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멋진 활약이었어요.”
“존대 쓰지 마. 어색해.”
“저런, 앞으로 존대 쓸 인어가 우후죽순으로 많아질 텐데. 벌써 어색해하시면 어떡하나요?”
역시나 피파글랜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 피파글랜은 웃음을 딱 멈췄다.
“태초의 고목에 가서 뭔가를 드셨나요?”
정답이었다. 데아가 가만히 눈만 굴리자 ‘역시나.’ 하며 끄덕인 피파글랜이 씩 웃었다.
“오늘 있었던 말도 안 되는 일은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는 수많은 가설을 즐긴답니다. 지금 과정은 주군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의 과정인 것 같고요. 와, 조금 떨리네요. 하지만 기억을 섭취하고 받아들인다는 과정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아니 아니, 내가 순간적으로 자아를 빼앗겼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사실 저도 그 광장에 있었거든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데아의 등이 꼿꼿하게 굳었다.
“딱 보고 알았죠. 저건 ‘샤샤’가 아니구나. 하지만 정말 멋있었어요. 반갑기도 했고.”
피파글랜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홀로 쿡쿡 웃었다.
“과연 트리야가 성급하게 움의 구역을 박살 내고 돌아올 법해요.”
“…트리야에게 이 소식이 들어갔어?”
“그야 당연하겠죠.”
아 젠장.
예상은 했지만 역시 불편했다. 데아는 그대로 피파글랜을 지나치려고 했다. 데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자잔의 목덜미를 채가지 않았으면 그대로 쭉 지나쳤을 것이다.
―뭐, 뭐야!
“자잔을 왜?”
“잠시 빌려주세요. 이 친구한테 알려 줘야 할 내용이 있어서.”
―뭐야. 여기서 말해.
“그래. 무슨 내용인지 여기서 확실히 말해.”
“별것 아니에요. 기본적인 혁명군의 문화나 백성들의 가치관, 생활양식 그리고 좋은 사회생활을 위한 화법 등이죠. 아시다시피 이 자잔이라는 친구는 나자마자 공대에 들어가서 뭘 배울 틈이 없었던 지라…….”
“…….”
―…….
자잔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는지 침묵했다.
“그리고 대련도 직접 상대해 줘야 할 것 같고.”
“네가? 대련을?”
“이제 어영부영 성체가 되었으니까요. 뭐, 그래도 여전히 어리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충격파뿐이면 되겠어요?”
자잔은 마른세수를 했다. 광장에서 충격파 하나를 쏘고 기긴맥진한 걸 다 본 모양이었다. 창피하게…….
결국 데아는 자잔을 보내 줬다. 자잔 또한 군말 없이 끌려갔다.
그렇게 헤어지는가 싶었는데, 피파글랜이 뒤에서 또다시 데아를 잡았다.
“아, 그리고 또.”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발광석의 빛이 길게 늘어졌다. 늘어진 빛이 스며든 것처럼 피파글랜이 웬일로 부드럽게 웃었다.
“태초를 간절히 기다려 왔다고 해서, ‘샤샤’가 싫다는 건 아니에요.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
“당신의 자아는 유지될 테니까.”
녹아버린 얼음은 고르게 퍼져 물과 어우러질 것이다.
피파글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데아 또한 등을 돌렸다. 어두운 복도가 끝없이 펼쳐졌다.
나는 이제 뭘 하지? 오늘은 우선 쉬고…….
‘아!’
“이위로는 여전히 이 혁명군 본부 안에 있지?”
이위로를 찾았으니 권도언에게 연락해야만 했다. 리서 언니를 찾았냐고도 물어봐야지.
“이위로는 어디 있었지?”
혹시 모르니까 내 방에 먼저 가보자. 뭔가 천연덕스럽게 거기 자리 깔고 누워 제 방인 양 있을 것도 같으니까.
◈ ◈ ◈
“어어 언니―”
역시나 이위로는 데아의 방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부력으로 둥실둥실 뜬 이위로가 이것 보라며 꼬리지느러미를 돌리며 온몸을 빙글빙글 회전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소문 들었어. 언니 사해의 화살을 불러냈다며?”
”나도 들었어. 그런데 나는 그게 뭔지도 몰라…….“
경배의 최종 단계인가 싶어 상태 창도 확인하고 경배도 불러 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네 방으로 돌아가.”
“나는 나 말고 다른 인간이나 인어 없으면 우울해져서 안 돼.”
이건 또 무슨 핑계란 말인가.
“피파글랜 언니하고 많이 친해진 것 같던데, 나하고도 친해지면 안 돼?”
“나 피파글랜하고 안 친해. 그리고 너하고는…….”
데아는 여전히 빠르게 360도 빙글빙글 회전 중인 이위로를 바라보았다. 응? 응? 물어보는 눈망울이 지나치게 친숙했다.
“…피파글랜보다는 너하고 더 친한 것 같은데.”
“어! 정말?”
―데아야!
이위로가 기뻐 회전을 더 빠르게 한 순간이었다. 미역으로 막아 둔 방문이 철썩 열리더니 유리가 데아를 불렀다. 그리고 물기를 터는 개처럼 손 없이 몸을 털던 이위로와 그 밑에서 초췌한 얼굴로 이위로를 바라보는 데아를 마주하고야 말았다.
―어, 어! 죄, 죄송합……!
“뭐야! 누가 들어왔어!”
이위로가 빠르게 회전을 멈추고 닫히는 문을 턱! 막아 세웠다.
