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7화
문득 궁금해졌다.
권속의 힘은 주군의 애정과 비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잔의 신체 나이가 멈춘 이유는 전에 붉은 머리 인어, 다샤에게 들은 대로 오로지 주군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지 않아서인가?
데아는 궁금증을 참지 않고 자잔에게 물었다. 그러자 자잔이 팩 고개를 돌렸다.
―알, 알면서 뭘 물어!
새침하게 던진 자잔이 이제 그만 나가라며 화를 냈다. 데아는 링에게서 뜯은 먹거리들을 철창 너머로 건네주었다.
“그러면 주군이 너에게 다시 관심을 주면…….”
이러니까 조금 어감이 이상한데,
“애정을 주면 너도 강해져? 쑥쑥 크고?”
―…맞아. 그니까, 더는 궁금해하지 마. 이런 주제 불편하니까.
“그런데 너, 왜 저번보다 컸어?”
―…….
데아와 모래섬 던전에서 첫 만남을 가진 이후, 자잔의 몸은 훌쩍 성장했다. 그래 봤자 여전히 어린애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트리야가 너한테 애정을 줬을 리는 없잖아.”
―이… 이…….
사실 자잔도 궁금했다. 갑자기 왜 성장한 거지? 변덕처럼 트리야가 나를 지켜보기로 한 걸까? 주군에 대한 애정이 고팠기에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을 품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데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설마 이거, 내 영향인가?’
소름이 돋을 법한 얘기지만, 내가 트리야의 주군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인어에겐 호적이 있을 리 없겠지만, 굳이 호적으로 따져 보면 자잔이 내 권속의 권속이기 때문에?
만약 정말 그렇다면, 내가 자잔에게 조금의 관심과 애정을 주어도 자잔은 마치 광합성을 하는 상추마냥 쑥쑥 자라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자잔의 주군의 주군이니까, 해당 사항이 있는 거지!
데아는 자잔을 조금 애잔하게 쳐다보았다. 불쌍한 손주… 아니, 인어. 할미의 사랑이라도 받을래? 그렇다면…….
“나랑 약속 하나 하자.”
철창 사이로 하얀 손이 쑥 미끄러져 들어왔다. 자잔은 얼떨결에 그 손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만약 몸이 완전히 자라면, 네 몸이 성체가 된다면.”
―그럴 일은 없어.
“아니 그러니까 만약에.”
데아가 느리게 웃었다. 자잔은 일순 시선을 빼앗겼다.
트리야와 닮은 눈. 그 눈이 또다시 자신을 투영했다. 시선에도 특징이 있다면, 샤샤의 시선은 늪이었다. 상대를 옭아매어 매몰시키는 늪.
“네가 성체가 된다면… 혹은 그럴 기미가 보인다면, 가능성이라도 본다면, 최선을 다해서 사형을 거부해.”
―…뭐?
“그리고 살아서 내 소원을 하나 들어줘.”
이빨을 벌린 야수처럼 약지손가락이 서로를 단단히 묶었다. 자잔의 심장이 난데없이 크게 뛰었다. 그건 직감과도 같았다.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
나는 너의 주군을 바꿀 것이다.
더 이상 트리야 밑에 있지 마. 내가 너의 번영을 약속해 줄게.
“모든 인어가 너를 버려진 권속이라 매도해도 나는 네 편이 되어 줄 거야.”
사실 난 제국을 바꾸고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성격은 아니다. 그래도 내 사람이라고 정의한 사람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거든. 그 일이 가능한 범위라면 더더욱.
“응, 알겠지?”
자잔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데아는 일어섰고, 면회실을 나왔다.
곤봉을 갈취한 간수에게 곤봉을 돌려주며 데아는 씨익 웃었다.
