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쟤―야―?’
이위로가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크게 뻐끔거렸다. 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성체지? 아냐, 성체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많이… 큰데?”
―……?
“왜 어린애가 아니지? 왜지?”
자잔의 미간이 죽일 듯 찌푸려졌다.
“거기 2세대 인어야, 이름이 뭐니?”
여전히 자잔에게 이위로는 변절자, 추방당한 인어였다. 그렇기에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지만… 결국 자잔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자잔.
“그거 네가 지은 이름이야?”
―응.
“멋지네.”
이위로와 자잔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위로는 트리야의 권속이 혁명군 안에 있다는 걸 의외롭게 여기는 듯했지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 ◈ ◈
데아는 차례로 주요 혁명군 인어들과 뒤늦은 인사를 나누었다.
―데아 님이 왕궁을 터뜨린 장본인이셨어요? 한동안 난리가 났다는 전서를 받아서 뭔가 했더니!
―헉명군 마을을 아직 제대로 둘러보시진 않으셨죠? 제가 정식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냐, 랜비, 내가 안내할게.
제이제이가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밖에 나갈 예정이라서요. 같이 가실까요?
데아는 자잔을 데리고 그들을 따라갔다. 깊은 후드를 눌러쓴 자잔과 데아 그리고 제이제이와 유리가 혁명군 본부를 넘어 제국에 꼬리를 디뎠다.
―여긴 번화가예요. 제국의 활기가 다 모여 있는 곳이죠.
데아가 본 제국은 기이하게 메마른 도시였다. 겉으로는 활기차고, 왁자지껄한 모습을 흉내 내는 빈 허물들의 도시.
―어때요?
“신기해.”
불가사리와 비슷하지만 다른 생물체가 보였다. 처음 보는 이상한 물고기가 우르르 몰려다니고, 그 사이로 작은 인어들이 뛰어다닌다.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결정을 파는 인어, 사탕을 파는 인어, 인어들의 주식인 작은 물고기들을 몰고 다니며 한 마리씩 잡아 파는 인어가 활기를 만들어 내는 거대한 광장.
그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저건 뭐야?”
―폭군 트리야의 상징 비석입니다. 종이 울리면 모두가 저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해요.
그때였다. 작고 길게 울려 퍼지는 거슬리는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데아는 본능적으로 이게 ‘종’임을 깨달았다.
―하필 이때…….
―눈에 띄고 싶지 않으면 고개를 숙여!
유리와 제이제이는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자잔이 데아의 뒤통수를 눌렀다. 광장을 지나던 모든 백성 인어들 또한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뭐야, 이런 거 진짜 싫은데?”
―샤샤, 조용히 해.
―대부분이 겁에 질려 있지요.
정확했다. 그들은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당장 검은 후드를 쓰고 들어온 데아의 일행을 불안한 눈으로 흘끗거리기도 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뻔했다. 비밀 간부, 서로를 신고하는 이웃, 포상금 제도. 교묘한 긴장감이 베일처럼 내려앉은 도시는 아름다웠지만 창백했다.
―으아악!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제복에 녹색 자수, 간부복을 입은 간부가 한 인어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있었다.
―살려, 흑, 살려 주세요! 저를 왜 갑자기……! 아악!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모두가 바삐 그 주변을 뜨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왜 저러는 거야?”
―나서지 마.
자잔이 데아의 앞을 막았다.
―저 붉은 가면이 보여? 저건 1공대의 바람잡이야.
“그게 뭔데?”
―분위기를 조성하는 간부들이지. 우리는 저자들을 바람잡이라고 불러.
주기적으로 폭동을 일으켜 백성들에게 간부의 위험성을 각인시킨다는 ‘바람잡이’들은 과연 거칠었다.
“그럼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아니… 인어를 저렇게 잡는 거야?”
―잡기만 하면 다행이지. 괜한 누명을 씌워서 죽이기도 해.
―감히 시간이 되었는데 고개를 숙이지 않다니!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 저는 고개를 숙였, 으아악!!
―닥쳐라! 네 놈의 품에서 이게 나왔다!
