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꿈을 꾸는 횟수가 많아졌다. 꿈을 기억하는 날 또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데아는 그간 꿈에 나왔던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가 트리야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동족이 잡혀갔어요. 또 없어졌어요. 인간들의 짓이야.
파란색 머리카락을 한 어린 모습의 도라안이 발을 동동 굴렀다. 감자같이 맹한 표정을 한 헤타가 그를 위로해 주었다.
―태초, 태초님. 주구운. 인간들이 이상해요. 머리에 흰 천을 쓰고 손에 뼈로 만든 장신구를 하나씩 차고 다녀요. 저희를 보면 이상하게 중얼거리고는 손바닥을 높게 들어 하늘을 가려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저희만 보면 소리를 질러요. 이게 뭐죠?
인간들 사이에서 새로운 종교가 퍼져 나갔다.
―이번에 움 누나가 권속을 탄생시켰는데 절반이 잡혀갔대요 가서 통째로 가죽을 벗기고 이등분으로 잘라 죽였대요. 저, 저 너무 무서워요…….
―인어를 먹으면 영생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이 인간들 사이에서 돌고 있어요. 헛소문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안 믿어요.
―맞아요. 태초님, 주군. 저희 거처를 옮기면 안 될까요? 저희를 지키려던 인간 친구가 눈을 다쳤는데, 너무 미안해서…….
데아는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침묵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이 얕은 수면 위로 비췄다.
엎어져 아예 울고 있는 도라안과 그를 위로해 주는 피파글랜과 헤타, 바로 옆의 트리야, 저 멀리 서있는 므아나와 움 그리고 참방거리며 다가오는 윌로와 칸나니아의 얼굴 위로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
―사랑하는 나의 권속들아.
절망 속에서, 데아는 웃었다.
―인어는 물러서지 않는단다.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거야.
그리고 그다음 날, 화마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여덟 명의 인어는 침묵을 지키고 타오르는 땅 위의 마을을 지켜보았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타오르는 시체들, 그 중앙에서 태초가 사뿐히 걸어왔다.
―잘 봐두렴.
태초의 의지대로 물결치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모두가 말을 잃었다. 안개비처럼 내려와 해일처럼, 경이가 덮쳐 왔다.
―그 누가 너희에게 부당한 짓을 한다면, 너희는 마땅히 이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해.
나는 옳고 그름은 잘 몰라. 더불어 생명의 소중함은 더더욱 모르지.
데아는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마저 속삭였다.
―단지 너희들에게 안전한 세상이길 바랄 뿐이야. 공존할 수 없다면, 없애버리면 될 일.
그날, 대륙의 모든 인간이 죽었다. 인어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단 한 명의 인간을 제외하고.
―태초.
그때 므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눈에 깃든 건 명백한 희열이었다.
―역시 주군은 대단해요.
―저게 대단해 보여?
홀로 빈정거린 건 트리야였다.
트리야는 태초가 끝에 끝까지 감추려고 했던 상처를 꿰뚫어 보았다.
―주군. 이게 몇 번째예요.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 주군이 몇 번이나 다치고 있는 거냐고요!
―난 괜찮단다. 트리야.
태초는 자애롭게 웃었다. 모두가 바라는 안전을 위해.
―제국을 세울 거야.
태초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하늘이 한 인어를 향해 몰려들었다. 태양을 가리고 바다를 증발시키는 권능. 저 아득한 밑에서부터 거친 야수의 포효가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땅이 바다를 뚫고 치솟았다. 바다가 위로 확! 튀었다가 비처럼 쏟아졌다. 세계의 절반을 덮는 거대한 왕궁이 인간들의 시체를 밟고 우뚝 섰다.
―바다 아래, 이 제국을 내려놓으마. 이곳에서 너희들은 자유로울 수 있겠지. 그리고…….
바닷물이 흘러넘쳤다.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그 무언가로 인해 대지에 그림자가 졌다.
거친 이빨이 드리워졌다. 그건 세계에 한 획을 긋는 선이었다. 긴 몸 선과 파동하는 마력의 주인.
해룡이었다.
―인어와 제국을 수호하는 영물이 창조되었으니, 더 안전할 거야.
―나의 조물주가 그대인가?
해룡이 몸을 돌돌 말아 데아에게 존경을 표했다.
―좋은 날씨로군.
그리고 정적. 데아는 잠에서 깼다.
◈ ◈ ◈
분위기 좋던데, 지금은 왜 이럴까? 옹기종기 모여 해룡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던 여덟 명의 작은 인어들은 분명히 여덟 명의 1세대 인어였지. 그들의 얼굴은 뿌연 안개처럼 흐려져서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뭐, 트리야는 그중에서도 위성처럼 홀로 떨어져 겉돌고 있었지만…….
