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낯설고 분한 동시에 조금 슬퍼 보였다.
“아니.”
―화가… 나신 것 같아서.
“아니. 착각이야.”
나는 일부러 부드럽게 웃었다.
“그냥 나 스스로가 조금 한심해서.”
그러나 알레의 불안한 표정은 끝끝내 펴지지 않았다. 그는 내가 도망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내 말도 믿지 않으면서. 도망 안 간다니까.
그러나 데아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옮겼다.
◈ ◈ ◈
―데아, 데아, 미쳤어? 너 피파글랜 님한테 전투 신청 했다며?
“뭐?”
―소문 쫙 퍼졌어. 너가 피파글랜 님께 보낸 편지에 한 대 맞은 인어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며? 제정신이야? 너 요즘 심심해? 혁명군에 활기를 이런 식으로 불어넣고 싶었어?
다시 본부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이 모양이었다. 데아는 허겁지겁 달려온 유리에게 손목을 잡혀 질질 끌려갔다.
“나 지금 갈 곳 있는데, 나중에 말해 주면 안 돼?”
―어디?
“피파글랜이 있는 곳으로.”
―피파글랜 ‘님’이랬지!
“아, 그래 피파글랜 ‘님’.”
―그런데 거, 거기를 왜 가? 너, 설마… 정말로 전투 신청을……!
말은 험하게 했지만 데아를 걱정하는 기색을 풀풀 풍기는 유리가 다그쳤다.
“아냐. 그냥 물어볼 거 있어서 가는 거야. 그런데 내가 왜 피파글랜 님한테 전투 신청을 해? 누가 그래?”
―몰라! 그냥 그런 소문이 쫙 돌고 있어!
아,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인어들 표정이 다 좋지 않았나? 돌아오는 길에 스쳐 지나갔던 인어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아는 이 영문 모를 소문을 퍼트린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입도 가볍고, 손도 가벼운 제이제이! 그가 기어코 바구니 안에 든 미역을 펼쳐 보았나 보다.
“첫인상이랑 너무 다르네……. 처음에는 조용하고 진중한 성격인 줄 알았더니. 제이제이 어디 있어?”
―걔는 왜? 몰라 나는…….
“제이제이가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오해한 것 같아. 그런데 유리, 그거 맞은 얼굴 아니야.”
―그럼 뭔데?
“화난 얼굴이랑 전기 장어.”
―전… 뭐?
“피파글랜 전기 장어 닮았잖아.”
더한 모독에 유리가 기겁을 했다. ‘도대체 어디가?!’ 소리치자 데아가 ‘능력이.’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데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리는 이미 뒷목을 잡고 있었다.
―그게 더 심한 모독 같다는 생각 안 해봤어? 정신 차려. 혁명군은 어느 의미에서는 군대야. 위계질서가 엄격하다고! 그래야 우리가 척척 규율대로 움직이고, 그에 따라 생존율도 올라가니까. 그런데 네가 자꾸 이렇게 하극상을 벌이면…….
하극상. 데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래, 남들의 눈에는 그래 보이겠지.
데아는 유리의 손을 잡았다.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미안해.”
―…어, 어?
“너도 알지? 나 예전만 해도 1세대 인어님들의 과분한 은혜를 입으며 살아온 거. 이 목소리도 그렇고, 내가 왕궁에 들어가게 힘써 준 것도 다 피파글랜 님과 다른 인어님 덕분이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편하게 행동했나 봐.”
―어, 어어…….
“다음부터는 꼭 조심할게.”
데아는 씩 웃으며 유리의 손을 풀었다. 그러곤 멍하니 서있는 유리를 지나쳤다.
―후, 아니야. 나야말로 소리쳐서 미안해. 너 의외로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다시 봤어.
“나를 어떻게 본 거야?”
―사과는 죽어도 못 하는 줄 알았거든.
유리가 청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마치 또래 여자애들처럼 보여 데아는 무심코 미소했다.
“아냐, 혁명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니까. 내가 방해가 될 순 없지.”