그리 말하며 바람잡이가 들어 올린 건 바로 작은 조약돌이었다.
―이 돌에 ‘해룡이 돌아왔으니, 태초 또한 돌아오리라!’라고 적혀 있군!
주변이 술렁였다. 피해를 입은 인어는 고개를 사정없이 저었다.
―모, 모르는 돌입니다! 저는 그런 돌을 가진 적이 없어요! 간부님들이 직접 가져오신 돌이잖아요! 왜 저에게 누명을 씌우시는 겁니까?
“자잔, 저거 설마…….”
저 돌, 태초에 대한 글귀가 적혀 있는 돌.
자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기적으로 바람잡이들은 태초의 서적에 적혀 있는 글귀를 돌에 옮겨 적은 다음에 주변에 숨겨 두거나, 무작정 찾았다고 하면서 평범한 인어를 변절자로 몰아가.
“그럼 그때 너도…….”
도서관에서 뚝 떨어졌던 자갈.
“자잔, 너는 그 돌이 그런 돌인 줄 알고 있었던 거네?”
―…….
“그런 걸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도 수긍했어?”
따악! 데아의 손이 자잔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 자잔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말대답하지 마. 꽉 막힌 게!”
―무슨 말 하고 계세요? 조용히 하세요! 다 들리겠어요.
제이제이가 빠르게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사이, 폭력의 수위는 더 높아지고 있었다. 많은 인어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며 그 참상을 방관했다.
―변절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군.
간부는 곤봉을 또다시 들어올렸다. 푸른 피가 퍼졌다. 죄 없이 폭력을 감내하던 인어가 항복을 외친 건 그 때였다.
―잘, 잘못했습니다, 제, 제, 제 잘못입니다……!
―다들 보아라! 이 변절자 인어가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광장, 그 안에 있는 모든 인어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저 인어는 죄가 없다.
―주…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역모 죄인에게 죽음을! 역모 죄인에게 비극을!
그럼에도 호응을 하고 바닥을 두들기며 ‘죽여라’를 외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으니까.
데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자잔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샤샤, 봤지?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데아와 자잔의 두 눈이 마주쳤다.
―이건 뿌리 깊은 관습과도 같아. 아무도 바꿀 수 없어.
“저 간부들과 한 패였던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부인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봤잖아. 어렵다는 걸.
자잔은 말을 아꼈다.
―그러니까 포기하고 인간계로 돌아가, 샤샤.
자잔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러나 데아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 말은 진심이 아니다.
―네가 태초라는 걸 인정할게.
“…….”
―태초에 대한 전설은 모두가 퍼져 있어. 나도 알아. 태초는 다른 이의 몸을 빌려 제국에 돌아오지. 오래된 전설이야.
“…….”
―그러나 기억하는 건 하나도 없잖아.
기형적이고 무도한 사회, 독재의 힘으로 약자의 머리를 비트는 사회. 그 사회의 인어들은 모두 태초에 대한 전설을 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반드시 원래의 제국으로 돌아오는 태초. 당연했다. 그의 신화는 100년 전만 해도 모두의 상식이었으니까.
기억이 없잖아.
그건 정답이었다. 지금이라도 이동 스크롤을 찢으면 데아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저기서 부당하게 피를 흘리는 인어와 던전 바다 아래의 독재를 다 잊고, 새롭게 시골에서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겠지.
“…맞아. 나 사실 힘도 없어. 내가 태초가 과연 맞나 싶을 정도로 약해.”
―그건 옆에만 있어도 알 수 있어. 지금의 너로는 내 주군을 결코 이길 수 없어. 그 어떤 1세대 인어도 마찬가지야.
SS등급 던전에서 튀어나온 피파글랜은 결국 날 봐줬다. 자잔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제야 데아는 왜 자잔이 순순히 자신을 따라왔는지 깨달았다. 이 말을 들려주려고, 광장에 가서 이 이야기를 하려고.
“아까 위로랑 있을 때 시간 내어 달라는 이유가 이거였어? 단념하라 말을 하려고?”
―…비슷해.
자잔은 성장함과 동시에 위축되었다. 현실을 갑자기 깨달아 버린 탓이다.
