그렇게…….”
도라안은 이를 빠드득 갈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섬뜩한 한기가 어렸다.
“이렇게 자꾸 무시하면 나도 참지 않을 거야. 두고 봐.”
그러곤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칸나니아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더니 집무실의 의자를 발로 차 우당탕― 넘어뜨렸다.
그런데, 하필 넘어진 의자가 데아가 숨어 있던 책장 앞까지 굴러왔다. 데아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므아나… 윌로… 움……. 그 버러지 같은 것들……!”
날것의 분노였다.
칸나니아는 이내 집무실 위에 있던 모든 물건을 와장창 쓸어 부수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 왜 저래……!’
지금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이 지진 않겠지만…….
데아는 조금 열려 있는 문을 흘끔 바라보았다. 저기로 몰래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저곳으로 나가려면 칸나니아가 있는 곳을 지나쳐야 했다.
데아는 흘끔 고개를 내밀었다가 칸나니아의 넓은 등을 마주했다. 지금이다!
“태초!”
아 씨…….
데아는 도로 숨었다.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자신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겁을 집어먹었는데 다행히 혼잣말인 듯싶었다. 아니, 혼잣말이 왜 저렇게 산만하고 요란해?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왜…….”
홀로 남아 머리를 끌어안는 칸나니아는 그 누구보다 괴로워 보였다.
“아직까지도 망령처럼 남아 있어서는, 눈과 귀를 가리고……!”
터엉! 꼬리지느러미로 책상을 확 걷어찬 칸나니아는 그대로 휙 나가버렸다.
마지막으로 본 표정이 어마어마하게 무시무시해서 데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조금 억울해진 데아는 소심하게 밖에 고개를 디밀었다. 아무도 없었다.
“빨리 나가자.”
그렇게 칸나니아의 집무실에서 나선 데아가 왕궁 건물로 갔다가 발견한 건 또 다른 방이었다. 푸른 조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방.
‘도라안의 방인가?’
그 안에서는 익숙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성의 목소리인 것으로 보아, 도라안이 작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살짝 열린 문으로 보이는 방의 풍경을 보아하니, 스트레스를 푸는 나름대로의 방법인 것 같았다.
“거친 파도의 소리가 너의 악몽을 가려 줄 거야. 그날만큼은 꿈 없이 휴식하길 바라. 너희들의 다정한 요람이 곁에 있으니. 나는 아직 모르겠어요. 수면에 잠기는 태양의 파편. 눈부심에 찡그린 눈가의 주름. 확대된 세상이 당신을 향해 비산하죠. 파도의 일렁거림은 그의 지느러미야. 수면 아래로 내려오는 햇빛은 그의 비늘을 비추고, 깊고 무거운 심해의 정적은 그의 머리카락을 수놓지. 맞아. 그는 바다를 닮았거든. 우리는 모두 죽으면 바다로 돌아가. 바다로 돌아가 그를 도와…….”
그 노래였다. 내가, 태초가 트리야에게 선물해 준 자장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 1세대 인어는 다 아는 노래였구나.’
괜히 묘한 기분이 되어, 데아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거친 파도의 소리가 너의 악몽을 가려 줄 거야…….”
데아는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렸다. 계속 머릿속에 빙빙 맴돌아 어쩔 수 없었다.
‘아, 됐어. 일단 돌아가자.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데아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놀렸다. 그런데 저 멀리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트리야와 그의 간부들, 시종들이 우르르 오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꿈 없이 휴식하길 바라. 너희들의 다정한 요람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노래 구절을 마칠 때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트리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데아는 슬쩍 몸을 비켜 주었다.
“곁에 있으니…….”
그 순간, 엄청난 악력이 닥쳐왔다.
“어? 뭐야?!”
“어디서 그 노래를 들었지?”
트리야가 데아의 어깨를 잡고 확 돌려세웠다. 트리야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 데아는 실마리를 잡았다.
“그 노래를, 노래 가사를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다.”
“가사라니?”
그 무의식적 열쇠를 향해 시선을 맞췄다.
“나는 가사 안 불렀는데? 멜로디만 흥얼거렸어.”
“…….”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아, 참고로 멜로디는 내가 선물 받은 오르골에서 나왔던 노래. 왜, 너도 익숙해?”
트리야는 내 어깨에서 손을 놓았다. 데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신의 피부가 불타는 기분이었지만 버텼다.
“그나저나 일찍 나왔네.”
트리야의 표정을 뭐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견고하게 벽을 쌓았던 그가 처음으로 날것의 표정을 내비친 이유가 무엇일까.
단서는 하나였다. 노래.
