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이내 트리야는 씩 웃으며 가볍게 허락했다.
“마음대로 해. 대신 나가기 전에 말만 해주고.”
주변의 인어들은 저렇게 제왕님이 너그러운 모습은 처음 본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데아는 미간을 좁혔다.
역시 군주라 이건가. 쉽게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군.
첫 번째 연회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 ◈ ◈
나는 숨겨져 있는 열쇠를 찾기 위해, 홀을 빙빙 돌아다녔고, 운이 좋게도 동쪽 감옥을 담당하는 상위 간부를 만나게 되었다.
―샤샤 님! 직접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술을 좋아하나 봐?”
―하하, 싫어하는 인어가 있을까요?
그는 얼굴이 붉어졌음에도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나는 그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척, 그를 슬슬 구석으로 몰고 가 고조시켰고, 이내 취한 그로부터 열쇠의 위치를 듣는데 성공했다.
―하, 하하! 샤샤 님께서 직접 그 변절자들을 신문하신다면 더 없이 좋지요!
열쇠는 그가 직접 지닌 채였다. 나는 그로부터 묵직한 열쇠 뭉치를 건네받았고, 곧바로 인벤토리에 넣어 숨겼다.
“고마워. 참 그리고 혹시 뒷문 열쇠도 있나...?”
―그건 제가 아니라, 신관 담당에게 있는데, 딸꾹! 저도 그 자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하!
“그래. 알았어.”
데아는 그대로 그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다.
“거나하게 취했어. 이대로 자는 것 같은데 누가 부축해 줄래?”
―저, 저, 건방진 자가……! 술을 그렇게나 마실 때부터 알아봤는데, 감히 샤샤 님에게 추태를 보였군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금세 다른 인어가 나타나 그를 들쳐 메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데아는 조용히 통신 소라를 들고 속삭였다.
“이자 갚으러 와라. 물론 절반만.”
◈ ◈ ◈
연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링을 만났다. 링은 희망적인 표정이었다.
―이렇게나 금방 얻다니……!
“너는 뭐 찾아낸 거 없어?”
―죄송합니다. 저에게 붙은 눈들이 너무 많아서요…….
링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내가 뒷문 열쇠를 어떻게든 해볼게. 안 되면 뭐, 직접 부셔야지. 뭐 별거 있나.”
―하지만 소란이 나면…….
“그러니까 최악을 가정해 보는 거야. 그때는 소란이 나도 나가야 하니까.”
―그건 그렇죠.
덜컥.
그때 링이 번쩍 일어났다. 데아 또한 멈칫했다.
문밖에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기척을 느끼자마자, 데아는 그대로 신속하게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방금 느꼈지?”
―네. 무슨 기척이 있었는데… 아무도 없네요. 착각인가 봐요.
“의심받고 있다며. 누군가 왔을 수도 있어. 이제 나가
봐.”
―네. 그래야겠어요.
그렇게 링이 떠나고. 홀로 남은 데아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날이 지나도록.
◈ ◈ ◈
―오늘도 오셨군요!
―위대하신 왕족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제 이름은…….
―벌써 내일이 처형 날이네요. 정말 기대가 큽니다. 그렇지 않나요……?
두 번째 연회가 밝았다.
데아는 설렁설렁 귀족 인어들의 인사를 받으며 트리야가 앉을 상석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연회장이 한 눈에 보이는 상석에 앉은 데아는 미동 없이 골몰했다.
트리야는 인간을 그 누구보다 싫어하면서, 우호적인 척 연기를 한다.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모두의 정황으로 따져 본다면, 태초는 인간들의 손에 죽은 것이 맞았으니까.
트리야가 태초를 진실로 존경했다면 인간을 대놓고 싫어해도 되는데, 굳이 우호적인 척하며 제국 안에서 인간의 이미지를 나쁘지 않게 조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인간을 대놓고 적대하는 혁명군 인어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온건하잖아?
물론 연기라는 걸 대부분의 측근들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어쨌거나 트리야는 100년 동안 연기를 했다. 그래서 ‘인간을 그 누구보다 싫어하지만 우호적인 척 연기를 하는 폭군’이 되었다.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한낱 인간이 제국에 떨어져도, 안전할 수 있도록 제국 분위기를 조정한 것처럼 말이다.
자신과 영주 언니 그리고 가윗이 감옥에 잡혀 있던 것도 우리가 금지된 구역에 침입한 탓이지,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다리뼈가 비싸게 팔린다는 둥 인간에 대한 기묘한 말은 듣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국의 눈을 피해 진행되는 암시장 얘기였다.
잘 생각해 보자. 트리야는 단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목적을 위해 100년 동안 모두의 위에 군림했다. 누군가는 트리야의 목적이 강한 권력과 힘이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막나가는 저 태도를 보면 트리야에게 제국은 그저 닳아 언젠가 없어질 수단에 불과했으므로.
그래. 수단. 트리야에게 제국은 수단이다. 그렇다면 뭐를 위한 수단이지?
트리야의 모든 행적을 돌이켜보면 답이 나온다.
바로 나, 태초다.
트리야는 태초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복수하려고 하는 것일 텐데…….
