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거대한 무언가가 풀썩, 움직였다. 물결이 덜덜 떨려왔다.
“뭘 믿냐니?”
―설사, 네가 태초라 한들.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
―너는 그가 아니니까.
해룡의 말을 들은 인어의 표정이 이상했다. 눈을 느리게 감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고는 어깨를 떠는 것이 아닌가.
설마 우는 건가 싶어 해룡은 눈꺼풀을 느리게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공을 향해 정확히 겨누어져 있는 거대한 창을 발견했다.
“너의 역린은 신체가 아닌 정신이지.”
인어가 거대한 삼지창을 불러냈다. 해룡은 그것의 정체를 단숨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바다의 경배!’
“나의 뜻에 동참하지 않을 거라면 이곳에서 영원히 잠에 들도록 해. 끝의 끝까지 몰려 나갈 구실만을 찾던 수호룡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
“다시 묻는다. 나를 따라 나갈 건가? 아니면 여기서 영원히 시력을 잃을 것인가? 어차피 태초는 나이기에 다음은 없어. 나 다음으로 올 태초 또한 없어, 너에겐 지금뿐이야.”
침묵하던 해룡이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태초의 고목이 기우뚱, 기울어지고 산사태와 같은 충격이 사방을 강타했다. 차가운 물이 한쪽으로 강하게 쏠리며 동굴을 부쉈다. 까마득한 어둠처럼 제국을 드리우던 동굴의 일부에 금이 갔다.
―너는 이 제국에서 무엇을 하고 싶지?
데아는 용의 비늘 사이에 창을 고정시켜 물살에서 버텼다. 용의 푸른 눈이 자신을 투영했다.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나는 이 동굴을 부수고, 이 세계에 태양이 내리쬐게 할 거야.”
―왜? 너에게 이 제국에 대한 애정이 있던가?
“아니, 없어!”
그러나 가장 작은 이유가, 가장 작은 동기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내가 여기에 집을 얻고 살아야 하거든.”
데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난 태양 없이 살 수는 없어. 부당하게 인어를 죽이는 추격대도 싫고, 겸사겸사 죽어 가는 생명도 구하면 좋잖아?”
처참하게 거리에 매달린 살코기들, 불합리한 사형 선고에 반박조차 못하던 자잔. 간부와의 작은 접촉에 땅에 이마를 박고 용서를 빌던 작은 인어들.
푸른 피를 두르고서 죄책감 하나 없이 미소하던 폭군.
“그리고 나뿐인 것 같아서.”
트리야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
내가 태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트리야를 막을 사람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나뿐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귀찮으니 피해야 하는가?
나는 착한 사람이었나? 그러나 그것 하나는 분명했다.
이런 빌어먹을 구조는.
“이런 이상한 곳은 없어져야 옳으니까.”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해룡은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동굴에 그러진 금이 더 커졌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의 희망이 차올랐다.
―네 부름에 응답하지.
성공했다.
데아는 해룡을 감싸는 빛의 무리를 보았다. 빛무리는 작게 모여 작은 구슬을 만들었다. 그중의 일부는 휘익 밖으로 달아나 버렸지만 용은 나머지 일부를 붙잡아 데아에게 내밀었다.
―이런… 하나가 도망을 가버렸군. 걱정하지 마라.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 결국 스스로 찾아올 기억이니까. 이걸 먹어라. 이곳에 봉인되었던 네 마지막 조각이다.
“조각…….”
―자아의 일부지. 그걸로 너는 완전해진다.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만…….
해룡은 떠나간 과거의 전우를 상기했다.
전우는 죽지 않는다. 죽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러나 돌고 돌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또 이 자리를 찾아왔다.
‘태초, 이번의 너는 꽤나 호쾌하구나!’
◈ ◈ ◈
태초의 고목을 찾아가는 건 쉬웠다. 데아는 혁명군의 뒷길을 통해 검문소를 지나지 않고 손쉽게 태초의 고목에 도달했다. 그리고 용을 만나고, 성공했다.
“이걸 먹으라고?”
와압, 먹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해룡은 그대로 데아를 낚아채고 밖으로 돌진했다.
―뭐, 뭐야?!
―흐아악!
거대하고 기다란 몸체가 검문소를 그대로 박살 내고 지나갔다. 저번에 데아가 부순 그 검문소였다.