“연회가 재미가 없었나 봐?”
‘네 약점은 내 기억이었구나.’
데아는 확신했다. 트리야는 데아의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귀찮아서, 어쩌면 화가 나서, 혹은… 두려워서.
‘왜?’
“그렇군. 내가 착각을 했어.”
그러나 데아가 그 이유를 알기 전에, 트리야는 말끔하게 표정을 지웠다.
“미안하게 됐군.”
“…아냐. 괜찮아.”
데아의 어깨를 놓은 트리야는 데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트리야의 뒤를 이어 줄줄이 간부며, 시종이 따라갔다.
그 줄의 끝에는 자잔이 있었다.
자잔은 데아의 시선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었다.
‘어쭈 진짜…….’
데아가 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둘의 어깨가 툭, 부딪치고, 데아의 손바닥 안쪽으로 서늘하고 딱딱한 무언가가 감겨 들어왔다. 그 감촉에 자잔에게 말을 걸려던 데아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데아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복도에 그 어떤 인적도 사라지자, 데아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열쇠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뒷문 열쇠…….’
데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전날, 문 뒤에 있던 기척.
‘너였구나.’
◈ ◈ ◈
자잔은 걸음을 멈췄다. 샤샤의 손 안에 기적처럼 구한 열쇠를 쑤셔 넣고 오는 길이었다. 쉼 없이 걸었기에 벌써 거리는 꽤 벌어졌다. 저 멀리 주군의 뒷모습이 보였다.
큰 키와, 검은 천을 망토처럼 두른 위대한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이 멋있었다.
―주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순간, 자잔은 문득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실망스럽게 쳐다보던 샤샤의 시선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열쇠는 최후의 보루였다. 샤샤에게 바치는 자신의 최소한의 예의. 마지막으로 얼굴이나마 보기 위해 방까지 찾아갔다가 들은 내용에 따르면, 샤샤는 이 열쇠가 필요한 것 같았으니까.
―저, 주군. 저 잠시만…….
트리야는 고개를 돌리지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원 산책을 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주군!
소리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자잔은 서서히 헤엄을 멈췄다. 앞서간 주군과 간부와 시종들은 자잔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계속 거리가 벌어졌다.
주군이 자신을 버리고 갔다. 간부와 시종들을 데리고. 머리가 아파 왔다. 몸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자잔은 그 순간 깨달았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지마는.
주군은, 샤샤의 정신을 무너뜨릴 심산으로 나를 뒤에 뒀구나. 오직 그거 하나만을 위해 나에게 부러 친절하게 대해 가까이 했구나.
그 순간 자잔에게 찾아온 건 비참함이었다.
트리야는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걸 인정하자, 자잔은 뒤늦게 샤샤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가자마자 무릎을 꿇고, 곧바로 빌자. 그리고 말하는 거야. ‘사실 나는 열쇠를 주기 위해 너를 모르는 척했던 거야. 샤샤, 미안해. 사실 나는 주군과 있으면서 매 순간이 불안했어…….’ 이 모든 건 사실이었다. 자잔은 손을 덜덜 떨었다.
‘진짜야, 믿어 줘…….’
그렇게 자잔이 샤샤 쪽으로 몸을 튼 순간이었다.
텁!
―!!
누군가가 자잔의 입과 아가미를 확! 틀어막아 기둥 뒤로 질질 끌고 갔다.
―우읍, 큽!!
“닥쳐, 2세대.”
성체가 된 직후, 누구에게 힘으로 밀려 본 적은 없었는데… 이건 뭐지? 자잔은 눈을 돌렸다. 역광으로 인해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입을 틀어막은 손에 우드득, 핏줄이 솟았다.
“아하… 트리야가 권속을 만들었나? 그건 예상 못했는데…….”
낮고 여유로운 여자의 목소리. 언뜻 웃음기까지 섞여 있는 그 목소리는 자잔이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아닌가?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어디에서였지?’
그때였다. 몸이 빙글, 돌려지고, 자잔과 침입자의 얼굴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자잔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아는 얼굴이었다. 그래.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자잔은 침입자의 전신을 보았다. 그 끝에 달린 건 명백한 인어 꼬리였다. 어두워서 색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한 인어 꼬리였다.
‘그런데, 이 자가 인어였었나……?’
―지금 무슨 짓을―!
“다물어.”
―흐읍!
또다시 멱살이 잡혔다. 위압감에 힘겹게 호흡하던 자잔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내 말에 대답하지 못하면, 넌 여기서 죽는다.”
사납게 침입자가 물었다.
“이데아. 샤샤는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