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5화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어. 손을 한 번 휘두르면 바다가 하늘을 덮었고, 모든 생명이 태어나기도, 사망하기도 했지. 먼 옛날, 그분은 모든 것의 요람이었고, 세계였고, 신이었지.”
“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간에게 당했을 뿐이야. 그래서 길을 잃은 거고, 곧 돌아오실 예정이지. 의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
“…그런데 인간에게 당한 것치고는,”
데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피파글랜… 님은 인간을 아낀다고 들었어요.”
―하여간 피파글랜 님이시나 너희나, 인간을 지나치게 아낀다니까.
―우리가 피파글랜 님의 권속인 이상, 그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전에 모래섬 던전 공략 중 만난 다샤와 올리아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태초가 인간에게 당했는데 왜 인간을 아끼는 건가요?”
“내가 별종이긴 하지. 태초가 인간을 좋아했거든. 나는 그분을 닮았을 뿐이야. 인간을 흥미로워하고, 연구 대상으로 삼지. 공존하면 좋잖아?”
진짜 맹목적이네.
“하지만 이해가 안 가요. 왜 태초가 돌아올 거라 그렇게 단언하는 거예요? 세상에 죽지 않는 존재는 없어요.”
“그것이 가능하기에 인어들은 기적이라 불렀지. 물론 멋지기만 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피파글랜이 느릿하게 일어나 책을 한 권 뽑아 왔다. 태초의 짧은 기록이 적힌 금서였다.
“태초의 본질은 기생 생물이거든.”
―…….
―…….
“…….”
적막이 끼얹어졌다. 그러나 유리와 알레의 표정이 그대로 인걸 보니 둘은 알고 있던 사실 같았다.
“기생 생물……?”
그 숙주의 뇌에 들어가 쪽쪽 생명력을 갈취하고 떠나는 그 기생 생물? 극혐 벌레?
“그래서 트리야가 서적을 전부 불태우고 감췄겠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태초의 본질과 인어의 근원이 하등한 기생 생물이었다는 걸 절대로 많은 인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잠깐, 잠깐, 그래서 태초가 살아 돌아올 거라고 하는 거예요? 기생 생물이 멀쩡한 한, 새로운 숙주를 장악하고 그 몸으로 살아 돌아올 테니까?”
“비슷하지.”
“세상에…….”
너네 미쳤구나. 그렇게 돌아온 인어가 어디 인어냐? 좀비지.
물론 뒷말은 삼켰다.
―데아야. 그래서 므아나 님, 윌로 님 그리고 움 님이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계로 가신 거야.
“윌로?”
설마 그거 이위로냐?
―그래. 윌로 님. 넌 아직 뵌 적이 없겠구나. 하긴 나도 멀리서 딱 한 번 봤어. 연보라색 비늘이 정말 인상 깊은 분이었지.
젠장, 맞나 보다. 하긴 말을 했으니까 1세대 인어겠지.
―그분들은 ‘창’을 열고 10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인간계를 돌고 도셨어. 왜 많은 세계에 가셨는지는 명확해. 인간들에게 태초 님의 머리 부분을 빼앗겼거든. 하지만 어느 인간계의 인간이 가져갔는지는 몰라서 막막한 마음으로 많은 세계를 가고, 많은 세계를 멸망시켰지. 그러나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야.
―하지만 곧 찾아내실 겁니다. 반드시요.
―맞아요, 알레. 심지어 인간들은 예로부터 인어 고기를 먹는 경향이 있었잖아요. 그러니 그분은 돌아오실 거예요. 반드시……! 누군가에게 먹혀서, 그 몸에서 새롭게 눈을 뜨시겠죠.
사이비 종교 같았다.
데아는 뒤늦게 혁명군이라는 이름을 단 다단계에 발을 담군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물속만 아니었다면 식은땀을 뻘뻘 흘렸을 거다.
‘그러니까 그 말은 즉, 그 기생충이 누구 몸을 기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단 얘기잖아!’
―태초 님이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하급 인어도 우리와 함께 어울릴 수 있어! 데아야, 그거 알아?
“아, 아니 몰라.”