“이만하면 됐겠지.”
오늘은 이상하게 차분한 날이었다. 확실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아는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쌌다. 작은 가방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갔다.
―어디에 가십니까?
창문에 고개를 내밀자 감시병이 불쑥 튀어나와 물었다. 트리야와 면담을 다섯 번이나 신청했지만 다섯 번 다 거절당했다. 그걸 보고 다른 인어들은 변덕스러운 제왕의 애정이 생각보다 더 일찍 떨어져나갔다며 수군거렸지만 데아는 알고 있었다.
“왜 보고해야 하지?”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제왕님의 명령으로, 꼭 따르셔야…….
“잠깐 밖으로 나간다고 해.”
트리야는 내가 태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것 또한. 잃어버린 동생은 개뿔.
데아는 그날부로 아무것도 모르는 연기를 그만두었다.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예감이 들었다. 트리야라면, 어쩌면… 그냥 그럴 것 같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나를 간을 보듯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는 못 넘어가 주지.’
“트리야에게 이 말만 전해 줘.”
무슨 말이 너의 허를 찌를 수 있을까? 괜히 오기가 발동됐다. 초월자마냥 고고하게 앉아 있는 구렁이가 펄떡 뛰는 꼴을 보고 싶었다.
“해룡을 찾았다고.”
이건 선전 포고였다.
데아는 그대로 창문 너머로 상체를 기울였고, 동시에 바다의 경배를 쏘아 보냈다.
◈ ◈ ◈
“해룡을 찾았다고.”
콰과과과과과과―!!
믿을 수 없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왕궁의 파편이 이리저리 튀며 부서져 내렸다.
제왕의 분노와 소식을 들은 모든 간부들이 도주자의 흔적을 미친 듯이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 ◈ ◈
해룡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오랜 꿈을 꾸었고, 반가운 손님의 냄새를 맡았다.
아득하게 거대해 뿌리 하나로 거대한 제국에 그림자를 낼 수 있는 고목의 아래에서, 해룡은 기지개를 폈다.
―그대가 온 걸 보니, 때가 된 것인가?
해룡의 확장된 동공 안, 하얀 빛무리가 넘실거렸다.
―나는 태초의 미약한 조각이지.
―트리야가 강제로 가두었다 들었는데, 뚫고 나왔나?
―나는 나를 느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빛무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나를 가짐으로써 그 아이는 완전해질 거야.
―트리야가 눈치챘을 터인데…….
―트리야… 그 아이는 언제나 그랬지. 이미 알고 있어. 모른 척해 줄 뿐. 그 속은 지금이 되어서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도 그대를 모르겠군. 수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아. 왜 그런 선택을 했지?
해룡이 이빨을 드러냈다.
―왜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했지?
―어쩔 수 없었어. 그래야만 모두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
빛무리는 모여들어 아주 작은 인영을 만들어 냈다. 작은 요정과도 같은 존재가 해룡의 미간에 손바닥을 댔다.
―뻔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지.
―…….
―괜찮아. 다른 ‘나’는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할 거니까.
그때 그에게 빛이 스며들었다. 태초의 고목 안의 모든 마력이 그에 공명했다.
―나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몸을 가진 네가 어떻게 너지? 저건 너의 흔적을 가진 아예 다른 이야!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저 아이는…….
끼이이익, 뱀이 기어가는 소리. 미약한 존재가 어둠을 뚫고 고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데아는.
태초의 마지막 조각, 떨어져 나간 마지막 의지. 그가 잔잔하게 흩어졌다.
무수한 빛이 고목의 뿌리로 스며들어갔다.
―나와는 다르게 모두를 지킬 수 있어. 자신까지도.
―너는…….
―나는 게이트의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지. 여기까지 이데아를 인도한 건 나야. 우리의 시간을 너그럽게 봐줘. 해룡, 그대의 숙명을 지켜.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태초의 흔적은 완전히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해룡은 보았다. 자신의 앞발, 손톱만큼이나 작은 어느 인어를.
“네가 해룡인가?”
인어는 발광석이 든 등불을 들고 떠올랐다. 해룡의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그것의 이름은 직감이었다.
너로군.
“내 이름은 이데아야.”
이데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해룡의 눈동자에 자신을 비췄다. 전신, 꼬리지느러미까지 모두가 비춰졌다.
“내 부름에 응답해. 나는 태초를, 태초의…….”
스스로에게 확답하지 못하는 자는 가치가 없다. 용의 눈이 시험하듯 빛났다.
“태초의 뇌를 먹은 인간이다.”
이데아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그렇게 나는 태초가 되었어. 그러니 내 말에 응답해!”
데아는 소리쳤다.
해룡이 내 말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해. 모든 일을 벌이고, 끝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무엇을 믿고 네 물음에 응답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