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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109화 (109/223)

※ 109화

―피파글랜 님은 지금 여기 안 계시는데… 제가 말씀을 대신 전해 드릴까요? 무슨 일이세요?

일전에 만났던 알레가 난처하게 웃었다.

피파글랜은 자잔의 대련일지, 트리야의 화풀이일지 모를 거친 대련을 하러 나갔다. ‘어디로?’라는 데아의 물음에 알레가 비밀이라며 답을 피하는 걸 보니 피파글랜이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이걸 말을 할 수는 없는데…….’

피파글랜은 몰라도 알레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알레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한 번 보았다.

“잠깐 부르는 것도 불가능한가요?”

제이제이는 마침 같은 방의 돌 책상을 쓱쓱 쓸어 내고 있었다. 제이제이는 알레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허겁지겁 데아에게 경고했다.

―데아야. 네가 강하고, 또 유용한 일원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적어도 1세대 인어님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그래? 피파글랜 님이 네가 원하는 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분인 줄 알아?

뭐라는 거야 쟨?

“어디에 갔는데요?”

―내 말 안 들어? 참나 데아 네가 아무리 윌로 님과 친하다지만… 전에 유리가 그랬는데 무례하게 대했다며? 혁명군의 선배로서 얘기하는 건데 너, 우리나 다른 2세대, 3세대 인어한테는 몰라도 1세대 인어님한테는 정중하게 대하는 게 좋아. 알겠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데아가 내 말은 아주 씹네…….

―피파글랜 님의 요청이셨습니다.

나는 투덜거리는 제이제이에게서 미역과 펜을 갈취했다.

“그러면 쪽지를 전해 주실 수 있나요?”

―아, 당연하죠.

데아는 손바닥만 한 미역 위로 사각사각 글씨를 썼다.

시간 나는 즉시 나를 찾아올 것.

거기까지만 쓰고 고민하다가 옆에 찍찍 화난 눈 모양을 그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잔뜩 화가 난 장어를 그렸다. ‘순 자기 멋대로야.’라고 투덜거리는 말을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로 내로남불이었지만 데아는 만족스럽게 미역을 돌돌 말고는 알레에게 건넸다.

―참, 데아 님.

“네?”

―잠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알레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2세대 인어였다. 종종 자리를 비우는 피파글랜을 대신한 대리인이며, 혁명군의 거대한 주축. 그는 데아가 준 쪽지를 바구니 안에 넣고는 조심스럽게 데아의 손을 맞잡았다. 맞닿은 손이 서늘했다. 데아의 시선에 저 멀리 겁을 집어먹은 제이제이가 보였다.

―사실 이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난 것 같아서요.

혁명군에 며칠이 넘도록 있으면서 깨달은 것 하나, 온순하고 부드러운 ‘알레’의 별명은 ‘붉은 악귀’라는 것. 그 말인즉슨, 온화한 얼굴 아래 숨겨진 무언가를 아직 데아는 보지 못했다는 거다.

―잠시 밖으로 나갈까요?

알 수 없는 기백이 닥쳐왔다.

데아는 닫히는 문 사이로 알레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구니 속으로 손을 쏙 집어넣는 제이제이를 보았다.

◈          ◈          ◈

―피파글랜 님은 수없이 당신을 시험하셨습니다.

아, 나 이런 문장 알아. 성경에서 본 것 같아.

―당신이 과연…….

말을 잠시 멈추곤 데아의 눈치를 보는 알레는 조금 뻔뻔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알레 또한 데아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데아는 더 말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무슨 시험?”

―당신이… ‘진정한 제왕의 자질’을 갖추었나를 확인하는 시험이요.

시험, 그래.

알레에 따르면 피파글랜은 꽤나 오랜 시간 나를 지켜보았고, 던전의 싸움을 관찰했으며, 내 머리카락을 잘라 실험을 해 그 유사성까지 입증했다고 했다.

알레의 태도가 묘하다 했더니… 역시 내가 태초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아, 예전에 던전에서 잘라 간 그 머리카락으로……?”

