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네?”
권도언은 잠시 말을 아꼈다.
데아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턱을 문지르며 주변을 돌아보던 권도언은 노인도, 피파글랜도 웃지 않는 다는 걸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요?”
“네?”
“그러면 데아 씨, 여기서 아주 살 건요?”
권도언은 진지해 보였다.
“데아 씨 여기서 살 거예요?”
“아마…도? 그래도 아주 여기서는 못 살 것 같은데……. 외곽 지역에 죽은 듯이 살지 않을까요?”
“그 말은 결국, 던전 안에서 산다는 거네요?”
“네 그런데 길드장님 왜 안 놀라시…….”
권도언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 데아는 권도언이 전대 제왕, 최초의 인어 ‘태초’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설마…….’
저 멀리 호록, 차를 마시는 이리나가 보였다.
‘태초에 대해 잘 아는 듯힌 저 할머니가 다 말해 준 걸까?’
아닐 거다. 아마 여기서도 권도언이 ‘권도언’ 했겠지.
“하여간 눈치는 빨라서…….”
궁금한 속내를 쑥 숨기고 툭툭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마냥 비밀 상자를 건드렸을 것이다. 그렇게 이리나에게서 태초에 대한 단편적인 힌트를 얻은 뒤, 빠르고 정확하게 추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겠지.
“길드장님, 태초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 거예요?”
“음, 가장 완벽한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정도?”
“…그게 뭐예요. 나 게이트 만들 수 있어요?”
“몰랐어요?”
권도언은 데아가 앉을 의자를 뒤로 당겼다. 그러곤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본인 일인데 왜 나보다 몰라요?”
“피파글랜, 나 게이트 만들 수 있어?”
“‘창’이라면……. 네.”
“어떻게?”
“가르쳐드릴까요? 그냥 상상만 하시면 됩니다. 물론 처음은 어려우시겠지만.”
“데아 씨는 바닷속에서 알아낸 게 뭐예요?”
권도언이 빙글빙글 미소했다. 누가 들어도 놀리는 투였다.
데아는 피파글랜이 말하는 대로 빠르게 게이트를 상상하며 손을 허공에 그었다. 하지만 사방은 잠잠했다.
“안 되는데?”
“아직인가 보군요. 걱정 마세요. 언젠가는 가능할 테니까.”
쨍, 피파글랜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데아는 순간 아차, 했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길드장님?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아닌데. 중요한 것 같은데요.”
“아뇨. 중요한 건 아직 우리가 리서 언니를……!”
잠시 멈칫한 데아는 말을 바꾸었다.
“릴림 공격대장님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에요. 만약 죽었으면 어떡해요!”
“제가 백리서한테 팔찌를 두 개나 줬거든요. 백리서는 능력도 있으니 잘 살아남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건데요?!”
“여기는 워낙 넓으니까요.”
“리서 언니는 마력으로 사람 잘 찾던데…….”
“워낙 급하게 와서 아이템을 두고 왔나 보죠.”
“아이씨…….”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권도언은 데아가 없던 틈을 타서 이 근방의 모든 무인도와 암벽을 찾았지만 백리서는커녕, 백리서의 마력 한 톨 찾을 수 없었다며 실토했다.
“바닷속에 있나…….”
“팔찌 두 개로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요.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그렇네요. 백리서는 팔찌에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네?”
“말해 주는 걸 잊었어요. 그래도 뭐, 숨이 막히면 알지 않을까요?”
“주군, 제가 도와드릴까요?”
가만히 데아와 권도언의 대화를 듣던 피파글랜이 의견을 밝혔다.
“바다 아래는 제 전문이니까요. 주군보다 제가 더 길을 잘 알지 않겠어요?”
“내가 알기로 1세대 인어는 대대로 식인의 기록이 있다는데, 널 어떻게 믿지?”
“반쪽짜리 지식을 정론인 양 떠드는 인간은 어느 세대에도 있군. 주제도 모르고, 예의도 없고.”
식인. 피파글랜은 그 말을 정말 싫어했다. 그가 눈을 희번덕 뜨며 경고하자 권도언은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조심해.”
결국 데아와 피파글랜이 더 힘을 내서 백리서를 수색하는 방향으로 대화는 종료되었다. 애초에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대화가 끝나자 자리를 비켜 주듯 권도언과 이리나는 먼저 집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은 오두막집 안에서 데아는 피파글랜에게 당부했다.
“나갔네요.”
“피파글랜, 너도 리서 언니 보면 말해 줘야 해. 내가 말해 준 인상착의나 생김새 기억하지?”
“릴림, 백리서, 짧은 머리카락, 금발, 장신의 여자. 맞나요?”
“맞아.”
피파글랜이 턱을 괴었다. 긴 속눈썹이 살풋 감겼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미소에 데아는 불현듯 피파글랜을 거칠게 심문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피파글랜은 뭘 숨기고 있어.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판도라의 상자를 손에 쥐고 나에게 내어 주면서도, 정작 열쇠 구멍을 보여 주지 않고 있어. 그는 결정적인 뭔가를 말하지 않고 있어.