―지금은 모두가 하급 인어들을 무시하지만 저들은 높은 군사 집단이야. 약해 보이지? 태초가 돌아오지 않아서 약해진 거야. 그들은 우리의 마력을 보호하는 철벽같은 존재야. 아마 마력이 이렇게나 빠르게 사라지는 원인 중에는 그것도 있을 걸!
―정말요. 그립네요. 하급 인어들은 태초를 바다님이라 부르며 따랐었죠.
‘으응……?’
데아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라고?’
방금 내가 뭘 들었지? 잘못 들었나?
―아, 그리고 새로운 벽보를 붙여야 해요. 이거 보실래요?
유리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커다란 뭉치를 둘둘 풀었다. 미역 줄기로 만들어진 팽팽한 판에 하얗게 글자가 새겨져 있는 벽보였다.
[태초는 돌아온다!]
‘이거 쓴 거 너였냐?!’
게다가 이번에는 그림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인어의 형태를 한 뭔가 손에 거대한 창인지 칼인지 활인지 모를 파도를 들고 이상한 용을 탄, 꽤나 위풍당당한 인어의 그림이었다.
“이거 설마 태초야?”
―응. 그거 알아? 이 거대한 제국의 아래에는 해룡이 잠들어 있어. 모든 백성이 아는 전설이지. 주인인 태초가 죽고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해룡은 수천 년 동안 바다를 수호했던 영물인걸. 분명 어디선가 이 제국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거야.
용을 펫으로 다뤘다니.
―그리고 태초는 바다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기를 드신대. 그 무기를 한 번 쓰면 해일이 이렇게 촤하!
그리고 고대의 아름다운 신이니, 바다의 칼날이라는 말이 오고 갔다. 그 대화 속에서 유일하게 데아만이 말이 없었다.
‘시, 시벌……. 이, 이게 뭐야?’
내가 정말 미친 생각을 하는 거일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거 경배 아니야?’
아냐 아냐, 그럴 리가. 경배는 말따먹기나 하고 능글맞게 텃세나 부리는 스킬인걸... 후 내가 착각하는 거겠지.
―정말 그런 것 같아?
조용히 하자 경배야 안 그래도 나 심란하니까…….
‘그런데 너 갑자기 나와서 왜 말하냐. 그동안 한마디도 없었잖아? 어, 경배야?’
그러나 경배는 다시 잠에 든 건지 말이 없었다.
―그 무기를 실제로 봐서 기억이 나요. 아찔한 강함이 휘몰아치는 활이었어요. 하얀 비늘과 어울려진 완벽한 모습이었죠. 그 이름이 분명… 사해의 화살이었죠?
어, 데아는 우뚝 굳었다.
사해의 화살은 금시초문이었다. 더군다나 창이 아닌 활이라면 경배가 아니다.
게다가 비늘이 하얀 색이라니, 내 비늘은 까만색이다!
―정말요? 부럽다! 저도 보고 싶은데!
“화, 활 맞아요?”
“응. 맞아.”
‘역시나!’
내가 너무 과대 해석을 했다. 후, 하마타면 오해할 뻔했네. 데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마음을 소란하게 만든 고민을 끝내고 나니 다른 내용이 술술 머리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방법이 벽보밖에 없어서 걱정이네요. 곧 모임을 개최할 예정이지만… 백성들에게 태초에 대한 정보를 알려야 하는데 모든 것이 금서가 되어버려서…….
데아는 이 대화를 빠르게 끝내고 싶어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태초에 대한 내용을 그만 알고 싶었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뇌는 이미 과부하였다.
‘자자, 이제 끝내자, 끝!’
덕분에 모임은 빠르게 끝났다.
◈ ◈ ◈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서는 길, 모두가 나가자 피파글랜이 빠르게 데아를 잡았다.
“샤샤?”
데아는 무시했다.
“고양이?”
“……?”
‘미쳤습니까? 휴먼… 아니, 머메이드?’
피파글랜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당장 왕궁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면, 잠시 산책을 할까?”
“허… 그래. 아, 나도 물어볼 게 있어.”
“뭐지?”
“혹시 이런 거 더 있어?”
데아가 꺼내 보인 건 통신 소라였다.
“인간도 쓸 수 있는 거 맞지?”
“의외네. 이런 통신 물품에 욕심을 내고.”
