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9화
“도언이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소름이 쫘악 돋았다. 여기가 노인의 집이 아니고, 옆에 앉아 있는 게 앞잡이 도라안이 아니었다면 곧장 경배를 수십 발 남발하고 고성과 비명을 질렀을 거다.
“도… 도…….”
“도언이.”
길드장 놈, 지금 즐기고 있는 거지?
“도언아.”
“응, 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어금니를 꽉 깨물자 권도언이 비죽 시선을 돌렸다.
“아, 그 친구들. 어린애들 두 명은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되어 있길래 불쌍해서 빼줬어요. 자유롭게 살도록 아무도 없는 섬에 놓아줬는데 행복해하는지는 확인을 못하고 왔네. 그래도 이동 스크롤은 주고 왔으니 못 기다리겠으면 나가겠죠?”
아, 영주 언니랑 가윗은 다행히 길드장님이 잘 탈출시켜 무인도에 숨겼나 보다. 그런데 원숭이라니, 말을 왜 저렇게 해?
권도언의 말에 차를 마시던 도라안이 놀라워했다.
“샤샤, 너 원숭이도 키워? 그 육지의 짐승? 가끔 아무도 없는 육지에 나타난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구나.”
얘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면… 혹시 다른 애들은 못 봤어요?”
이위로랑 리서 언니는!
“우리 집을 오션 파크로 만들어 놓은 고등학생은 못 봤어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오션 파크가 된 우리 집에 덩달아 모래를 뿌려서 해변가를 만들어 버린 어른을 말하는 거라면, 역시 발견 못 했어요.”
“그렇군요…….”
그래도 영주 언니와 가윗이 살아 있다면 한숨은 놓았다. 시간을 들여 지상 감옥에 갈 필요는 없겠지. 남은 건 이위로와 리서 언니의 행보. 그리고 이 눈치 빠르고 성가신 길드장에게 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가 관권인데…….
“도라안, 잠시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어?”
간단하다.
‘친구들끼리 할 담소가 있다고 하면 돼!’
다행히 별말 없이 자리를 비켜 준 도라안과 노인 덕분에 데아는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권도언에게 전했다. 물론 태초에 대한 정보와 어쩌면 자신이 태초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쏙 뺐다.
“데아 씨. 현지인보다 더 많이 제국 일에 얽힌 것 같네요.”
“쉿…….”
“이런데도 정말 인어가 아니라고요?”
“아니에요.”
아직…….
권도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뭐, 제가 따라 들어갈 수는 없는 곳이라는 거네요. 아시다시피 팔찌는 제한 시간이 한 두 시간뿐이라.”
“그러니까 길드장님은 리서 언니를 찾아주세요. 마력을 따라 가실 수 있다고 했죠? 이거 빌려드릴게요.”
데아가 꺼낸 건 마력 탐지기 나침판이었다.
“예전에 리서 언니한테 받은 거예요. 만약에 리서 언니가 신호탄을 터뜨렸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안 터뜨렸다고 해도 길드장님은 예민하시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고마워요.”
도라안이 밖에서 아스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갈 시간이다.
“저도 이 밑에서 리서 언니랑 이위로를 찾아볼게요. 그리고 이거 드릴 테니까 연락해요.”
피파글랜에게 갈취한 통신 소라를 건넸다. 이럴 때를 대비해 받아 놔서 다행이지.
“마력 넣어서 사용해요. 이미 내 소라하고는 연동했으니까 뭐 알아냈으면 바로 연락 주는 거 잊지 말고.”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의 얼굴로 소라를 만지작거리는 권도언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샤샤 님.”
밖을 나가니 도라안이 아닌, 노인이 데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바다 수평선 앞의 노인은 인자하게 데아를 이끌었다.
“제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아 네네…….”
노인 공경, 노인 공경…….
저 멀리 도라안이 보였지만 노인은 데아를 이끌고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눈이 낮게 빛났다. 데아는 긴장했다. 생각해 보니까 이 할머니… 내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았는데, 왜 이런 곳까지 나를 끌고 오는 걸까?
‘무슨 말을 하려고? 태초에 대해 잘 아나?’
“제 이름은 이리나입니다.”
“이리나…….”
“네. 이 세계의…….”
이리나는 하얗게 붕 뜬 눈을 떠 데아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인간이지요.”
파도에 밀려 나와 뭉친 과거의 잔해가 이리나의 눈에 있었다. 뿌옇게 거품이 올라온 바다, 그것을 닮은 노인의 멀어버린 눈.
“…….”
‘결국 눈을 잃었구나.’
멈칫, 스스로 생각하고도 놀라 데아는 굳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지? 이리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기뻤습니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좋은 일도 있군요, ‘태초’.”
섬의 바람은 매섭다. 그 위로 파도가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도로 물러선다.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뭘 떠는 거야. 예상 못했나?
덥석! 데아가 이리나의 팔을 잡았다.
“나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특히 도라안과 트리야에게는.”
머리 위로 땅땅 판결을 알리는 의사봉이 내리쳐졌다. 나는 태초가 맞구나.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닐 거라는 1%의 가능성은 늘 갖고 있었는데……. 이리나의 말로 그것마저 산산이 흩어졌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그 누구에게도 태초의 본질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을 알아챈 것 때문에 놀라셨나요?”
“…….”
“제 눈은 이미 멀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죠. 그건 바로 존재의 본질.”
이리아의 손끝이 툭, 데아의 이마와 목 그리고 명치를 스쳤다.