부랴부랴 검문소를 수리하고 있던 인어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저거 다시 고쳐야겠네.
―해, 해룡이다!
―뭐?! 말도 안 돼!
“잠깐. 위로, 위로… 동굴 위로 안 뚫어? 왜 옆으로만 가?”
―아직은 역부족이다.
“아니, 금방 뚫겠고만……!”
―네 정체를 모두가 아는가?
“조금만!”
―다는 모른다는 거군.
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룡이 몸을 휙 돌려 어딘가로 가더니 겹쳐진 바위 뒤로 데아를 내려놓았다.
―너와 나의 연관성을 남들이 알면 위험할 거다. 아직 이곳은 트리야가 지배하는 제국이니까. 폭군의 추종자가 너를 보면 틀림없이 해치려고 할 터.
“시간 차를 두고 나오라는 거지?”
―정확해.
해룡이 저 멀리 떠나갔다. 데아로부터 멀어져 가는 해룡을 거대한 모습을 보고 경악한 인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지형이 조금 바뀐 걸 보아하니, 해룡이 몸을 일으킨 게 확실히 파급력이 강했나 보다.
“우아하네…….”
꿈에서 본 모습보다는 조금 더 지쳐 보였지만, 해룡의 하얀 비늘과 수염, 우뚝 솟아 있는 뿔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이로써 피파글랜은 신호를 받았겠지.’
해룡을 만나러 오기 전, 데아는 피파글랜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룡이 몸을 일으키면 싫어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던 피파글랜에게 그럼 그것을 신호로 정하자고 한 것도 데아였다.
그 신호로 하여금 피파글랜이 실행할 임무는 바로, 데아로 인해 왕궁의 일부분이 붕괴된 것과 갑작스러운 해룡의 등장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왕궁에 잠입해 자잔을 구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파글랜이랑 자잔은 초면이려나? 그래도 자잔은 피파글랜의 얼굴을 알 것 같은데……. 설마 싸우지는 않겠지.’
데아는 해룡의 온전히 멀어질 때까지 시간을 두고 바위 뒤에서 나왔다.
이 근처가 바로 혁명군 본부다. 데아는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 ◈ ◈
“안녕?”
자잔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빙글거리는 낯짝의 인어, 겉으로는 중립을 연기하면서 속으로는 반역 세력과 내통하는 그 변절자 인어! 제왕의 은혜도 모르고 고고하게 초대를 다 쳐냈던 기고만장하고, 쓸데없이 콧대만 높은 그 인어! 그 망할 인어가 지금 자잔의 눈앞에 있었다.
“지금 이걸 철창이라고 설치해 놓은 거니?”
피파글랜은 자잔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 간부네?’하고 키득거렸다. 그리고 철창을 두드리더니 우드득, 단번에 철창을 꺾어 문을 열었다.
하필 간수가 없을 때 피파글랜이 침입해 왔다. 자잔은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샤샤가 나를 이곳에 보냈단다, 아가야.”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자잔의 머리 회전이 딱 굳었다.
“샤샤가 널 구하라고 했단다.”
―꺼져. 난 안 가.
“멍청한 애송이. 나도 널 좋아서 구해 주는 게 아니야. 네 손에 죽은 3세대 인어를 안고 울부짖던 내 불쌍한 권속이 아직도 눈에 선명해.”
피파글랜은 자신의 인어들에게만 다정하다. 하지만 적에게는 그 누구보다 잔혹하게 돌변했다.
―이해가 안 가. 너 같은, 1세대 인어가 왜 샤샤의 말을 듣지? 샤샤가 시키라고 다 하나? 아니 애초에 어떻게 샤샤와 어떻게 서로 아는 거지? 샤샤에게 이 부탁을 대가로 뭘 뜯어냈어!
“아, 시끄러워.”
자잔은 사지가 묶인 채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 격렬한 반항에 피파글랜의 자비가 닳아 가고 있었다.
“뜯어냈다니. 너는 아직 몰라도 한 참 모르나 본데, 샤샤는 나에게 이 일을…….”
피파글랜은 몇 시간 전, 통신 소라로 샤샤의 연락을 받았다.
“샤샤는 나에게 이 일을 ‘명령’했단다.”
