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데아는 앓듯이 떠는 자잔의 등을 토닥였다. 자잔은 바다를 목격하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 참담함을 속으로만 삭였다. 최초의 발걸음에 앞서 겁이 났다.
―…어떻게?
“나를 따라.”
트리야를 닮은 눈. 그건 오판이었다. 트리야가 태초의 눈을 그대로 빼닮았던 거였다. 그리고 샤샤가 가진 눈은 원래 자신의 눈이었고.
“과거의 나는 트리야를 가장 많이 사랑한 모양이야.”
자잔은 태초를 마주했다. 그 눈은 더 이상 트리야를 연상시키지 않았다.
“그러니 가장 강한 인어가 되었겠지.”
가장 고요하고 정적인 열정이 자잔을 응시했다.
“물론 과거의 나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또한 고민하지 않겠지.”
나를 따라 와. 내가 너에게 주군의 애정을 선사할게.
데아는 자잔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이건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한 친애.
가장 밑바닥에서 올라올 조건 없는 순정.
“수고 많았어.”
그 말이 뭐라고, 자잔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데아야! 어디 갔다가 왜 이제……. 어?
―아까 그 건방진 인어는 어디 갔어?
―누구세요? 데아야, 뒤에는 누구야? 아는 인어야? 이 분도 내부 고발자이신가?
데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응. 아까 그 자잔.”
아이와 성인의 가운데에 걸쳐진 모습. 10대의 끝, 20대의 초반의 모습의 자잔이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패인 눈, 각을 지고 떨어진 콧등과 이마, 날렵하게 깎인 턱선, 음울하고도 권태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장신의 미남은 잔잔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첫 충심을 포기하고, 비로소 성장한 모습이었다.
◈ ◈ ◈
데아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건 자잔 또한 마찬가지였다. 피파글랜도,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유리도, 다른 혁명군 인어들 또한 입을 다물었다.
왜 저 인어가 갑자기 자라났는지, 무엇을 내부 고발하고 혁명군에 들어왔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정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홀 안에서 데아는 단상 위로 올랐다. 데아를 단지 왕궁으로 숨어들어간 첩자로 알고 있는 몇 인어들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피파글랜이 직접 그 손에 지팡이를 쥐어 주자 소란은 가라앉았다.
지팡이, 그건 발언권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해룡이야.”
데아는 우선, 모든 것을 숨기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해룡이 풀려났어. 맞지 유리?”
―맞아. 해룡은 어디론가로 사라졌지만 멀리 떠났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분명 시기가 다가온 거야.
모두가 긴장했다. 그 시기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으므로.
―이상한 점이 있어. 해룡이 풀려난 장소야. 해룡은 태초님 이외의 인어에게는 반응하지 않아. 그러면 누가 깨운 거지?
“주군이 와서 직접 해룡을 깨우신 거지.”
모두의 시선이 피파글랜에게 닿았다.
“인간계로 넘어간 골칫덩어리들이 드디어 한 건을 했군.”
오오오! 희망찬 환호성이 울렸다. 데아는 바싹바싹 마르는 입 안을 축였다.
그러고 보니 인간계로 넘어간 세 명의 인어는 누구였을까. 한 명은 이위로였지만, 다른 두 명은……?
이위로가 나를 알고 있던 걸 봐서는 분명 다른 두 인어도 내 옆에 인간인 척, 숨을 죽이고 있었을 텐데.
그 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대부분은 유리가 선두에 나서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들의 약점이지. 특히 트리야의 수족, 칸나니아의 역린을 알아내야 해.
많은 인어가 탄식했다.
잠시만, 칸나니아의 약점이라면. 내가 재판소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무수한 붉은 점들이 모여 들었던 곳은 다름 아닌…….
“내가 알아. 바로 오른쪽 귀 뒤!”
피파글랜이 흠칫하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씩 웃었다.
“고위 간부의 역린, 특히 1세대 인어의 역린은 까다롭기에 같은 1세대 인어라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가치 있는 정보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그건…….”
나는 공을 옆으로 넘겼다. 무리에서 소외된 권속의 권속을 향해.
“내부 고발자의 공이지.”
자잔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다른 인어들은 자잔을 향해 ‘쟤가?’하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큰 환호성을 질렀다.
―그걸 알아내다니! 대단해!