“뺏어서 미안해. 이만 갈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많은 혁명군은 태초가 돌아오기를, 이 썩은 제국을 바꿔 주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어디 외딴 섬에 살 수 있을 만큼의 일만 하고 안락하게 살 거야. 다만 트리야를 끌어내린 다음, 그 외딴 섬에는 데려가 줄게. 가서 오붓하게 얘기 좀 나눠 볼까. 나머지 제국 일은 알아서 해.
―샤샤 님! 도라안 님의 전서가 왔습니다.
“뭐?”
그 탑 속의 왕자님?
도라안의 전서는 짧았다. 보여 줄 게 있는데, 그걸 보려면 지금 당장 왕궁 동쪽의 탑, 자신의 거처로 오라는 편지였다. 탑 속의 왕자님이라고 말만 했었는데 정말 탑에서 거주할 줄이야.
“전에 한 번 거절했는데도 끈질기네.”
그렇게나 보여 주고 싶었나. 그때는 분명, 같이 어디 가자고 하지 않았나?
“여기 동쪽의 탑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해?”
◈ ◈ ◈
동쪽의 탑으로 가는 길. 왕궁의 복도에서 트리야를 만났다. 젠장, 젠장. 그렇게 찾을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만나기 싫을 때는 왜 이렇게 잘 튀어나오는 거야?
“안녕, 샤샤.”
트리야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지, 트리야를 중심으로 따라오던 많은 시종들과 간부들이 놀라워했다. 뭐 하냐, 갑자기 분위기 하이틴 소설이냐?
“응 안녕, 트리야.”
데아는 인사만 한 뒤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몸을 완전히 틀기도 전에 손목이 탁, 잡히고 몸이 빙글 돌려졌다. 거짓말 안 하고 정말, 정말 놀랐다. 젠장 깜짝이야.
“냄새가 나는데.”
그대로 데아의 손목 안쪽을 코에 갖다 댄 트리야가 잠시 냄새를 맡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깜빡이는 발광석에 트리야의 오른쪽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어딜 다녀왔지?”
개도 아니고, 냄새로 어떻게 알아? 어류가 후각이 뛰어나서 그런가?
“잠시 감옥에. 자잔 면회 다녀왔어.”
“음… 그 냄새가 아닌데.”
“네가 자잔 냄새를 어떻게 알아? 변태야?”
물론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일부러 성질을 긁기 위해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간부들의 ‘저 미친 것이 있나’ 하는 표정으로 데아를 노려보았다. 이로써 나는 구제불능의 건방진 인어로 소문나겠지. 후, 모든 건 계획대로.
“피파글랜의 마력이 살짝 남았는데.”
순식간에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뭐?”
“약을 발랐나 보지? 다른 곳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약품은 피파글랜의 소관이니까. 어딜 다쳤나?”
“…어, 그냥 스쳐서. 지금은 약 바르고 나았어.”
“저런.”
트리야가 비죽 웃었다.
“조심했으면 좋았을 텐데.”
“…….”
볼일은 그게 다였는지, 트리야는 데아의 손을 놓고 등을 돌려 다시 나아갔다. 멀어지는 트리야의 등 뒤에는 홀로 남은 데아만 오도카니 서있었다.
의뭉스러운 새끼……. 데아가 가운데손가락을 마구잡이로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참.”
트리야가 휙 등을 돌려서 데아는 슬쩍 손가락을 접었다.
“도라안은 의심이 많고, 제멋대로지. 그리고 자신을 추켜세워 주는 말에 약해. 그러니 대충 그가 바라는 대답을 던져 주면 혼자 납득하고 물러설 것이다. 그런 그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
“…도라안을 왜 내가 활용해?”
“그래야―”
트리야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저 위에 있는 동료들을 하루라도 빨리 구할 거 아닌가?”
“…네가 도와준다며?”
“도라안이 그 쓸모를 대신 해줄 거야.”
그리고 작게 웃었다.
“뭐, 한번 다뤄 보면 알겠지.”
◈ ◈ ◈
“흠흠… 어, 왔어, 아홉 번째?”