―그러니 저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우리의 진정한 주군이라는 것을.

그 말에 데아는 모른 척을 했다.

“주군? 무슨 소리야.”

―예?

그러자 알레가 당황해하며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왜 그래?”

그러자 알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모르는 척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무슨…….”

―당신이 ‘우리’의 진정한 제왕이잖아요. 왜 기억을 못 해요?

알레는 비통함과 감격함이 어우러져 있는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솔직히 이때까지 데아의 심정은 한마디로 ‘어쩌라고’에 불과했다. 내가 태초고, 주군인데. 그게 뭐.

―그러나 지금 데아 님의 행동은… 사실 아직 믿기 어렵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불충하다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데아는 단박에 알레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내가 태초라는 건 인정했는데, 알레 스스로도 내가 태초의 의무를 다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는 말이었다.

인간계에서 계속 살다 온, 자신보다 더 어린 헌터. 거기에다가 기억도 없는, 허울뿐인 태초를 과연 태초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음 한 곳이 쓰렸다. 정곡을 너무 갑자기 쑤시네.

사실 그건 데아도 늘 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데아는 먼저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혁명군 단원들이 ‘태초’를 얼마나 숭배하고, 신격화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더 그랬다. 존재만으로도 구원이 되는 놀라운 태초는 사실 기억도, 온전한 힘도, 뭣도 없이 옆에서 미역이나 씹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맹세를, 그리고 약속을 해주십시오.

하지만 알레에게는 후퇴란 없었다. 붉은 악귀라 불리는 알레의 내면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전해 듣기론 그 별명은 트리야 측의 간부들을 불같이 썰어 죽이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했다.

그 누구보다 혁명에 진심이며, 트리야의 몰락을 기원하고 있는 인어.

혁명군을 그 누구보다 아끼는 인어.

“무슨 약속을 하길 바라는데?”

―왕위에 오르십시오.

뚝,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여기는 빛도 안 드네. 발광석이 없으면 진짜 깜깜하겠다. 그런데 얘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까는 의심한다며?”

―의심합니다. 불안합니다. 그렇기에 선언해 주십시오.

아, 알겠다. 알레는 데아가 못 버티고 도망쳐 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힘들고 잔혹한 상황에 이동 스크롤을 찢고 원래 있던 곳으로 가버릴까 봐. 영영 제국을 버려버릴까 봐.

―혁명군은 태초가 다시 왕위에 오름으로써 목적을 달성합니다. 모든 단원들은 그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어요. 100년이 넘도록.

“아…….”

―하지만 데아 님이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면, 그 모든 일이 무슨 소용인가요?

알레가 쓰게 웃었다.

―제왕이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는 재앙이나 다름없습니다.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혁명군은 반드시 집니다. 트리야에게 잡혀 잔혹하게 모독당하느니 여기서 다 같이 자결하는 게 나아요.

알레에게 하고자 했던 말이 모조리 탈색되었다.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닌가? 그러나 알레는 농담하는 게 아니었다. 알레의 부드럽고 따뜻한 눈동자, 그 너머로 들끓는 간절함과 포악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부디 말해 주세요. 데아 님, 왕위에 오르시겠습니까?

당신이 그만큼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져.

데아는 문득 억울한 마음이 치밀었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적 이해로 트리야와 이 제국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온전히 준비된 판에 손을 올리는 것과 그것의 머리가 되어 선봉장에 서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닌가?

데아는 평생을 인간 헌터로 살다가 불과 최근에, 심지어 얼떨결에! 스스로의 정체를 깨닫고 자아 정체성의 혼란이 온 20대 초반이었다. 스스로가 태초임을 ‘인지’하는 것과 스스로가 태초라는 걸 만천하에 선언하는 건 달랐다.

데아는 제국에 대한 역사도, 이해도, 기억도 없었다. 자신의 권속이라는 여덟 명의 1세대 인어 전부를 알지 못했고, 그들의 간절함도, 이전의 평화로웠던 제국의 모습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 데아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런 데아가 태초란 이유만으로 왕위에 오른다면, 그건 기만이었다.