―뭐야, 그런 정보를 고발하다니, 그렇다면 혁명군으로 올 만하지. 역시 피파글랜 님이 직접 데려온 이유가 있었구만?
―아, 아니 나는…….
―빼지 마! 자, 자. 친구 이리 와. 그 왕궁 간부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여기서 싹 불어도 돼!
여전히 자잔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인어들도 있었지만 이걸로 몇 인어의 호감은 확실하게 샀다. 다행이었다.
데아는 연령대가 비슷해 보이는 인어들의 손에 으어어 휘둘려 사라지는 자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팡이를 넘겼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한 인어가 거칠게 들어왔다.
―그, 그,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돌아오셨어요!
―뭐?
벽에 기대어 있던 피파글랜이 일어섰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홀에 모여 있던 인어들이 순식간에 뒤를 돌아보고 탄성을 질렀다. 데아도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얼굴, 동그란 눈, 위로 올려 질끈 묶은 긴 머리카락, 보라색 비늘을 가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위로?”
일곱 번째 1세대 인어, 윌로가 돌아왔다.
◈ ◈ ◈
“데아 언니 나 해룡과 만났어. 만나서 이곳으로 온 거야.”
모임은 끝났다.
이위로는 데아를 보자마자 꼬리를 동동동 굴리더니 혼자 들떠 방방 뛰었다. 그러나 곧 데아가 싸늘하게 식은 눈을 하자 곧장 두 손을 모았지만.
“기억은 찾았어?”
“네? 누구세요?”
“장난 말고…….”
시무룩해진 이위로의 머리 위로 축 처진 강아지 귀가 보이는 듯했다.
“다 알고 있잖아.”
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인지는 했지만 아직 정확한 자각은 하지 못했노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데아는 또 현타를 맞았다.
“내가 진짜 태초였다니, 내가 진짜, 내가 진짜로…….”
“진짜라니까! 나 언니 처음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나 사실 JJ길드 던전 참가한 것도 언니 온다는 소식 듣고 참가한 거야! 눈도장 찍고 싶어서!”
“잠깐, 너 제대로 말했다. 그 모래섬 던전 안에서 물속에서 떨어졌을 때 왜 기절한 척했어? 내가 진짜 너 살리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한 거 알아? 그걸 맨정신으로 다 보고 있던 거야?”
“하, 하지만 그때 내가 멀쩡한 척을 할 수는 없었잖아!”
“한 대 맞자. 이리 와!”
“으아악!!”
데아는 미약한 힘을 담은 경배를 소환했다. 그렇게 경배를 든 데아에게 도망치는 이위로와 그를 쫓는 데아의 상황이 반복되었다.
“재밌게 노네. 신체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가.”
“뭐? 지금 나를 저 고딩하고…….”
뚝, 데아는 경배를 없애고 잠시 이위로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왜, 왜?”
“혹시 몇 살이신지……?”
저기 꼬꼬마 자잔의 나이도 90이 넘었던데 혹시……?
“나? 몰라. 안 세어 봤어. 피파 언니, 언니가 나이가 몇이지?”
“너랑 나랑 몇 백은 차이 나.”
“맞아. 나보다 어린 1세대 인어는 한 명밖에 없어.”
데아는 이위로의 나이를 대강 수천 년이라 가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질문 하나 더. 인간계로 넘어간 다른 인어들 있지.”
“어, 어?”
“누구야? 다 불어.”
그러나 이위로는 입을 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돼! 이건 언니라도 절대 못 말해. 큰 비밀이야. 극비라고!”
“웃기시네! 결국 목적이 나 아니었어?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말이 돼?”
“그래도 안 돼. 나한테 배신감 느낄 거면서!”
“더 느낄 배신감도 없어!”
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사실 알고 있어.”
이위로는 물론이고 둘을 지켜보며 실실 웃던 피파글랜도 뚝 멈췄다.
“알고… 있다고?”
“그래. 짐작 가고 있는 부분이 있었지. 어쩐지, 수상하더러니.”
“누구, 누군데?”
“내가 왜 말해 줘야 해?”
끈질기게 달라붙어 묻는 이위로와 투닥투닥 싸우던 데아가 결국 소리쳤다.
“사내 카페 사장님!”
“……?”