도라안은 데아를 의미심장하게 쭉 보고는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허둥지둥 도라안의 무거운 짐을 조개껍데기 가방에 싸고 있는 기리안이었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이 정도는 기본이지.”
―엇, 태초를 위하여!
오늘도 기리안은 데아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혔다.
“응, 그래.”
“아홉 번째! 이리 와봐. 이 지도 볼래? 바로 여기가 너와 내가 갈 곳이야.”
선글라스를 쓴 도라안은 지도의 한 군데를 짚었다.
“유일하게 이 위대하신 다섯 번째 1세대 인어 도라안님이 인정하는 인간이 사는 곳이지.”
“인간이 여기 있다고?”
“그래. 이곳은 지상이니까.”
“지금 우리 지상에 나가?!”
“아하, 그래. 너는 지상에 어울리고 지내던 인간 친구들이 갇혀 있다고 했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전에 감옥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잖아. 그걸 내가 못 들을 줄 알았어? 바보 아냐, 이거?”
“......”
도라안은 선글라스를 휙 벗더니 씨익 웃었다.
“나에게 잘 보이면 그 지상 감옥까지 안내해 줄 수 있지. 그리고 그 인간들을 빼내 줄 수도 있어.”
“뭐? 어떻게?”
“나는 이곳 길을 아주 잘 알고 있거든. 그리고 나는 간수들의 시선을 돌리는 방법도 알고 있지. 뭐, 설사 걸려도 그 누가 나에게 뭐라 할 수 있겠냐마는.”
‘어, 잠깐 이거 설마…….’
“정말 대단하다. 나는 몇 번을 해도 실패했는데, 이렇게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다니! 역시 넌 대단해. 어떻게 이곳 지리와 구조에 대해 잘 아니? 혹시 너… 이곳의 실세니……?”
혀에 경련이 날 것 같았지만 일단 트리아의 조언을 떠올려 도라안을 추켜세워 줬다.
실세? 저 멀리 기리안이 귀를 의심하며 데아를 돌아보았다.
도라안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칭찬을 들은 도라안이 치솟는 입꼬리에 아랫입술을 꽉 깨문 것이다.
“하! 참나, 네가 트리야 제왕의 눈에 띄었다더니, 보는 눈은 정확하네. 맞아. 내가 바로 트리야 제왕의 오른팔이지. 모두가 칸나니아로 알고 있지만 헛소문이야.”
“역시! 어쩐지, 네가 더 빛나 보이더라.”
도라안의 콧대가 더 높아진 건 착각일까?
“오랜만에 가치를 알아보는 인어를 만나니 기분이 좋네? 그러나 나는 너를 아직 믿지 않아. 그러니 확인을 해야겠어.”
의심을 하고 있기에 확인을 하겠다고 말하는 자의 얼굴치고는 지나치게 밝았다. 얼굴로만 본다면 이미 도라안은 데아의 십년지기 친구였다.
‘설마 트리야가 잘해 보라는 건 이런 거였나!’
“무슨 확인?”
“뭐,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네가 정말 1세대 인어인지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니까. 네 친구들을 구하는 건 그 다음으로 하자고.”
‘젠장, 이걸 어떻게 둘러대지?’
“아 잠깐만, 나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이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도라안은 데아의 손목을 훅 잡고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저 멀리 하얗게 회오리치는 뭔가가 있었다. 게이트와 비슷하지만 게이트가 아닌 저건…….
“포탈이야.”
“포탈?”
“마력이 빙빙 도는 구간이지. 아까 말했지? 내가 존경하는 인간이 산다는 섬. 이 포탈을 통하면 금방이거든.”
“확인한다는 게, 그 인간이 확인하는 거야?”
“그래! 그 인간은 인간이지만 몇백 년 넘게 살았어. 사정이 있거든. 그 노인은 웬만한 1세대 인어보다 더 예민하게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으니, 널 보면 확신해 줄 수 있을 거야. 네가 정말 1세대 인어인지 아닌지를.”
데아는 입술을 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