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8화
멀고 먼 포탈을 통한 이동이 끝나고, 촤학! 물과 수면이 온몸을 두드리며 흩어졌다.
“다 왔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선명해졌다. 태양이 정수리를 간질였다.
정말 지상이었다. 바람이 부는 밖이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어, 할멈!”
컹컹! 저 멀리 강아지가 짖었다. 하얀 털을 한 작은 소형견이 목에 붉은 리본을 달고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었다.
“저리가 젠.”
어느새 도라안은 인간의 다리를 만들어 내고는 성큼성큼 맨발로 섬을 올라섰다. 그의 앞에는 등이 굽고 선량한 미소를 지은… 동화 속에서나 본 듯한 그림 같은 노파가 있었다.
“우와…….”
울타리 안에 푸드덕거리는 닭들, 목에 방울을 매단 한 마리의 염소, 예쁘게 지어진 통나무 오두막집, 지저귀는 새들……. 왜 여기만 지○리인건데?
포탈로 이어지는 심해는 지금 독재 피폐물을 찍고 있는데 여기만 일상 힐링계였다. 그 부조화에 어버버거리며 데아가 다리를 만들어 위로 올라섰다.
“누군가 더 오셨나요?”
“아, 응. 네가 이번에 확인을 해줄 자이지.”
언뜻 들어 보니, 이 노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확인이 잘 안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아 씨, 분명 1세대 인어가 아니라고 말을 할 텐데, 진짜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도라안의 뒤통수를 치고 무작정 튈까? 좋은 생각이었다. 도라안 한 명만 어떻게 하면…….
“뭐 해? 빨리 와!”
데아는 긴장하며 옆으로 다가섰다.
헥헥, 헥―
밑에서 하얀 강아지가 데아의 다리를 킁킁거리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두 발로 펄쩍펄쩍 뛰길래 어쩔 수 없이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젠이 반기는 인어는 몇 없는데, 오랜만이군요.”
“그건 그렇네.”
“그렇다면 우선 확인을 시작하겠습니다.”
덥석! 노인이 데아의 두 손을 더듬거리더니 이내 와락 잡았다. 그 박력에 데아의 품에 안겨 있던 강아지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데아의 손등과 손목을 휘감는 노인의 악력이 심상치 않았다.
작은 정적이 흘렀다. 미묘한 아지랑이 같은 힘의 파동이 전신을 스쳐 지나간다 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감고 있던 노인의 두 눈이 설풋 떠졌다. 아주 작은 틈새였지만, 데아는 확인했다. 완벽하게 하얘진 노인의 눈동자 안에는 분명한 마력이 있었다.
“확인했지? 얘 1세대 인어 맞아?”
도라안은 꽤나 진지했다.
“…….”
노인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데아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아, 그냥 도라안의 머리를 후려갈기자. 후려갈겨 기절시킨 다음에 무작정 도망치거나 인질로 잡아서 감옥 위치를 알아내면…….
“맞습니다.”
바로… 뭐?
“뭐?”
“1세대 인어님이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적막이 흘렀다. 지저귀는 새, 스쳐 지나가는 바람, 온기를 머금은 동화 같은 섬.
“…….”
데아는 이 노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음을 확신했다.
“잠깐, 잠깐, 정말 1세대 인어가 맞는다고?”
도라안이 황급하게 앞을 막았다. 그는 꽤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말도 안 돼. 아냐, 잠깐만… 그럴 리가……?”
“도라안 님께서 어떤 대답을 원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측정으로는 1세대 인어가 맞는다고 나오는군요.”
도라안은 훽 데아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뭐야?”
“뭐, 뭐긴 뭐야.”
눈을 왜 저렇게 떠?
“너, 그거 다시 써봐.”
“뭐?”
“그거. 눈 붉어지는… 그거.”
“눈 붉어지는 거?”
그런 게 있던가?
“나는 분명히 봤단 말이야. 네가 재판장에서 ‘심해의 눈’을 쓰는 걸!”