―그 정신까지 멋있어. 그래, 반드시 살아남아 새 세상에서 살아야지. 특히 넌 윌로 님과 친하니까 더 빠르게 바뀐 제국에서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실없는 말들이 오고 갔다. 가끔 데아를 못마땅하게 본 인어들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 내 명성.’
여론이 좋질 않네. 데아는 조금 머쓱해졌다.
대부분의 인어들의 눈에 비친 데아는 ‘어린 인어,’ ‘그 주제에 건방진 인어’ ‘하룻강아지’ 쯤으로 굳혀진 듯싶었다. 뭐, 이정도 가지고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데아는 수긍했다.
―피파글랜 님의 방은 저쪽이야. 어서 가. 하지만 정말로 전투 신청 한 게 아니지? 아니, 아니 물론 나는 널 믿지만…….
말끝을 흐린 유리는 실실 웃으며 멀어졌다.
데아는 내부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피파글랜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데아를 기다린 듯 보였다.
“날 기다렸어?”
“저에게 전투 신청을 하셨다는데 떨려서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죠.”
싱긋 웃으며 피파글랜이 미역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 데아가 쓴 글과 그림이 있었다.
“예쁜 전기 장어네요.”
자신의 그림을 한 번에 알아보다니. 데아는 조금 기분이 풀렸다.
“자잔은.”
“그 건방지고 어설픈 애송이는 다른 건물에 있어요. 마력의 한계치는 높은데 채워지는 속도가 워낙 느려서요. 관련 전문가가 호흡법을 가르치고 있죠. 아마 며칠간은 못 나올 거예요. 그나저나 저에게 찾아오라 하신 이유는 뭐죠?”
피파글랜은 나에게 예의를 갖춰 늘 존대를 쓴다. 피파글랜의 그런 정중함은 옆에 다른 인어가 있어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헌터들이 저 위의 섬에 있어.”
“섬?”
“이리나 할머니의 섬. 너한테 의술을 알려 주었다던…….”
혹시 몰라 던졌는데, 과연 피파글랜은 바로 반응했다.
“아, 그 노파.”
싸늘한 피파글랜의 목소리에서 여과 없이 분출되는 적의에 데아가 당황할 때였다.
“그 안에 다른 동료들이 있나 보네요. 인간 헌터들. 그런데 혼자 가기는 조금 그래서 절 찾아오셨다는 건가요?”
“맞아.”
데아는 일부러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런 데아를 눈치챈 건지 예상대로 피파글랜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출발하죠.”
“어, 그래.”
“대신 부탁이 있어요.”
조건이 아닌, 부탁. 그 한 단어가 데아와 피파글랜의 위치를 가늠하게 했다. 피파글랜은 언제나 데아에게 고개를 먼저 숙였다. 우아한 턱시도를 입은 신사마냥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저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세요.”
“어? 하지만 너는…….”
“사람 아직 덜 찾았죠?”
피파글랜의 눈이 빛났다.
이 던전으로 들어온 인간은 모두 데아를 포함해 다섯. 데아, 권도언, 하영주, 가윗 그리고… 백리서.
“어떻게 알았어?”
“윌로한테 들었죠.”
“…그래서?”
“그 한 명을 찾아야 하잖아요. 저도 도울 수 있게 해줘요.”
의중을 모르겠는 데아의 눈빛이 피파글랜을 잠시 스쳤다. 데아는 씩 웃었다.
‘이것 봐라……?’
“그래. 도와주면 나야 좋지.”
“주군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라.”
피파글랜이 습관처럼 싱긋 웃었다.
그 순간, 거대한 무언가가 밟혔다. 그건, 결코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비밀이었다. 모두가 덮어 두고 있던 어마어마한 판도라의 상자가 벌컥 존재를 과시했다. 데아는 예감했다.
‘피파글랜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
알고 있어서, 그것을 나에게 알려 주려고 하고 있어. 몰래.
열쇠는 내 손에 있었다. 잠금장치에 넣고 돌리면 모두가 끝나는 판도라의 상자.