“아니, 그냥…….”
피파글랜은 잠시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새로운 소라 껍데기를 하나 꺼내 왔다. 그리고 훅 숨을 불어넣더니 데아에게 건넸다.
‘순순히 주네……?’
“고마워.”
데아는 피파글랜이 준 통신 소라를 인벤토리 안으로 넣었다.
그렇게 둘은 혁명군 마을의 외곽을 따라 유유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데아는 열변을 토했다. 속은 게 억울해서 더 말이 험하게 나왔다.
“자기가 없으면 자기가 만든 종족이 죽는다니.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면 애초에 위험한 일에는 최대한 몸을 사렸어야지. 방심하다 수렵당해 죽는 게 아니라!”
유리가 봤다면 뒷목을 잡고 혼절할 발언이었다. 존대도, 예의도 전부 내팽개쳤다. 내가 인어도 아니고 인간인데, 여기 법이 무슨 소용인가 말인가.
“내가 한국에서도 이런 왕들을 몇 봐서 아는데, 보통은 자기 힘을 너무 믿거나 과신해서, 혹은 너무 나서서 된통 당한 경우가 많더라고. 태초가… 네가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그랬던 것 같지는 않지만. 솔직히 어이없어.”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는 그만큼의 의무도 딸려온다. 태초가 종종 하던 말이었단다.”
“그래. 그럴 수도 있는데…….”
데아는 머리를 긁었다.
“난 모르겠어.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죽음까지 불사할 정도의 더 많은 의무를 따라야 한다니. 너무 무책임해. 그러다 그 사람이 죽으면? 결국 얻는 게 뭐야? 무덤에 걸릴 대통령훈장?”
“…….”
피파글랜은 지그시 데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어떤 인어도 그렇게 말을 했었단다. 그 인어는 사랑하는 태초가 살아 있기만을 바랐거든. 모든 것을 버려도 괜찮으니, 살아서 옆에만 머물러 달라고 태초에게 부탁했지. 그러나 거절당했어. 태초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자신의 안전이 아닌, 권속들의 안전과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평화였으니까.”
“와, 그 인어 나랑 말이 좀 통하겠네. 누구야? 1세대 인어지?”
“트리야.”
“…….”
데아가 자기를 놀리냐는 듯 눈썹을 씰룩 올렸다. 표정이 더없이 싸늘했다.
“폭군과 동급 취급을 해줘서 아주 고오맙습니다.”
“폭군의 자비 아래서 그 누구보다 존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조금 유쾌한걸, 샤샤.”
“됐어. 내가 바란 대접도 아니었어. 그나저나 태초도 불쌍하네. 권속을 여덟이나 뒀는데 두 갈래로 나눠져서 죽네 마네 서로 치고 박고 싸우고 있다니. 내가 태초였으면 슬펐을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피파글랜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괜히 뜨끔해져, 데아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트리야 제왕 말이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가 마지막 동족이라나? 아홉 번째 1세대 인어가 정말 있어? 사실 나는 잘 몰라.”
“…….”
“뭐, 믿어 준다면 나야 고맙지만.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 흉내를 내고 있어서 그나마 내가 이 험난한 독재 국가에서 안전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응. 그런데 너네도 좀 이상해. 언제 올지 모르는 인어를 기다리는 집단이라니.”
데아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그걸 나라고 잠깐 착각하다니. 잠깐이었지만, 나도 참 이상했지.
“하지만 조금 놀랐어. 기생 생물이 이 많은 종족의 근원이라니…….”
“너무 체면이 안 산다고?”
“…누가 그렇게 말한대?”
물론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솔직해져도 돼.”
“…어. 솔직히 그래. 기생충이라니, 너무 하찮아지잖아……!”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그런데 그걸 알아야 해, 샤샤.”
피파글랜이 그 누구보다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데아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이때 깨달았어야 했다. 이게 미래를 예측한 인어의 표정이라는 것을.
“너는 인간으로 자라났다는 걸”
“...응? 그야 당연하지.”
“그래. 넌 인간이야. 인간으로 자라났어. 그걸 기억해.”
‘뭐야……?’
그 말을 끝으로 피파글랜은 출구를 손짓하고는 날 배웅했다.
“잘 가.”