심해의 눈? 그건 분명한 내 스킬이었다. 그런데 그걸 썼던가?
“아하.”
바로 생각났다. 말도 안 되는 판결이 나온 직후구나, 스킬 창이 마음대로 켜져 심해의 눈이 발동된 때를 가리키는 듯했다.
그런데 이 새끼가 어떻게 내 스킬 이름이랑 그걸 발동했다는 걸 알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데아가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자 도라안이 900년 묵은 구미호처럼 눈을 치떴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나를 놀려? 눈이 붉어졌잖아?”
“어?”
금시초문이었다.
이제까지 숱하게 능력을 써왔지만 그 누구도 데아에게 ‘네 눈이 피처럼 붉게 빛나’하고 똑바로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
“능력 쓰면 붉어져?”
심해의 눈! 데아는 서둘러 스킬을 사용하고는 섬의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물 위로 비춰지는 하얀 얼굴에 눈만 붉게 빛났다.
“으악!”
“자기 얼굴 보고 놀라는 인어는 또 처음 보네.”
“그런데 네가 이게 심해의 눈인 건 어떻게 아는데?”
“당연히 나는 예전에 본 적 있으니까.”
“뭐? 예전에 네가 이걸 어떻게 봐?”
“됐고, 너 정말 그 눈을 어디서 구했어? 너 진짜 사기꾼 아니야?”
“사아기꾼?”
도라안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방방 뛰어다녔다. 시원하게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어 답답한 모양이었다. 둘의 말이 빙빙 헛돌았다. 그걸 아는 데도 시원하게 콕 짚어 말할 수 없다니!
“사기꾼이라니, 내가 뭘? 똑바로 말 해!”
“네가 심해의 눈을, 눈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왜!”
점점 높아지던 언성에 도라안과 데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곧 쩌렁쩌렁 거친 목소리가 동시에 섬에 울려 퍼졌다.
“네 까짓 게 ‘태초’일리 없으니까!”
“이건 처음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거든!”
까악… 까악… 까악…….
확실히 공기가 좋은 섬이라 그런지 새소리도 남달랐다.
도라안과 데아는 잠시 우두커니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내가 태초라고?”
“네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이라고?”
데아와 도라안의 얼굴색이 팍 달라졌다. 데아는 당황했고, 도라안은 좌절한 듯싶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있던 것처럼 너도 나를 의심하고 있던 거야?’
“1… 1세대 인어라며!”
도라안이 다시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네. 측정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데아가 보기엔, 저 노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노인은 도라안에게 데아가 태초의 환생이거나 숙주이거나, 관련이 된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을 기피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넌 진짜로…….”
도라안이 충격에 빠진 눈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아홉 번째 1세대 인어인가……?”
아주 명쾌하게 헛다리를 짚었구나, 도라안.
데아는 천연덕스럽게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자, 인어님들.”
노인이 기 싸움을 하는 인간과 인어 사이에서 온화하게 웃었다. 전 세계의 태양이 할머니에게로 몰려드는 듯 했다.
“남은 담소는 제 집에 들어가서 나누실까요? 마침 손님도 와있답니다.”
“손님?”
도라안이 의아해했다.
“그러게 이 주변으로 누군가 올 것 같진 않은데…….”
“아, 할멈. 혹시 그 재수 없는 피파글랜이거나, 재미없는 헤타 놈이기만 해봐. 그 중립 진영하고는 잘 안 맞는다고!”
“두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오신 손님은 인간이신걸요.”
뚝, 아까보다 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인간?’
데아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동화 속의 오두막집의 나무문을 끼이익 열었다. 그 안에 있는 건…….
“어어, 안녕하세요.”
권도언이 찻잔을 쨍, 건배를 하듯이 데아를 향해 까딱이며 웃었다. 데아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리서 언니인 줄 알았는데.
“백리서를 기대했다는 표정이네요? 아쉬워라.”