누가 침묵은 어떤 의미에서의 동의라고 했던가. 그건 옳은 말이다.
데아는 잠자코 방관했다. 피파글랜이 들고 올 어마어마한 폭풍을 기다리며.
“길은 알아? 예전의 한 번 갔던 적은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
“포탈로 통하는 길 말이죠? 그건 하나가 아니랍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 ◈ ◈
피파글랜은 SS급 던전의 보스였다. 피파글랜의 모습을 권도언도 보았고, 가윗도 보았고, 하영주도 보았다.
“흐악! 악! 악!”
“어어! 악으아악!!”
그래서일까? 피파글랜을 보자마자 비명부터 지르고 당장 능력을 써서 염소의 울타리를 망가뜨린 가윗과 하영주는 지금 저 멀리서 훌쩍이며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권도언입니다.”
“피파글랜. 피파라고 부르도록 하세요. 인간계의 길드 마스터.”
“그냥 길드장이죠.”
사태가 진정된 후, 오직 권도언만이 전혀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젠틀하게 피파글랜과 악수를 했다. 데아는 뒤에서 눈을 흘겼다.
“데아야, 데아야.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니?”
“데아 누나, 저 정말 누나한테 사과할 게 많은데, 흐어엉…….”
그다음, 가윗과 하영주는 말끔히 인간의 다리로 걸어온 데아를 안고 울었다.
“미안해. 나도 빨리 보고 싶었는데, 인어들 틈에서 빠져나오느라 틈이 없었어. 길드장님이 주신 팔찌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죽었을 거야…….”
데아는 가윗과 하영주에게 침 하나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피파글랜 님.”
“아. 그래, 이리나.”
그때 이리나와 피파글랜이 마주쳤다. 데아는 빠르게 분위기를 읽었다. 만년 정신병동에 갇혀 사회생활 같은 건 전혀 할 줄 몰랐는데, 자꾸 진탕을 구르다 보니 눈치만 늘었다.
“…….”
“오랜만이야?”
피파글랜이 툭, 자신의 겉옷을 벗어 할머니에게 던지듯 맡겼다. 이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 반갑습니다. 피파글랜 님. 여전히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 말과 함께 피파글랜을 맞이했다. 말이 좋아 맞이한 거지, 그건 거의 수발이었다. 둘의 권력관계. 데아의 눈동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러다가 권도언과 눈이 마주쳤다.
권도언은 데아와 눈이 마주치자 윙크를 했다. 그러곤 그 분위기를 다 읽은 듯 쉿,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재밌지 않아요?’
퍽이나.
“그래서, 흡, 데아야 너 저…….”
하영주가 연신 피파글랜을 곁눈질했다.
“저 보스 인어는 어디서 데려온 거야! 어디서 만났어?”
“던전 넘자마자 바로 정신을 잃었는데, 저 보스 인어가 나를 구해 줬어. 인어계의 의사더라고. 진짜 이상하지.”
데아는 준비되어 있던 대답을 술술 뱉었다. 다행히 가윗과 하영주는 의심하지 않았다.
“뭐야, 보스인어 주제에 친절해…….”
“무슨 꿍꿍이 있는 거 아니에요? 뒤에서 몰래 찔러 볼까요?”
가윗이 부엌에서 몰래 훔친 식칼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셋이서 작당 모의를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안 들어와요?”
“아, 길드장님! 저희는 지금 염소 울타리를 고치느라…….”
“영영 헌터랑 가윗 헌터 말고요. 데아 씨 말이에요.”
권도언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오두막집을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저 보스 인어 어디서 주워 왔는지 설명해 주셔야죠.”
정말 궁금해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데아는 일어섰다.
“네. 갈게요.”
동화의 한 장면 같은 집, 나무 식탁과 의자, 산뜻한 햇빛, 증기를 뿜는 주전자.
그 모든 것이 한 편의 희극 같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은 어찌된 일인지, 영원히 끝나지 않아 현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먼저 밝히고 갈게요.”
데아는 권도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깥의 이들과 단절되듯 문이 닫혔다.
“제가, 이곳의 예전 제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