“너…….”
“나중에 나 미워하면 안 돼요, 주군.”
“……?”
피파글랜의 한마디에 그를 심문하고자 했던 거친 충동이 가라앉았다. 그런 데아를 알고 있다는 듯, 피파글랜은 악동처럼 웃었다.
“그래도 날 미워할 것 같으니까 미리 사과할게요.”
가라앉았던 충동은 더 큰 폭발을 위한 발판이었던 걸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데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해.”
“뭘요?”
“나에게 뭘 말하려고 했잖아. 뭘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또 뭘 모르고 있지? 답답하게 굴지 마.”
피파글랜은 오래 침묵했다. 그는 간을 보고, 자를 대어 측정하는 중이다. 데아는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인내했다.
한동안 데아를 조용히 바라만 보던 피파글랜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주 침착하고, 무겁고, 진지하게.
“마석을 잃어버린 적이 있지 않았나요?”
“어? 그런 걸 갑자기 왜…….”
피파글랜의 얼굴은 진지했다. 데아는 입을 다물었다.
마석을 잃어버린 적이 있냐고? 있었다.
첫 번째는 놀이동산 앞에서 마주했던 A급 던전. 그 던전에서 얻었던 마석을 잃어버렸고, 두 번째는 바로 자잔을 처음 마주했던 JJ길드의 뉴욕 모래섬 인어 던전이었다. 그 인어의 마석 또한 없어졌었지.
“있어. 그런데 그건 그냥 내가 너무 무방비하게 보관해서 그래.”
“인간 헌터는 인벤토리가 있을 텐데요?”
“그때는 인벤토리가 익숙하질 않아서…….”
“아하. 그러면 제 마석은 잘 가지고 있나요?”
최근에 SS급 던전에서 습득했던(사실상 그냥 받았던) 피파글랜의 마석은 인벤토리에 잘 있었다.
“그건 안전하게 있어.”
“다행이네요. 그 마석까지 도난당해 가루가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가루…….
그 즉시 데아는 피파글랜의 멱살을 턱! 잡았다. 그대로 피파글랜을 탁자 위로 밀쳐 제압했다.
우당탕! 모든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거 힌트지? 일부러 나한테 알려 주려고 그러는 거지?”
“나는 주군의 이런 점이 좋다니까.”
“네가 그 마석이 가루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데?”
묘하게 구체적인 설명. 피파글랜은 그 마석의 행방을 알고 있다. 더불어 그 마석의 행방은, 판도라의 상자와 관련이 있다.
“당연히 알죠. 그 마석은 제가 아는 인어가 훔쳐 갔거든요.”
피파글랜이 즐겁게 웃었다. 아니, 그는 전혀 즐거워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 난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짜증의 창끝은 데아가 아니었다.
“주군, 나 미워하면 안 돼요. 사실 조금 무서워서…….”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던 피파글랜은 이내 뚝 미소를 감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마석은 이미 주군이 다 섭취했어요.”
“어?”
“주군이 다 먹었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군도 모르는 사이에 먹었을 테니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말하기 싫었는데… 한 소리를 듣고 더 큰 미움을 받는 것은 싫으니 주군의 정의로운 배신자가 되기로 했답니다. 그러니까, 나 미워하면 안 돼요. 알겠죠?”
“한 소리 하는 사람, 아니 인어가 누군데.”
“둘째죠. 누구겠어요.”
둘째. 피파글랜이 말하는 둘째라면, 므아나였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인어. 사건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에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인어.
“내 주변에 므아나가 있었구나.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데아는 피파글랜의 멱살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파글랜 또한 데아를 따라 일어섰다. 긴 천 사이로 인간의 길쭉한 다리가 나오고, 그대로 바닥을 디뎠다. 피파글랜은 걸음마저 우아했다.
“누구야?”
“누굴까요?”
“말장난 하지 말고.”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이미 힌트는 다 나왔어요.”
“…….”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예요. 므아나는 인내가 길고 꽤나 끈질겨서 어쩌면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게 마지막 속삭임이었다.
피파글랜은 밖을 나오면서도 말이 없었다. 단지 자신을 보고 벌벌 떠는 가윗과 하영주를 지나쳐 울타리를 한 번에 퍼억! 내리쳐 꽂았을 뿐이었다.
“!!”
자신들이 애를 써도 고쳐지지 않던 울타리가 단번에 고쳐진 걸 본 하영주와 가윗이 기겁하며 피파글랜을 올려다봤다.
“이 정도야.”
장난스럽게 비죽 웃은 피파글랜이 데아를 향해 언제 돌아갈 거냐고 묻는 순간이었다.
―푸하!
“뭐, 뭐야!”
갑자기 물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나침판을 든 자잔이었다.
―하아, 하, 드디어 찾았다.
“뭐야! 인어가 또 나왔어!!”
저 멀리 가윗과 하영주가 난리를 치든 말든, 자잔은 인간들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데아를 잡아끌었다.
자세히 보니 자잔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호흡은 가빴으며, 손은 창백했다.
