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96화 (96/223)

※ 096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 길을 빙빙 돌아 왕궁으로 향하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야 당연히 내가 인간이지. 당연한 거 아냐? 그 말을 왜 하는 거야?’

“상태 창.”

인간 헌터로 자라서 이렇게 멋들어진 상태 창도 있잖아. 당연히 나는 인간…….

상태 창을 훑어보던 데아의 시선이 멈췄다. 데아의 시선을 완전히 앗아간 곳은 스킬의 마지막 부분.

[인어화(S):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하얗다?’

전신의 피가 밑으로 쑥 꺼졌다.

‘잠깐, 미친…….’

“경배야, 경배야. 말 좀 해봐, 경배야.”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미친 사람처럼 다급하게 속삭였다.

“자니? 경배야, 경배야?”

새벽 두 시의 구남친처럼 애타게 불렀지만 경배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비틀비틀 걷던 데아는 어느새 우뚝 멈춰 있었다.

휙―! 데아가 황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아득한 깨달음이 거대한 입이 되어 데아를 한 입에 집어삼켰다.

‘내가……! 태초잖아……?!’

나 왜 이걸 몰랐지? 데아의 입이 벌어졌다.

왜 이걸 이제 깨달았지? 힌트는 사방에 바닥에 흘린 쌀알처럼 온갖 곳에 있었는데!

‘아냐, 그래도 그 누가 감히 이걸 상상하겠어?’

46% 밖에 구현되지 않은 경배는 계속 몸이 변한다. 그리고 하얀 비늘, 그리고…….

“너는 인간으로 자라났다는 걸”

내가 인간으로 자라났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 피파글랜.

“…….”

기생 생물이라던 태초는 인간의 뇌로 들어가 숙주로 살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당연히 태초는, 만약 기억이 없다면…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겠지. 인간계에 평생을 살았을 테니까.

게다가, 예전에 여례아의 납치된 직후 꾼 꿈의 내용을 데아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6년 전의 모습을 한 자신의 도플갱어가 나타난 그 꿈!

그 때는 이상한 꿈이라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그냥 내 몸을 돌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나는 잃어버린 시간이지.’

‘죽어버린 사람이고, 그럼에도 떠나지 못한 기억이야.’

그 애는 내가 뺏은 이 몸의 진짜 주인, ‘이데아’였던 것이다.

‘…내가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뜻이야?’

‘비슷해.’

‘이데아’의 주장은 타당했다.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기생충이었겠지. 데아는 손톱을 아그작 아그작 깨물었다. 그 말이 쿠션 없는 직구였다니.

‘그때 그 고기를 먹는 게 나았을까?’

‘인어의 뇌. 나는 그걸 먹었어.’

맙소사……. 그렇다면 나를 지키고 죽은 이데로는 결국, 내 혈육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어쩌면 이데로의 입장에서는 내가 여동생의 자아를 뺏은 원수쯤 되지 않았을까?

‘넌… 기생충치고는 거대하고, 또 신비로워.’

‘내 몸을 잘 부탁해.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살 것 같아.’

맙소사, 이데아… 미안하다……!

‘우리 가족 장례 좀 대신 치러 줘……. 부탁이야.’

그건 내가 꼭 노력할게……!

기생 생물, 꿈에서 본 ‘이데아’의 말, 없어진 기억, 바다의 창, 이상한 스킬들, 물속에서 숨을 쉬고, 인어가 되고.

그래……. 인간들은 그런 거 잘 못한다는 피파글랜과 권도언의 주장이 타당했던 거다. 거기에다가 하급 인어의 ‘바다님’이 합쳐지니, 이제 데아도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사실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납득은 갔다. 모든 의문이 해결되었다. 내 헌터 등급이 N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젠장, 젠장.’

그리고 찾아온 감정은 쪽팔림이었다.

“최대한 몸을 사렸어야지. 방심하다 수렵당해 죽는 게 아니라!”

“그나저나 태초도 불쌍하네. 권속을 여덟이나 뒀는데 두 갈래로 나눠져서 죽네 마네 서로 치고 박고 싸우고 있다니.”

“너네도 좀 이상해. 언제 올지 모르는 인어를 기다리는 집단이라니.”

“기생충이라니, 너무 하찮아지잖아……!”