―…뭐?
통신 소라를 통한 데아와의 대화는 짧고, 간결했다.
―피파글랜,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
―내가 앞으로 시킬 일을 해. 신호를 보낼 테니까…….
‘여전히 유쾌한 나의 작은 주군. 아직까지 이렇게 물러서 어떡해요.’
“처음으로 한다는 명령이 고작 이런 조그만 2세대 인어를 구해 주는 일이라니. 이런 건 바닥에 떨어진 조개를 줍는 것만큼이나 쉬운데 말이지.”
―이거, 놔! 안 놔?
“미안하지만 이 일에 너와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 이 모든 건 태초의 뜻대로.”
―태초의… 뭐?
피파글랜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자잔의 허리를 낚아챈 피파글랜은 그대로 소란스러운 왕궁을 가로질러 바다 속으로 빠르게 헤엄쳤다. 그 누구도 피파글랜을 보지 못했다.
―어디, 어디 가는 거야?
“혁명군의 본부.”
―뭐?!
그런 변절자들의 소굴에?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허락해라!
“헛소리.”
―놔라! 썩 꺼져! 샤샤를 어디에 끌고 갔지?
“그분 또한 혁명군에 계신다.”
자잔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피파글랜은 그 눈에 쐐기를 박았다.
“먼저 혁명군에 들어온 건 그분이지. 뭐, 머지않아 곧 보게 되겠지만.”
◈ ◈ ◈
“태초에 한 인어가 있었어.”
―제, 제왕님, 지금 밖에 해룡이……!
―엇, 칸나니아 님!
“태초에게도 한 인어가 있었지.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연약한 인어. 그게 바로 나야.”
엄숙한 기둥이 천장을 받드는 제왕의 알현실. 무너진 벽 너머로 심해를 바라보는 트리야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창틀을 잡은 손에서 피가 떨어졌다.
“이데아가 혁명군으로 간 건 예감했어.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거든. 내 주군은 이번에도 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구나, 예상도 했었고.”
“제왕님, 손에서 피가 납니다. 어서 이 포션을 바르십시오.”
“참으로 무정해, 그렇지?”
트리야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칸나니아가 그 뒤를 따랐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저는…….”
“너도 참 이상해. 분명 수천 개의 알을 부수는 나를 봤을 텐데, 나에게 거부감이라곤 조금도 가지지 않아. 아무리 부화 전이라고는 하지만 기척으로 느꼈을 텐데.”
수천 년 전, 또 다른 동족들이 더 태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트리야는 겁에 질려 태초 몰래 알들을 부쉈다. 물론, 다정한 태초는 알고도 눈감아 주었다는 걸 지금의 트리야는 알았지만.
“므아나. 그 릴리므아나가 그 작은 손으로 알 여섯 개를 빼돌려 네가 태어날 수 있던 거야, 칸나니아.”
“므아나 또한 저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행동을 감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므아나는 그저 태초가 덜 슬퍼했으면 해서 알을 빼돌린 것뿐이니까. 겸사겸사 선 역도 자처하고. 하지만 결국 널 살린 건 므아나야. 전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어. 생각 없이 권력만 찾아가는 도라안은 그렇다 쳐도, 너는 왜 나를 따르지?”
“저는…….”
칸나니아는 그때를 상기했다. 가만히 웅크려 있던 그 때, 갑작스럽게 동족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을 때를.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태어난 동족이, 다른 동족들의 알을 깨부숴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동시에 칸나니아는 깨달아 버렸다.
이 동족은 슬퍼하고 있어. 스스로 비참해하고 있어. 주군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거야.
동족이 느끼는 절망과 우울 그리고 슬픔은 전염병처럼 옮겨졌다. 칸나니아는 저도 모르게 트리야에게 깊숙이 공감해 버렸다.
‘내가 당신이었어도 아마 그랬을 거야.’
가까스로 살아 부화해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칸나니아는 트리야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 동정은 절대적인 강자를 향한 동경으로, 숭배로 옮겨 갔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에 대한 충성.
“머저리.”
트리야는 신랄하게 비웃었다.
“그렇게 살도록 해. 평생.”
그리고 트리야는 칸나니아에게서 포션을 뺏어 무성의하게 바르고는 병을 휙,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