“무슨 일이야.”
세상이 급속히 작아지는 느낌을 아는가? 가장 불우하고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낄 때, 자신을 제외한 세상에 핑핑 돌며 귀에 이명이 들리는 그 느낌. 데아는 그 느낌을 매우 싫어했다.
가장 차가운 절망이 서서히 다가왔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데아는 자잔의 음성을 기다렸다.
“데아야, 저, 또 바다로 가? 병 걸리면 어떡하려고!”
“저 팔찌 있어서 괜찮아요!”
―샤, 샤샤…….
자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벌써부터 상황을 알아챈 것인지 피파글랜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대로 자잔의 멱살을 잡아채어 위로 번쩍 들었다.
―크, 크흑…….
“무슨 일이지? 당장 말해.”
피파글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가장 어두운 예감이 데아의 심장에 달라붙었다.
데아는 귀를 막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무정하게도 시간은 흘렀고, 자잔은 말을 뱉었다.
―혁명, 혁명군 본부가 습격당했어. 다… 끌려갔어.
◈ ◈ ◈
자잔의 말로는… 그 누구도 쉽사리 저항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왕궁을 침략하고자 마음먹었던 혁명군 내부의 모두가 거대한 무력감을 느끼고 비명 질렀다고 했다.
빠르게 바다로 잠수해 헤엄치는 동안 상황을 더 전해 들은 데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주군이 오셨어.
혁명군을 토벌하기 위해, 폭군이 직접 행차했다.
피파글랜이 낯을 굳혔다. 폭군이 잔혹하게 웃으며 혁명군을 일망타진하는 그 순간, 트리야의 얼굴을 본 자잔은 싸움을 포기했다. 이길 수도, 이길 의지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그의 권속이었으므로.
아무리 결심해도 넘을 수 없는 본능의 벽. 자잔은 그 앞에 무릎 꿇었고, 도망쳤다. 샤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섬으로 가기 전, 피파글랜이 먼저 자잔에게 행선지를 말해 주어 천만다행이었다. 자잔은 오래 헤맸지만 결국 길을 찾아냈다.
―내가 길을 헤매서 이미 늦었을 수도 있어. 시간이 없어. 빨리…….
그러나 피파글랜과 데아 그리고 자잔이 도착한 혁명군의 본부는 이미 쑥대밭이었다.
생명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작은 마을. 사방이 전투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저, 저기 누가 있어.”
하지만 그건 이미 죽은 인어였다. 얼굴만 몇 번 본 혁명군 인어 수십 명이 시체가 되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
트리야의 의도는 성공했다. 데아는 갈 곳을 잃었다. 데아의 어금니가 빠드득 갈렸다.
갑작스러운 기습. 트리야의 목을 치기 위해 달려들었던 모든 인어들은 절망을 겪었다. 그토록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 애썼지만, 상대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던 싸움. 모두가 구렁텅이 속에서 신음했다.
데아는 인적이 하나도 없는 건물 내부로 들어가 부서진 벽을 밀었다. 너무나도 쉽게 부서져 내렸다.
“유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제이, 알레?”
그 누구도 없었다. 데아는 온몸의 피가 증발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 끔찍한 혼란 속에서 피파글랜만이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너, 아는 거, 없어?”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그리 속삭이던 피파글랜의 목소리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생각보다 겁이 많이 났나…….”
겁이 많이 났다니.
“겁 안 나.”
“아니, 주군 말고요. 제가 말하는 건…….”
피파글랜은 말을 멈췄다.
“아무튼, 우리 일도 더 빨리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을 찾을게요. 주군께서는, 주군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누굴 찾는다고?”
“백리서. 그 인간을 찾아야 한다면서요?”
“어?”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물론 빨리 찾으면 좋겠지만, 리서 언니가 그만큼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리서 언니라……. 뭐, 걱정 마세요. 그냥 이런 상황일수록 빨리 찾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한 거뿐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피파글랜이 손가락을 탁탁 두드렸다.
“백리서의 또 다른 이름이 있었죠?”
“…….”
“릴림?”
옆집 친구의 이름을 부르듯이 한 번 툭, 뱉은 피파글랜은 픽 웃었다.
“어찌 되었던… 아, 자잔.”
―왜?
“넌 피파글랜이랑 같이 가.”
―…왜?
“나는 지금부터 왕궁에 갈 거야. 가서 어떻게든 혁명군을 빼돌려야지. 너는 사형수니까 잡히면 죽어. 나는 그래도 협상의 여지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주군을 만나면 어떡하려고!
트리야를 만나기는 싫지만, 만나서 협상을 할 수 있으면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트리야는 아무래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모든 게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함정 같아서 데아는 제 손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아무튼, 넌 피파글랜이랑 같이 가.”
“아니. 전부 간다.”
묵직하고 어두운 목소리. 그건 뒤에서 들려왔다.
데아는 빠르게 뒤를 돌았다. 무너진 잔해 속에 서있는 건 섬뜩한 눈동자를 한, 칸나니아였다.
데아는 일순 숨을 쉬는 걸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