아, 으아아아악―!!

피파글랜은 진작에 알고 있던 거였다.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화를 내지 않은 게 분명하다. 당연하겠지. 내가 하고 있던 건 자기 얼굴에 침 뱉기였으니까!

졸지에 방심하다 수렵당해 죽은 어이없고 하찮은 기생충이 된 이데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어마어마한 정체를 깨닫자마자 한 게 과거의 언행에 쪽팔림을 느끼기라니…….

“그런데 왜… 피파글랜은 말을 안 해줬지?”

그래도 너무하다. 그렇게 따지면 넌 내 권속이잖아? 이런 흑역사를 만들기 전에 말렸어야지! 데아는 적반하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좌절했다.

피파글랜이 내 권속이라니. 이렇게 권속 농사가 실패할 수도 있다니……. 전기공을 푱푱 날리던 어류 삐○츄, 전기 장어가 내 권속이었다니…….

아냐, 그래도 피파글랜은 강하고 말도 잘하고, 똑똑하고… 나름의 세력도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인간을 위한다고 했지. 자기 권속들 통제도 잘 하고 있는 것 같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인어지. 순식간에 굽힐 팔이 생긴 데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제는… 트리야지.’

세상에, 이건 정말 실패한 권속 농사다. 팔이 밖으로 굽은 데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기다가…….

“트리야가 당신의 시체를 가져갔어.”

‘트리야가 태초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패륜아야?’

데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데 나... 지금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아닌가? 그리고… 트리야는 태초를… 싫어하지 않나?’

그간의 말을 들어 보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마저도 다 옛날 얘기 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태초가 돌아오면 트리야는 왕위를 뺏기게 될 테니까. 틀림없이 나를 죽이려 들 터였다.

아니, 애초에 과연 트리야가 과연 이 사실을 모를까 의문이 들지만……. 확실한 건 저 왕궁은 아가리를 쩌억 벌린 호랑이 굴이라는 거였다.

‘나… 과연 돌아가도 괜찮나?’

시치미라면 자신 있었다. 그래, 잠시 동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자.

그때 하얀 빛무리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 하얀 빛무리를 본 장소, 태초가 힘을 남겨 두었다는 곳, ‘태초의 고목’도 같이 떠올랐다.

‘그곳에 가야겠어. 그곳에 뭔가가 더 있을 거야.’

하지만, 일단 오늘 말고 내일.

◈          ◈          ◈

결국 왕궁에 돌아왔다. 내 권속의 권속… 아니, 자잔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태초를 위하여!

―태초를 위하여!

저 멀리 간부들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이제 저 말도 예전처럼 무심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젠장, 젠장, 데아는 꾹 어금니를 깨물며 눈을 질끈 감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모른다. 아직 트리야는 내가 나를 자각한 걸 모른다. 물론 난 아직까지 그 어떤 기억도 없지만……. 아, 나는 왕위에 관심도 없는데, 왜 이런…….

“야. 링.”

―아, 깜짝이야!

나는 정원 구석에서 몰래 쪽잠을 자고 있던 링을 발견해 꼬리로 철썩 찼다. 링은 처음엔 짜증을 부리더니, 이내 이글이글 끓는 내 눈을 보고 기겁하며 기립했다.

“너 먹을 거 많이 들고 다니지. 다 내놔.”

―와, 이런 양아치가……!

“빨리!”

―아, 아, 알았어요!

일단 고민은 나중에 하고, 나는 자잔 사식이나 넣어 주러 가야겠다!

◈          ◈          ◈

“비켜.”

―태, 태초를 위하여!

―태초를 위하여!

데아가 차갑게 일갈하자 감옥의 앞을 지키고 있던 간수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기억도 없고, 사실 여전히 믿기지도 않지만. 어쩌면 스스로가 100년 전에 죽었다는 기생… 아니, ‘태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뻔뻔함이 생겼다.

“곤봉 내놔.”

―네, 네?

“곤봉.”

―여, 여기 있습니다!

그랬다. 데아는 지금 뇌를 잠시 꺼낸 상태였다.

뭐 어쩌라는 것인가? 내가 태초라는데? 내가 사실 이데아라는 어린 여자애 몸을 장악한 기생충이라는데!