“다 느껴집니다. 처음 당신이 바다에서 올라와 나를 볼 때부터 나는 알 수 있었어요. ‘태초’가 돌아왔구나. 트리야의 길고 길었던 지루한 독재는 끝이 나겠구나.”
그건 틀렸다. 나는 단지 내 사람을 안전하게 보내 주고 조용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제국을 바꿀 혁명의 의지 따위 나에겐 없었다.
“잠깐. 설마… 아직 기억이 없으신가요?”
“…….”
“괜찮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태초’가 저에게 하신 말이 있었거든요.”
‘태초가?’
멀고 먼 옛날, 죽기 전의 태초가 지금을 예감하고 이리나에게 메시지를 남겼다는 건가?
이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저 멀리 도라안이 빨리 오라고 소리쳤지만, 데아는 이리나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억겁같이 느껴지던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나 주름만 남은 이리나의 입술이 벌어지고, 가냘픈 숨소리와 함께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 인어의 탄생과 종말.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절대자를 기억하는 유일한 인간, 이리나.
“태초의 고목에 찾아가십시오.”
이리나가 까마득한 옛날의 명령을 수행했다.
“가서 ‘그것’을 부르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명에만 반응합니다.”
“‘그것?’”
“그것은 ‘태초의 고목’에 자신의 몸을 감고 100년 동안 잠들어 버린 태초의 수하입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주인이 돌아왔노라 알리십시오. 그것은 틀림없이 당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것이 뭔데?”
“그것은 아득한 심해 아래 눈을 번뜩이는 제국의 영물입니다.”
“설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우선 그것부터 확인해야겠군. 데아는 자신을 재촉하는 도라안을 따라 바다에 뛰어들었다.
◈ ◈ ◈
“해룡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트리야의 눈이 더 서늘해졌다.
이로써 100년하고도 1년. 오만한 영물은 곧 죽어도 새로운 제왕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숨어버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떡하긴. 눈에 발견되는 대로 그 잘난 뿔과 안구를 적출하고 거리에 뿌려 옛 제왕의 시대는 뿌리까지 없어졌음을 증명해야지.”
그 해룡은 마력의 근원과도 연관이 있다. 그러니 없애야만 해.
“언제까지 잘 숨어 있는지 한 번 두고 보자고.”
◈ ◈ ◈
―야, 샤샤… 너 괜찮냐?
“…어, 어?”
데아는 멍때리던 표정 그대로 후다닥 일어섰다. 철창 너머 데아를 지켜보는 자잔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로부터 3일이 더 지났다. 혁명군에서 혹은 권도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데아는 백리서와 이위로를 찾지도 못했고, 나서서 혁명군에 가보지도 못했다. 도라안 이 또라이가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데아를 감싸고 있던 감시의 눈길이 네 배는 더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데아는 피파글랜에게 연락을 취했다. 심해진 감시의 눈에서, 묘하게 자신을 피하는 주변인들에게서 불길한 낌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이것도 먹을래?”
―고마워.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처음에 데아가 넣어 준 사식을 아득바득 거절하던 자잔은 이제 순한 고양이처럼 간식을 잘 덥석덥석 집어먹었다.
“게이트로 넘어가는 다른 세계 말고, 이곳의 인간은 없어? 전에 마지막 인간이라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없어.
“왜?”
―다 죽었으니까.
자잔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스러기가 묻은 입가를 닦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야. 여기에도 육지는 있어. 그런데 그 위에 살던 인간은 다 죽었대. 씨가 말랐다는데, 한 명이 살아 있었는지는 몰랐네?
“그랬구나……. 아, 더 먹어. 응 그것도 먹어.”
손주의 입에 하나라도 더 먹이려드는 할머니의 심정이 되어 산더미 같은 간식들을 자잔이 갇힌 감옥에 넣어 준 지 3일. 데아는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자잔. 내가 한동안 안 돌아올 수도 있어.”
―어디 가?
응. 오늘 간다. 태초의 고목에.
“너는 멋진 애야.”
―……?
자잔이 우물거리던 모습 그대로 뚝 멈췄다. 왜지? 한 번도 이런 칭찬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걸까?
“멋진 애라고.”
―…….
자잔이 느리게 꿀꺽, 간식을 삼키고 주변을 살폈다.
―누가 지켜보고 있나?
“이게.”
데아는 푸스스 웃으며 턱을 괴었다.
“내가 나가고, 누군가가 올 거야. 네가 아는 얼굴일지도 몰라. 그를 따라가.”
―무슨 소리야. 나는 사형수야. 나는 판결을 거부할 생각이 전혀…….“
“네가 아무리 사형을 당하고 싶어도, 스스로를 그렇게 죽게 두지 마.”
뚝, 자잔이 입을 다물었다.
“너는 여기서 죽으면 안 돼. 넌 더 값진 일을 할 수 있는 인어야.”
데아는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도 너의 말은 거절할 거야.
“기억나? 내가 전에 딱 한 번, 부탁을 들어 달라고 했던 말.”
“내가 널 도와줄게. 그러니 훗날, 너도 내가 원할 때…….”
지금은 왜인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예전, 샤샤와 처음 만나 다샤 일행에게 쫓기던 때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다시 자잔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했던가.
―알았어. 단 한 번만.
―딱 한 번만.
데아는 한숨처럼 말했다.
“그를 따라가. 트리야는 너를 구해 줄 생각이 전혀 없고, 나는 네가 죽는 꼴을 절대 못 봐. 이게 최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