―위, 윌로 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나? 그냥 데아 언니보러 왔는―”
데아는 빠르게 이위로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유리는 저가 무엇보다 숭배하는 1세대 인어 윌로가 데아를 ‘언니’라고 부른 것을 다 듣고야 말았다.
―어, 언니요?
“아니, 윌로 님께서 실수하신 거야. 장난을 가끔.”
콰아악, 이위로의 입을 막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장난을 치시더라.”
숭배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윌로가 장난기가 많고 활기찬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는 유리는 ‘아, 깜짝 놀랐네!’하며 가슴을 쓸고 넘어갔다. 그리고 세상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이위로에게 ‘고귀하신 왕족을 뵙습니다. 혁명군 유리가 인사드립니다.’하며 인사하고는 데아에게 바구니를 건넸다.
“이게 뭔데?”
“피파글랜 님이 너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어.”
바구니 안에는 알록달록한 해초 다과와 결정이 있었다.
“어? 치료석이네?”
“치료석……?”
“피파글랜 언니가 직접 만든 치료 결정석이야. 이걸 통째로 삼키거나, 치료 부위에 문지르면 그 어떤 상처도 치유되지. 아마 언, 아니, 데아 너를 걱정했나 봐.”
유리가 부러운 얼굴로 탄성을 질렀다. 그런 유리를 본 데아는 그것을 소분해서 일부를 유리에게 주었다. 그런 뒤 나머지는 자신의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남은 과자들은 다 드세요.”
“좋아!”
그때 유리가 데아의 팔을 잡고 뒤로 질질 끌었다. 목소리를 낮춘 얼굴이 히죽 웃었다.
“데아야, 데아야. 언제 윌로 님과 그렇게 친해진 거야? 진짜 부럽게……. 나중에 혁명에 성공하고 한 자리 꿰차면 나 잊지 않아야 해. 알겠지?”
데아는 드물게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혁명에 성공하고 한 자리 꿰차면’이라……. 그렇게 된다면 아마 그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니지 않을까…….
“나 안 친해……. 그리고 저분이 왜 그러시는지 나도 몰라. 네가 데려갈래?”
―세상에! 데아 네가 아직 이곳 생리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영광을 영광인 줄도 모르고!
유리는 자신이 더 안타까워하며 꼬리를 동동 굴렸다.
―네 출신이 누군지, 주군이 어느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피파글랜 님 같은 1세대 인어님들을 종종 보는 위치에서 살았던 것 같은데. 맞아?
데아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래서 1세대 인어님들의 위대함을 모르는 구나! 잘 들어. 그분들은…….
그 후로 데아는 단군 신화와 비슷한 정도의 연대기를 줄줄 들어야만 했다.
유리가 말하는 ‘1세대 인어님들의 위대함’의 결론은 하나였다. 폭군과 폭군의 개들을 제외한 1세대 인어님들은 정말 강하고, 정말 아름답고, 우수하며, 멋지니까 일생에 한 번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어…….”
데아는 유리의 전도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왔고, 홀로 남았을 때 통신 소라를 꺼냈다.
“권도언 길드장님.”
―데아 씨? 뭔가 오랜만 같네요. 누굴 찾았나요?
“이위로를 찾았어요. 하지만 리서 언니는 아직…….”
―이위로? 그 인어 말인가요? 역시 수면 아래 있었나 보네요. 저도 아직 백리서는 못 찾았어요. 어디 있는 건지…….
“길드장님 그러면 지금은 어디 계세요?”
―전 아직 그 할머니의 동화 속 오두막집에 있어요.
권도언은 그 섬에 여전히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윗과 영영 헌터도 지금은 이곳에 있어요. 꽤나 인자하신 분 덕분에 지금은 잘 먹고 푹 쉬고 있는데, 한 번 보러 오실래요?
주먹이 꽉 쥐어졌다. 데아는 희망을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게요!”
―참고로 영영 헌터랑 가윗은 데아 씨가 인어인 거 모르니까 발목 잘 가리고 오세요.
원래라면 인어가 아니라고 반박해야 옳았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짧은 침묵 후, 권도언이 먼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부정도 안 하네요?
망할…….
―저는 신경 안 써요. 이제 데아 씨는 포기했어요. 연구 재료로 안 쓸 거고, 배신감 같은 것도 절대 안 느낄게요. 정말로 다 손 놓을게요. 하지만 가윗과 영영은 아닐 텐데…….
하영주와 가윗은 몇 번이고 인어들에게 생명을 위협받은 적이 있었고, 심지어 동료를 잃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권도언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냐, 그 사이코의 생각을 이해하려 하지 말자.
―그 둘에게 들키면 안 돼요. 아시겠죠.
“…네.”
―그럼 최대한 빠르게 놀러오세요. 백리서를 어디서 찾아내야 하나 계획도 세워야 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통신 소라는 뚝 끊어졌다. 데아는 기묘한 이질감에 휩싸였다.
그 알 수 없는 이질감에 잠시 고민하던 데아는 고개를 한 번 젓고 몸을 돌렸다. 일단 다시 이리나의 오두막집이 있는 그 섬으로 가봐야 했다.
“길이 어느 쪽이었더라.”
도라안이 무작정 데려가서 헛갈리는데…….
“누굴 몰래 데려가야겠다.”
길을 헤매지 않도록, 혹시 인어들에게 발각되었을 경우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그리고 모든 상황을 알고 이해하며, 느긋하게 섬 주변에 숨어서 데아를 기다려 줄…….
“아 진짜…….”
왜 하필 이 순간에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뿐인지.
한숨을 쉰 데아는 피파글랜의 거처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