이위로는 잠시 침묵했다. 데아 언니는 다 좋은데 눈치가 조금…….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이상하게 내가 주문할 때만 정량보다 더 많이 주더라고.”
“…오!”
“너희는 기본적으로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잖아. 그렇지?”
“…와!”
“…반응이 왜 이래.”
“아냐. 난 언니 좋아해.”
이위로가 싱글싱글 웃었다.
“사실 언니 성격도 좋아해. 무심한 듯하면서 다정하거든. 내 주군이 아니었어도 난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었을 거야.”
“…….”
데아는 궁금했던 말을 그냥 해보기로 했다.
“내가 주군인 거… 안 어색해?”
“왜? 처음부터 알고 접근한 건데?”
그건 그렇지만…….
“뭔가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서. 내가 아는 주군과 권속 관계는 조금 더, 뭐랄까… 무거운 느낌이 있었거든.”
트리야와 자잔이 그랬지.
“에이, 상하 관계 엄격한 관계면 그럴 수 있지만 언니가 나를 군대로 써먹는 것도 아닌데, 뭐.”
“군대?”
“아 몰랐어? 군대를 위해 자신의 권속을 만든 인어도 있어. 칸나니아 알지? 피파글랜 언니랑 움 언니 다음으로 권속을 많이 탄생시킨 인어야. 거기 권속들을 본 적이 있는데, 와, 그렇게 답답해 보일 수가 없더라. 주군한테 90도 인사를 하고 규칙하나 어기면 곧장 불려가 질책받는데, 그게 인어가 살 환경인가 싶었다니까! 완전 개인 사병취급이었지.”
이위로의 말을 들은 데아의 궁금증이 쏠린 방향은 피파글랜이었다.
“피파글랜, 너는 왜 그렇게 권속을 많이 만들었어?”
“신기하고 심심해서요?”
“아…….”
피파글랜다운 이유였다.
“위로야, 너는 권속이 있어?”
“나? 나는 없어.”
“앞으로도?”
“응. 앞으로도.”
“왜?”
그러자 이위로가 씩 웃었다.
“트리야 같은 권속이 탄생할까 봐 무서워!”
젠장, 반박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권속들한테 신경 잘 못 써 줄 걸. 나는 여행과 변동성을 좋아해서 한곳에 정착을 잘 못해.”
“같이 가면 되지. 태어난 권속이 애기도 아닐 텐데.”
“걔가 여행을 싫어하는 애면 어떡해.”
이위로는 절대 신경을 써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권속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다 주군의 자격을 갖추는 건 아니지. 므아나 언니를 봐! 그 성깔에 어떤 권속이 좋아하겠어? 본인도 그걸 알고 권속을 안 만들잖아.”
“나는 므아나가 누군지 몰라서 모르겠어.”
“아차차,”
그런 성격 나쁜 인어가 있다며 말을 얼버무린 이위로는 웃었다.
“뭐, 트리야보다는 아주 조금, 마이크로 먼지만큼 낫다고 생각해. 그래도 주군을 배신하거나, 왕위에 욕심을 내거나 그러지는 않거든. 와, 생각해 보니까 트리야는 권속을 안 만들기 천만다행인 것 같아. 트리야를 주군으로 둔 권속? 그건 악몽이지. 분명 몸도 다 안 자라게끔 방치했을걸?”
순간, 데아는 피파글랜을 쳐다봤다. 피파글랜은 딴청을 피웠다.
“트리야한데 권속이 없기는 왜 없어. 한 명이지만 있어.”
“뭐어? 있다고?”
이위로가 책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말도 안 돼! 내가 제국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누구야? 왕궁에 있어? 분명 일찌감치 버려져서 트리야 근처를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겠지! 뻔해!”
―샤샤. 잠시 시간 있어?
그때 문이 열리고 자잔이 들어왔다.
이위로는 친화력 없으면 시체인 인어답게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출입에도 “안녕!” 손을 들어 보이곤 다시 데아를 쳐다봤다.
“…….”
그리고 이위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잔의 눈, 코 입, 머리카락 색, 비늘 색까지 모두 한 인어를 연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
이위로가 이렇게 장시간 입을 다물고 있다니, 이건 기록이었다. 이위로는 다시 데아를 쳐다보고, 자잔을 돌아보더니 다시 데아를 응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