어딘가 배배 꼬인 듯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따위로 꼬여버린 인생, 조금 막 산다고 해서 달라질게 더 있나 싶어 괜한 웃음까지 났다.

“자잔 어디 있어? 면회 왔는데.”

―지금 시간은 면회가 불가능…….

“불가능?”

곤봉을 탁탁, 손으로 두드리며 음습하게 웃는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를 앞에 둔 간수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역시 1세대 인어다 이거지, 성격이 매우 나쁘군!’

―…이었지만, 샤샤 님이라면 예외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데아는 간수들에게 안쪽으로 안내받았다. 지하 감옥, 수중 감옥. 여기를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던 게 며칠 전인데, 벌써 까마득한 옛날 같았다.

―너…….

저 멀리 자잔이 보였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자잔이 우뚝 굳었다.

“자, 이제 너희들은 나가.”

―네? 하지만 면회는 반드시 간수가 옆에 있어야만…….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나가.”

그러나 간수들은 우물쭈물 물러서지 않는다. 새로운 인어계의 떠오르는 깡패, 이데아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지랄맞다고 소문이 날까?

“내 말이 안 들려? 나가!”

데아는 곤봉으로 철창을 강하게 내리쳤다. 물속임에도 강한 파동이 퍼졌다. 간수들과 자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들은 똑같은 상상을 하고 있겠지.

‘저, 저 저런… 생각 없는 인어 같으니!’

그리고 그건 데아가 의도한 바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태초’는 다정하고, 우아하며, 진중하지만 그만큼 흑과 백이 짙고, 또 적에게 잔인한 성정이랬다. 한마디로 고귀한 기품이 흐르는 인어였다는 건데…….

그러니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반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다!

방탕하고 가볍게, 두루뭉술하고 철없는 부르주아처럼 행동하자. 적에게 겁을 먹고, 간부와 간수들에게 건방지게 대하면 딱 트리야 하나를 믿고 나대는 어리숙한 1세대 인어쯤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데아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아, 알겠습니다. 면회가 끝나셨다면 이곳에 있는 줄을 당겨 주세요.

―그럼 이만. 태초를 위하여!

인어들이 샤샤샥― 밖으로 사라졌다. 분명 뒤에서 엄청 씹어 대겠지.

간수들의 꼬리지느러미의 흔적까지도 보이지 않게 되자 데아는 한량처럼 웃던 미소를 싹 거뒀다.

“안녕, 자잔.”

―너, 너, 뭐야?

“뭐가?”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어.

“내가?”

데아는 다시 빙구처럼 웃으며 철창 앞에 느리게 주저앉았다.

자잔 정도면 농사 성공이지. 귀엽고 솔직하잖아.

“자잔. 트리야와 태초 중에 누가 더 좋아?”

직구를 던졌다. 자잔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걸 왜 물어봐?

“아 그냥, 궁금해져서.”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야.

그러나 자잔은 금세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내 주군이지! 그걸 말이라고 해?

“아하, 결국 트리야다 이거지.”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인간 주제에!

목소리를 높여 데아의 말에 맞서던 자잔은 금세 다시 풀이 죽은 채 말을 이었다.

―태초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야.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영광. 우리는 모두 그렇게 배웠어. 태초는 제국의 상징이지만, 결코 생각해서도, 그리워해서도 안 된다고… 과거에 머무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짓도 없으니까.

“돌아온다면?”

자잔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방금 그 말은 역모다. 감당할 수 있겠어? 샤샤?

“역모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자잔은 오래 침묵했다. 데아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많은 혁명군이 태초를 추종하지. 그러니 나는 태초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자잔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어두운 눈동자가 시야에 비춰졌다.

―그러나 태초는 내 주군의 주군이야.

자잔이 트리야를 바라보는 것처럼 트리야는 태초를 바라봤을까?

지금의 태초는 트리야의 왕위를 위협하는 적이지만, 적어도 과거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트리야는 지금도…….

자잔이 좌절하듯 얼굴을 가렸다.

―솔직히, 내 주군이 사랑하는 태초라면, 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데아가 생각지도 않은 걸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잔의 고개가 더 수그려졌다.

―원래 권속들은 그래. 주군에게 약해…….

그래서 내가 이렇다며 자잔은 말을 끝맺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