권도언이 얄밉게 속을 긁었다. 그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똘똘 뭉친 어린아이처럼 데아를 훑었다. 정확히는 발목 끝을.
흠칫, 데아는 발로 발목에 조금 돋아있는 검은 비늘을 가렸다.
“그래서 오랜만에 얼굴 본 소감은 어때요? 저는 반가운데, 표정을 보아하니 1세대 인어님은 아니신가 봐요.”
젠장!
◈ ◈ ◈
“저는 한때 의술을 배웠습니다. 많은 1세대 인어님들과 교류도 했었는데, 혹시 피파글랜이라는 인어님을 아시나요? 제가 직접 가르친 분이랍니다. 참 멋진 분이셨는데, 요즘은 뭐 하고 계시는지…….”
노인의 말이 길게 이어지다 끊겼다.
“…….”
“…….”
한때 ‘나는 인간이다’, ‘절대 인어가 아니다’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데아의 앞에도 찻잔이 놓였다. 권도언이 데아의 찻잔을 대신 휘휘 저어 줬다.
“땅바닥에 뭘 발라 놨나, 고개를 못 드네…….”
“뭐야, 샤샤. 아는 인간이야?”
의자에 걸터앉은 도라안이 거만하게 권도언을 훑었다. 권도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쪽은 뭐예요? 인어 남자 친구? 종족에 맞춰서 사귀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있던 인어 한 마리 잡아서 선이라도 보게 해주는 건데.”
“나, 남자 친구? 흥, 너희 인간의 기준으로 인어를 판단하지 마라. 어쩌다 이 섬까지 굴러들어 온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창’을 통해 휩쓸린 조난자겠지. 트리야 제왕의 제국은 인간에게 너그럽다. 아직 제국까지 침입한 것도 아니니 봐주도록 하지. 당장 썩 꺼져!”
“한적해 보여서 왔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어요. 공기에도 잡음이 끼나…….”
“저 건방진 인간이!”
이제 태양의 절반은 바다에 적셔 사라졌다. 노랗고 붉은 색체가 파도 위를 넘실거리며 퍼져 갔다. 노을이 왔다는 뜻이었다.
도라안이 어금니를 바드득 씹으며 포크를 들자 권도언이 능력을 쓰며 휙 피했다. 아수라장이었다. 호로록, 찻물을 넘기는 노인의 온화함을 절반이라도 닮으면 좋겠다.
“내 인간 친구야.”
탁, 데아가 도도하게 차를 원샷했다. 권도언이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살아 있는 걸 봐서 기쁘긴 한데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길드장님 눈치 빠르잖아요. 빨리 입이나 맞춰 줘요……. 내가 인간 헌터라는 것만 제외한 모든 것을 말하란 말이에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동화처럼 예쁜 집을 발견했지 뭐예요. 들리지 않고 견딜 수 없었죠.”
“휴…….”
“뭐야, 정말이야? 인간이 여길 놀러 왔다고?”
“아 맞아요. 샤샤가 놀러오라고 사정사정을 하며 지느러미를 워낙 열심히 흔들길래 속는 셈 넘어 갔는데 해일이 닥쳐올지는 상상도 못했죠.”
그러자 도라안이 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데아를 돌아봤다.
“정말이야? 네가 지느러미까지 흔들면서 초대한 인간 친구가 이 모양이라고? 너 정말 눈 낮구나?”
미친……. 도라안의 어깨 너머, 권도언이 싱글벙글 미소했다. 저 능청거리며 휘는 눈웃음이 얄미웠다.
“마… 맞아! 그나저나 길…….”
어휴, 하마터면 길드장님이라고 부를 뻔했네.
‘잠깐, 그러면 어떻게 부르지?’
“길… 길짱 님. 그런데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는지 혹시 알아요?”
도라안이 입 모양으로 ‘이름이 길짱이야?’라며 의아해하는 모습이 다 보였다. 권도언이 눈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