―트리야가 네 정체를 안다면 널 죽이려고 할 거야. 이쯤하면 됐잖아. 물러서.
“미안하지만, 트리야는 이미 날 알고 있어.”
심증뿐인 추측이지만, 직감이 말하고 있다. 분명하다.
―알고 있지만 네가 스스로 자각했다는 건 모르겠지.
“아냐. 이제 알아. 내가 해룡을 찾았다고 하고 나왔거든.”
―그렇다면 더 위험해. 나는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군을 봐왔어. 넌 당장 돌아가야 해. 트리야가 널 못 찾아서 봐주는 게 아니야. 지켜보는 거지. 주군은, 트리야는…….
그는 모든 것의 방관자니까. 제국의 멸망까지도.
트리야는 개미가 어디까지 오를 수 있나 구경하다 고지 앞에서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것이다.
―트리야는… 여전히 내 주군이지만, 뭔가 이상해. 주군은 스스로 제국을 망가뜨리고 있어. 이유는 나도 몰라. 속을 알 수 없으니까 더 위험한 거야. 나는 샤샤, 네가 살기를 바라.
“…….”
―그래, 인정할게. 네가 지금 주군에게 잡힌다면 죽지는 않을 거야. 대신 영원히 고립되겠지. 태초의 시체 조각처럼.
자잔은 실토했다. 데아는 순간 멍을 때렸다.
“…뭐?”
―태초의 시체 조각처럼.
“시체 조각을… 고립시켰다고?”
그 순간 데아는 납득해 버렸다. 그래, 그 미친놈이라면 그럴 법도 해!
꿈속에서 봤던 트리야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지나치게 순종적이고 잘 웃던 모습.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결국 비극으로 끝난 권속의 충정은 어긋나 버렸다.
정말로 트리야는 태초의 껍데기와도 같은 하얀 시체 일부를 건져 내어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트리야의 지나친 특별 대우도, 자잔의 염려 또한 이해가 간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러나 그 사이에서 데아는 기묘한 확신을 느꼈다.
주변의 염려가 더 행동에 불을 지폈다.
“정말로, 정말로…….”
이걸 막을 사람은 나뿐인 거지?
같잖은 영웅 심리는 없었다. 없었다고 믿었다. 인간계에서도 본인 안위 하나 지키지 못했는데 무슨 제국을 지킨다고.
그러나 그건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다. 데아는 단지 오기가 있을 뿐이었다. 강력한 오기, 지기 싫은 거친 반발. 이 비틀린 제국에 대한 반항심. 그리고 최소한의 공감 능력.
그래. 그거다. 내 모든 합리화. 길고 길었던 갈림길의 끝.
“내가 말했지. 너에게 번영을 약속해 준다고.”
―뭐?
“번영은 태양 아래 가장 빛나는 법이지.”
그건 자잔에게만 하는 약속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약속한 다짐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할게. 나는 트리야한테 큰 악감정이 없어.”
놀랍게도 그랬다. 아직까지 트리야는 나에게 직접적인 해악을 끼친 적이 없으니까.
“너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모른 척한 거는 조금 괘씸하지만…….”
어찌 되었거나, 트리야는 데아에게는 늘 친절했으니.
“하지만 늘 이런 무력한 기분을 느끼기도 쉽지 않은데, 자꾸 트리야는 나한테 그런 기분을 줘. 이런 비현실적인 제국을 볼 때마다 일 분 일 초, 매 순간 나는 허무함을 느껴.”
데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마저 트리야가 의도한 거겠지. 내가 태초인 걸 알고, 일부러 망가져 가는 제국을 보여 준 거야.”
꿈에서 보았던 트리야의 복잡한 표정은 바로 이것을 뜻했다. 데아는 마침내 깨달았다.
트리야의 목적, 태초밖에 없던 트리야가 태초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결심한 것, 그가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기어코 왕위에 올라 이루려는 것. 왕위에 위협이 될 ‘태초’인 데아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특별 대우한 이유, 편안한 몸과 다르게 병들어 가는 제국을 보며 괴리감을 느끼길 바랐던 이유.
그건 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