“난 왕위에 오를 만한 위인이 못 돼.”

―아…….

“하지만.”

하지만 데아는 기만을 해보기로 했다.

“상징은 될 수 있겠지.”

―네?

말 그대로였다.

“그래. 해. 나를 무기로 잡고 마음껏 휘둘러. 나의 정체를 밝히고 모두를 선동해.”

―…….

기묘한 도취감이 생겼다. 데아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그들을 기만하기로 했다. 이상하게 그럴수록 원인 모를 불쾌함이 차올랐다. 나도 참 성격이 많이 꼬였다.

그랬다. 데아는 사실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왕위는 내가 아닌 다른 인어가 올라갈 거야. 하지만 그것도 내가 임명할게. 누가 좋을까? 추천하는 인어 있어? 네가 올라갈래?”

―…….

“그러니까 가서 마음껏 알려. 내가 태초라고. 태초가 돌아왔다고. 트리야의 시대는 끝나고, 태초가 직접 트리야를 벌하러 왔다고!”

모두가 나에게서 자격을 시험한다. 나는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그 자격을.

그래, 처음은 그 빌어먹을 별장에서부터다. 지금은 사라진 그 작은 이데아가 인어의 뇌를 먹고 난 후부터 모든 것이 꼬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만큼 강해졌으니까. 그만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으니까.

붉은 인어, 칼리안이라는 그 인어를 죽일 힘을 얻게 되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희망을 품었으니까.

“이 정도라면 너희들이 자결할 일은 없겠지? 안심하고 가서 싸워. 난 도망 안 가.”

하지만 난 기억도 안 나는 과거 하나 때문에 모든 것들이 자신을 옭아맸다. 트리야 같은 미친 폭군은 자꾸 사람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고, 이위로는 처음부터 나를 속인 채 다가왔고, 피파글랜 같은 미친 의사는 자꾸 뭘 시험하고 확인하고 난리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믿을 수 없다며 혼자 열변을 토하더니 하늘같이 높은 위치에 있는 내가 각오를 안다지면 다 같이 죽을 거란다. 옘병.

“이 태초가 너희들의 길을 응원해 주마. 잘 해봐.”

그래서 일부러 나는 얼굴에 가면을 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충고하자면, 너는 내가 왕위에 오르지 않기로 한 것에 감사해야 해.”

―…네?

“왜냐하면…….”

내 손이 알레의 붉은 머리카락을 스쳤다.

“나는 붉은 비늘과 머리카락을 가진 인어들을 아주 싫어하거든.”

―왜, 왜입니까?

“그럴 일이 있어. 아, 걱정하지 마. 너는 빼고. 너와 같은 주군을 가진 다른 인어들.”

내가 태초라는 걸 깨닫고 가장 기뻤을 때는, 2세대 인어인 칼리안과 다샤를 그냥 한 번에 박살 낼 높은 위치라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했을 때였다. 그와 동시에 내가 가장 좌절했던 이유 또한, 결국 그들 또한 내 권속이었다는 사실이었고.

하지만 결국 나는 칼리안을 용서하지 못했다. 칼리안의 인생은 끝장났다. 멍청한 새끼.

“갈게. 나를 어디든지 팔아먹어. 대자보를 만들어서 붙여도 돼. ‘태초가 돌아왔다!’ 전에 보니까 너희들 선동 잘 하더라. 재밌게 글을 잘 써.”

화가 그득그득 쌓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알레의 어깨를 턱턱 두들기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모든 일의 열쇠가 나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나는 단지 트리야의 뜻대로 가기 싫다는 오기와 변덕뿐으로 마음을 굳혔지만, 저들에게 혁명은 오랜 숙명이자 사활이었으므로. 그래서 내가 저들을 이렇게 비꼬아선 안 되는 건데…….

―데아 님!

그때 알레가 외쳤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의 창백해진 얼굴은 어딘가 낯설었고, 조금 분해 보였다.

―제가, 실수를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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