데아는 까딱거리던 꼬리지느러미를 멈췄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그 말에 갇혀서 생각하는 거라면?’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은 분노에 찬 트리야의 표정과 그 말뿐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던 거라면?
트리야의 목적이 복수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부터 새롭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걸 알아내야 했다. 트리야의 목적. 트리야가 진실로 나에게 바라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트리야를 이길 열쇠였다.
◈ ◈ ◈
트리야는 연회의 중간에 이르러 도착했다.
“…어?”
연회장에 들어선 트리야의 뒤에는 고개를 숙인 자잔이 있었다.
‘생김새도 닮아 그림같이 잘 어울리긴 한다만,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 조화로운 듯, 이질적인 광경에 의문을 가진 데아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자잔을 보고 깨달았다.
‘트리야가 자잔에게 관심을 줬구나!’
데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관심받지 못해 빌빌 말라가던 자잔의 뿌리에 물을 뿌려 줬겠지. 자잔은 그걸 또 옳다구나 받아먹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저 트리야 때문에 어떤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감히 트리야의 뒤에서 뻔뻔하게 나와?
그러나 데아는 자잔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이 모든 건 트리야의 계획이었을 테니까.
“안녕, 자잔.”
부러 인사를 하자 자잔이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곤 상석에 앉는 트리야의 뒤에 가서 다른 간부들과 비슷한 위치에 기립했다.
“얼굴빛이 좋아졌네? 내가 전에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자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당연했다. 내가 부탁한 것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데아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믿을게.”
이건 은유적인 물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네가 트리야 뒤에 들어간 게 부디 배신이 아니라 큰 그림이길 바란다’는 데아의 반 협박이기도 했다.
자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트리야는 방관할 뿐, 중재해 주지 않았다.
그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저 오만하고 뻔뻔한 폭군의 얼굴에 균열을 만들어 주고 싶다. 기억이 돌아온 척을 해버릴까? 하지만 그런 거짓말은 금방 탄로나 버린다. 어쩌지?
데아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모든 것이 네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확증을 내어 주고 싶다.
저번에 자잔의 말에 의하면 태초는 귀신 빙의되듯이 불시에 왔다는데, 왜 지금은 안 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태초 신, 태초 신… 빨리 강림해!’
하지만 답은 역시나 없었다. 데아는 이를 갈았다.
“잠시.”
그렇게 말하며 일어난 데아는 위쪽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창문이 있는 곳이었다.
조금이라도 숨통을 트고 싶어 올라간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내일 사용할 대형 처형대가 뚝딱뚝딱 만들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돌이 세워지고, 그 위에 팽팽한 천이 계속해서 기워졌다. 저 위로 새파란 칼날이 번뜩이는 걸 보아하니, 어류 주제에 단두대라도 만들 셈인가 싶었다.
결국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데아는 남몰래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뒷문 열쇠를 찾아야 했다.
데아는 몰래 왕궁 내부로 들어가 복도를 쭉 헤엄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공간을 발견했다.
“칸나니아의… 집무실?”
‘어쩌면 동쪽 감옥의 뒷문 열쇠는 여기 있지 않을까?’
데아는 주변에 누가 오는지 확인하고는 곧바로 안에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장이 왜 이렇게 많아……?”
거대한 도서관처럼 생긴 칸나니아의 집무실은 삭막했다.
박제된 온갖 해산물들… 물고기들이 유리관 속에 있었고, 이제까지 받은 훈장과 상장이 한쪽 벽면을 장식했다.
그 모든 물건들이 정확히 직각을 유지하고 있는 방. 방이 성격 더러운 주인을 닮았다.
“시간이 없어.”
털컹, 끼이익!
온갖 서랍을 열고, 바닥을 뒤졌다. 책장을 열고, 천을 펼쳐 탈탈 털었다. 그러나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칸나니아가 아닌가? 다른 곳에 가봐야 하나……? 도라안의 집무실에는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애초에 그 도라안에게 집무실이 따로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결국 소득 없이 나오려는 그때, 문 너머에서 기척이 들렸다.
묵직한 존재감, 어두운 그림자. 칸나니아였다.
‘왜 하필 이때……!’
데아는 층층이 세워진 책장 뒤로 가 숨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심장이 거침없이 뛰었다.
“므아나가 이곳에 왔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예민한지!”
문을 열고 들어온 인어는 두 명이었다.
칸나니아와 도라안. 둘은 몹시 흥분해 있었고, 방 안의 침입자가 든지도 모른 채 크게 떠들고 있었다. 책장 깊숙이 몸을 구긴 데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칸나니아가 뭐라고 한 거지? 뭐, 므아나?’
“그 변절자가 어떻게 그 모든 경계를 뚫고 이 왕궁까지 들어와!”
“내가 알아? 므아나는 이 왕궁의 비밀 통로를 원래 잘 알고 있었잖아. 대부분 막아 두긴 했는데 우리가 모르는 곳은 여전히 있었나 보지! 왜 나한테 화를 내! 나는 정보를 알려 준 고마운 인어라고!”
“그래, 그래, 알았다. 도라안…….”
칸나니아는 머리를 짚었다.
“그런데 그 위선자가 왜 이곳에 왔지? 역시 샤샤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